•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3) 일연과≪삼국유사≫
  • (2)≪삼국유사≫의 찬술기반

(2)≪삼국유사≫의 찬술기반

 일연이 선종승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 중 가장 많이 읽히는≪三國遺事≫는 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삼국유사≫는 물론 기본적으로 역사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불교의 내용과 관련시켜 보면, 선종계통의 저술은 아니며 불교신앙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저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0512) 金煐泰,≪三國遺事 所傳의 新羅佛敎思想硏究≫(東國大 出版部, 1979).
金相鉉,<三國遺事에 나타난 一然의 佛敎史觀>(≪韓國史硏究≫ 20, 1978).
그렇다면 그의 사상적 경향에서도 그러한 단면을 발견할 수 없을까. 앞서 언급하였지만 어느 시기보다도 원종 5년에 인흥사로 옮겨간 이후인 그의 말년이 주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사회상황의 변화에 따라 일연 자신도 선사상을 축으로 하면서도 신앙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0513) 李基白,<三國遺事 紀異篇의 考察>(≪新羅文化≫ 창간호, 東國大, 1984)와<三國遺事 王曆篇의 檢討>(≪歷史學報≫ 107, 1985)에 의하면≪三國遺事≫ 王曆·紀異篇은 다분히 국가·국왕 중심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일연이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260년대 전후에 부각된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의 왕정복고는 몽고에 의한 고려의 몰락을 의미하지만,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일연으로서는 정치·사회변동기를 맞이하여 사상적으로 나름의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삼국유사≫의 찬술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룩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인흥사 이후 일연의 사상적 경향을 추적해 보면 충렬왕 4년(1278) 인흥사에서 간행되었으며 현재 해인사의 寺刊板으로 소장된≪역대연표≫가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 이 자료를 매개로 하여 일연의 사상적 경향과≪삼국유사≫의 찬술기반을 살펴볼 수 있다.0514) 蔡尙植,<至元 15(1278) 仁興社刊≪歷代年表≫와≪三國遺事≫>(≪高麗史의 諸問題≫, 1986 ; 앞의 책, 1991).

 ≪역대연표≫는 중국과 그 주변 민족에 의해 건설된 여러 나라의 역대 왕명과 연호를 정리하여 수록하고, 그 말미에 신라·고구려·백제·고려의 순서로 왕명과 재위년수를 밝히고 우리 나라의 연호를 부기하고 있다.≪역대연표≫를≪삼국유사≫의 찬술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지만, 일반적인 연표의 성격과≪역대연표≫의 내용을 고려할 때 이 자료는≪삼국유사≫의 선행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자료의 작업기간은 우리 나라의 역대 왕명과 그 재위년수를 기록한 부분을 참고한다면 충렬왕 즉위년∼충렬왕 4년(1274∼1278) 사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자료가 갖는≪삼국사기≫와≪삼국유사≫와의 관계는 삼국의 역대 왕명과 재위년수를 기록한 부분에서 판명할 수 있다. 이 자료는 삼국에 관한 부분은≪삼국사기≫ 연표의 기재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 사실을≪삼국유사≫의 찬술과 관련시켜 해석한다면, 이 자료는≪삼국유사≫의 선행작업으로 삼국에 해당되는 부분은 일단≪삼국사기≫를 저본으로 하여 정리한 것으로 헤아려진다. 이는≪역대연표≫가≪삼국사기≫ 연표만을 따랐기 때문에 伽倻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을 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 이 자료를 토대로 만든≪삼국유사≫에서는 왕력편의 독립항목으로 ‘駕洛國’을 설정한다든가 또는<駕洛國記>를 독립된 자료로 수록하여 보충한 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만 이 자료가≪삼국유사≫를 찬술하기 위한 선행작업이었다는 중요한 근거는 이 자료와≪삼국유사≫ 王曆篇의 기재양식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비록 삼국에 관한 내용은≪삼국사기≫를 따랐다고 하더라도 이 자료의 간행을 계기로 하여 일연과 그의 문도들이 우리측의 많은 자료를 입수, 정리하고≪삼국사기≫에서 소홀한 내용을 보충하여≪삼국유사≫의 찬술에 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역대연표≫를 간행한 인흥사는 어떠한 사원인가. 일연이 원종 5년에 영일의 吾魚社에서 이 곳으로 옮겨올 당시까지도 인흥사는 대규모의 사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연의 불교계에서의 위치나 충렬왕 즉위년에 원래 仁弘社이던 명칭을 仁興社로 사액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일연이 거주한 시기(1264∼1277)에 그 규모가 크게 확장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인흥사의 성격을 더 이상 파악하기에는 자료의 제약으로 어렵다. 또≪역대연표≫의 성격으로 보아서도 인흥사가 소속된 종파가 가지산문이라 하여 단순히 선사상만을 표방하는 사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존하는 자료로서≪역대연표≫와 비숫한 시기에 인흥사에서 간행하였거나 인흥사와 관련되는 승려가 주관하여 간행한 3종의 판본이 주목된다. 이들은 ①≪大悲心陀羅尼經≫(충렬왕 19년), ②≪法華經普門品≫(충렬왕 원년 ; 禪厶厶寫), ③≪人天寶鑑≫(충렬왕 16년 ; 包山 禪厶厶題) 등을 들 수 있다.

 위의 자료 ②·③에 보이는 禪厶厶의「厶厶」자는「隣」의 古字이며 隣은 麟과도 통용된 사실을 생각하면, 禪厶厶은<일연비음>의 문도 중에 나타나는 ‘仁興社 禪麟’과 동일인이다. 이는 자료 ③에 수록된 일연의 後識와 선린의 발문에서 뒷받침된다. 이로써 선린은 일연의 문도임을 알 수 있다.≪역대연표≫와 자료 ①·②·③ 등이 인흥사에서 간행된 사실은 분명하다고 하겠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판각을 치를 수 있는 기술적인 여건은 만들어져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자료 ③을 간행할 때에 선린이 쓴 발문에서 “내(선린)가 지난 해(1289) 봄에 國師(일연)을 찾아뵈러 인각사에 갔는데 국사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人天寶鑑錄은 실로 학자의 보물이다. 내가 찍어서 유포하고자 하는데 네가 필사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나는 그 때 눈이 어두워 못하겠다고 사양했다”라는 구절을 접할 수 있다. 이로 보면 선린은 필사에 능했으며 일연이 입적할 당시에는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자료 ③은 뒤에 바로 선린과 그의 문도로 생각되는 大直과 惠團에 의한 공동작업으로 판각되긴 하였다.0515)≪人天寶鑑≫ 판본의 板心에 이들의 이름이 보인다. 이와 같이 인흥사를 중심으로 필사에 뛰어난 선린과 판각기술집단이 존재하여 독자적인 판각활동을 담당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그 의의가 깊다.

 이는 일연계통이 13세기 중반 무렵의 대장경조판에 가담하였을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며, 나아가≪삼국유사≫의 초간도 인흥사를 중심으로 이들에 의해 이룩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선린은 13세기 중반 전후의 젊었을 시절 그의 스승인 일연을 좇아 南海分司都監에서 직접 필사와 판각에 참여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다음은≪역대연표≫가 어떤 사상적 경향 속에서 간행된 것인지를 살펴볼 차례이다. 이를 직접 설명해 주는 것은≪역대연표≫보다 3년 전에 간행된 자료 ②로서 일연이 인흥사에 머물 때 간행된 것이다.≪普門品≫은≪法華經≫의 제25품으로서 원래 명칭은≪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이며, 독립된 경전으로 취급하여≪관음경≫이라 할 정도로 관음신앙의 근본경전이다. 그 내용은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설한 것이며 현세구원적·실천적 성격이 두드러진다.0516) 법성,≪백화도량에로의 길≫(경서원, 1982).
鄭炳三,<統一新羅 觀音信仰>(≪韓國史論≫ 8, 서울大 國史學科, 1982).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일연과 그의 문도들이 현세구원적 관음신앙에 심취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자료 ①에서도 찾아진다.≪大悲心陀羅尼經≫은≪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經≫의 줄인 이름이며, 간단히≪千手經≫이라고 하여 일상화된 경전으로서≪보문품≫과 더불어 실천적 관음신앙을 대표하는 경전이다. 이렇듯 13세기 후반기에 인흥사가 현실적 구원과 실천적 성격을 띤 관음신앙을 표방하면서 다라니신앙을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가 거의 30년에 걸친 대몽항쟁이 실패로 끝나고 원 간섭기로 고려사회가 재편되어 가는 시기라는 점과 관련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왕정복고의 주도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던 일연은 최씨정권을 비롯한 무인세력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된 민중의 처지를 깊이 인식하였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들을 왕정복고의 지지기반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일연은 이러한 민중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현실적 차원에서의 구원과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한 신앙적 노력의 일환으로 이러한 성격을 띤 불교를 표방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한편 이민족의 침략이 야기한 민중의 고통과 복속국으로 전락된 현실은 일연에게 있어서 민족의 위기감으로도 발전했을 것이며, 이에 대한 대응의식에 의해≪삼국유사≫의 저술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실천적·현실적 성격을 띤 관음신앙이나 밀교의 다라니신앙에 바탕한 이 시기 일연의 사상적 편향은 현실인식의 산물이며, 이는 궁극적으로≪삼국유사≫ 찬술의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삼국유사≫의 찬술배경과 관련하여≪삼국유사≫가 과연 일연 단독의 저술일까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不用意한 一漫錄이기에는0517) 崔南善, 앞의 글. 너무나 널리 두루 고증한 각고가 기울여져 있다. 그 인용된 書目은 오히려≪삼국사기≫ 50권보다 더 다양·치밀하며, 일연 자신이 직접 답사하여 목도하고 점검한 것도 상당수에 달해≪삼국유사≫는 실로 장기간에 걸친 용의주도한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라는 견해가 있다.0518) 金泰永,<三國遺事에 보이는 一然의 歷史認識에 대하여>(≪慶熙史學≫ 5, 1974 ;≪韓國의 歷史認識≫ 상, 創作과批評社, 1976, 128∼129쪽). 물론 현재로는 이 견해와 마찬가지로 별 의심없이 일연 단독의 찬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0519)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閔泳珪,<三國遺事解題>(앞의 책, 1969. 1).
李基白,<三國遺事의 史學史的 意義>(≪震檀學報≫ 36, 1973).
金相鉉,<三國遺事에 나타난 一然의 佛敎史觀>(≪韓國史硏究≫ 20, 1978).

 그러나≪삼국유사≫ 권 5에만 일연 찬술이라는 기록이 보일 뿐0520)≪三國遺事≫권 5의 첫머리에 ‘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冲照大禪師一然撰’이라는 기록만 보인다. 다른 기록은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흥사에서≪역대연표≫를 만든 사례는≪삼국유사≫를 일연의 단독찬술이라고 볼 수 없게 한다. 최소한 일연과 그의 문도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산물이≪삼국유사≫라는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일연이 선승으로서 몇 십년 동안≪삼국유사≫를 목표로 하여 자료를 수집·정리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일연은 수행승의 길을 걸어갔던 인물인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일연이≪삼국유사≫를 찬술한 그의 만년의 불교계 판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지산문이 당시 불교계의 중심교단이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일연은 인흥사에 머문 이후 당시 시대적 상황에 의해≪삼국유사≫를 목표로 하여, 물론 경상도지역이 중심이긴 했지만 가지산문의 판도를 이용하여 전국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그의 문도들과 공동으로 정리하여 찬술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한다.0521) 물론≪三國遺事≫에 一然이 직접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추측되는 예가 보이긴 하지만, 만년의 일연으로서 방대한 자료수집과 집필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문도들과 함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민하면서 불교계를 통괄하던 迦智山門의 기반을 충분히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삼국유사≫가 관찬이 아니면서도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내용의 충실성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일연을 정점으로 가지산문이 불교계의 중심교단으로 부각된 측면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0522) 가령 慧諶이 禪의 公案을 집대성한≪禪門拈頌≫의 경우도 수선사가 당시 불교계의 중심교단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삼국유사≫는 일연의 단독찬술로 보기보다는 일연을 중심으로 한 그의 문도들에 의한 공동작업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삼국유사≫를 일연 단독의 찬술이라기보다는 그의 문도와의 공동작업의 산물이라고 한다면≪삼국유사≫가 갖는 사학사적 의미는 종래의 견해와는 다른 방향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령 사학사적 의미와 관련하여 줄곧≪삼국유사≫에 나타나는 神異的 요소에 관한 이해라든가,0523) 신이적인 요소를 복고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한 견해(李基白, 앞의 글, 1973)와 이에 비해 불교의 영험을 강조함으로써 신앙심을 고무시키고 이를 통해 정신사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의도라고 한 견해(金相鉉, 앞의 글, 1978)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체제를 둘러싼 사서로서의 성격문제 등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삼국유사≫는 당시의 시대적 산물이자, 당시 불교계의 사상적 흐름과 역사인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전제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총체적으로 파악할 때≪삼국유사≫는 13세기 말의 민족적 모순이 극대화되었을 때 당시 불교계를 통괄하던 불교지식인들의 역사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삼국유사≫의 서술태도와 신이적 요소 등을 두고 복고적이라든가 전진적이라는 평가는 쉽게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고려 중기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관찬사서인≪삼국사기≫와 단순하게 비교하는 태도는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에서≪삼국유사≫의 찬술기반을 사상적 측면과 당시 불교계에서 가지산문이 크게 부각된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연의≪삼국유사≫는 좁게는 한국역사학의 고전적 저술이고, 넓게는 한국학분야의 잊혀질 수 없는 불멸의 금자탑이다. 비록≪삼국유사≫의 내용 중에는 현대인의 과학적 안목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예컨대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신이적 사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결함으로 오해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서술태도가 오히려≪삼국유사≫가 갖는 가장 큰 성과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사회상이 그러하며, 불교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기술된 민중의 신앙과 생활상에 관한 구체적이며 풍부한 신이적 기사 등이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삼국유사≫는 가치가 높은 民族誌의 성격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의만을 일방적으로 높이 평가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그 의의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비판적 안목과 일연과≪삼국유사≫를 둘러싼 객관적 상황에 대한 조명이 대전제로서 요구된다. 선승으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된 일연의 행적과 사상,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황을 추적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족사상의 격동기를 살아가면서 겪게 된 일연의 부침은 그가 소속된 가지산문의 향배와도 일치하며 나아가 불교계의 상황변동과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일연은 고려사회가 이민족의 간섭 아래 들어가게 되는 시점에 중앙정계의 실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화려하게 각광받고 불승으로서는 최고승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민족의 간섭이 가져온 민중의 고통과 참담한 사회상황은 일연으로 하여금 신앙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사상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그 결과 그가 귀착한 세계는 현세구원적 관음신앙의 표방과 민중의 삶을 역사서의 형태로 승화시킨≪삼국유사≫의 찬술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곧 시대상황이 빚어낸 역사가로서의 일연과 선승으로서의 일연의 합치점이었다.

<蔡尙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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