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4)≪제왕운기≫의 편찬
  • (2)≪제왕운기≫에 반영된 역사관

(2)≪제왕운기≫에 반영된 역사관

 ≪제왕운기≫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상고사·삼국사·고려사, 그리고 중국사 서술에 반영된 역사관의 성격을 살펴보겠다. 우선 서에 이어 지리기를 설정한 후 단군·한사군 및 삼한에 관한 서술을 중심으로 한 삼국사 이전의 상고사를 국사체계 속에 편입시켰다.≪제왕운기≫의 상고사 인식은 6년전에 저술된≪三國遺事≫의 그것과 비교할 때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해진다.≪삼국유사≫는 단군조선에 관한 사실을 불교적 입장에서 재구성해 놓은 데 반해,≪제왕운기≫는 민간신앙적 입장에서 전래되어 온 단군신화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고 그 개국연대도≪삼국유사≫와는 달리 중국과 대등하게 인식하고 있다.

 또한 한사군 및 삼한의 여러 나라에 관한 서술에서도 두 사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삼국유사≫는 馬韓·二府·七十二國·樂浪郡·北帶方·南帶方·靺鞨·渤海·伊西國·五伽倻·北扶餘·高句麗·卞韓·百濟·辰韓에 이르는 사이에 흥망했던 나라들을 그의 변동과 역사적 관련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잡다하게 열거하고 있다.0538) 河炫綱,<高麗時代의 歷史繼承意識>(≪韓國의 歷史認識≫상, 創作과 批評社, 1976), 208쪽. 그러므로 단군의 후예들이 세운 소국들과 중국세력에 의해 설치된 郡國들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있으며 삼한의 민족도 단군족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0539) 韓永愚,≪朝鮮前期史學史硏究≫(서울大 出版部, 1981), 27쪽. 그에 반해≪제왕운기≫에서는 한사군을 중국인이 지배한 시기로 이해하고, 그것의 설치로 인해 단군족이 입은 해독을 강조하고 있어 민족 중심의 역사의식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두 사서의 상고사 인식의 차이는 참고한 자료가 다르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즉≪삼국유사≫는 古記類도 참조하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後漢書≫·≪唐書≫·≪魏書≫와 같은 중국측의 기록을 더 많이 참조하고 있다. 그런데≪제왕운기≫는 단군이나 삼한에 관한 내용은 거의 전적으로<檀君本紀>·<東明本紀>등의 고기류에 의존하고 있다.

 단군과 기자에 관한 역사서는 고려 중기까지 전해오고 있었고 그에 관한 숭배도 민간신앙으로서 고려 후기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도≪三國史記≫에 단군과 기자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은 金富軾이 서경파 중심의 풍수지리를 신봉하던 세력이 일으킨 妙淸의 亂을 응징하려는 의도에서≪삼국사기≫를 저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0540) 金哲埈,<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韓國의 歷史認識≫ 상, 創作과 批評社, 1976), 107쪽. 즉 당시까지 전해오던 단군이나 기자에 관한 기록도 서경 및 고구려 그리고 민간신앙적 입장이라고 해석하여 취사선택 과정에서 빠뜨린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0541) 朴光用,<箕子朝鮮에 대한 認識의 변천>(≪韓國史論≫ 6, 서울大 國史學科, 1980), 254쪽.
한편 金哲埈,<蒙古壓制下의 高麗史學의 動向>(≪考古美術≫ 129·130, 1976), 8∼12쪽에서는≪帝王韻紀≫도 ‘去浮辭 取正理’ 한다는 원칙하에 생명력있는 전통문화를 외면한 사대적인 사서로 보고 있는데, 이 견해는≪帝王韻紀≫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은 피상적인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제왕운기≫의 삼국사에 관한 주된 내용은 삼국 각국의 창업시조의 신이한 탄생설화와 멸망의 원인에 대한 것들이다. 그 비중은 고구려에 관한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삼국사기≫의 내용과 비교한 결과 몇 가지 특징이 엿보인다. 첫째,≪삼국사기≫에서는 삼국의 시조를 중국계와 연결시키고 있는데0542)≪三國史記≫ 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말미. 대하여,≪제왕운기≫에서는 天孫으로 이해하였고 삼국은 단군족으로 구성된 삼한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어 삼국의 시조도 결국 단군족의 후손임을 암시하고 있다.0543) 李承休의≪帝王韻紀≫ 권 하에서, 신라는 辰韓을, 고구려는 馬韓을, 백제는 弁韓을 계승하였다고 보았다.

 둘째, 삼국 각국의 멸망 원인에 대해≪삼국사기≫에서는 중국에 대한 사대외교를 수행하지 않았다던가, 혹은 중국의 예법을 준수하지 않았던 점을 들고 있다.0544)≪三國史記≫에서는 고구려멸망의 원인으로 내부의 학정, 지세의 불리, 隋와 唐에 대한 불손한 태도를 들고 있다. 백제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도 의자왕의 학정 이외에 蘇定方軍의 협공을 들고 있다. 그러나≪제왕운기≫에서는 오히려 외세의 간섭을 국가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삼국사기≫에서는 다루지 않은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인정하고 그 후손이 고려에 귀순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 점이다.

 고려시대에 관한 서술은 고려왕실의 세계설화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내용은 金寬毅의≪編年通錄≫이나 洪灌의≪世紀≫와≪本紀≫와 같은 비유교적인 사서들을 주로 참조하여 작성하였다.0545) 金寬毅와 洪灌이 지은 사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劉璟娥, 앞의 글, 564쪽 참조. 그런데 후에 李齊賢은 김관의의≪편년통록≫의 내용 중 國姓도 道詵의 말을 듣고 王氏로 고쳤다는 점과, 懿祖의 妃가 龍女라는 설 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0546) 李齊賢,≪櫟翁稗說≫ 전집. 이러한 이제현의 비판은 유교적 윤리관이나 도덕적 지식에 의해 설화나 전설적인 것을 배격하고 합리적 해석을 내리려고 했던 의식의 소산으로 보인다.0547) 鄭求福,<李齊賢의 歷史意識>(≪震檀學報≫ 51, 1981), 248쪽. 그와는 달리 이승휴는 민간에 전래되어 온 신화나 고려왕실의 세계설화를 그대로 채용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음에는 태조에서 충렬왕대까지의 守成君의 계보를 밝히고 각 왕대마다의 배향공신을 들어 노래하고 있다. 반면에 金致陽·康兆·李資謙·鄭仲夫·李義旼·崔忠獻 그리고 林衍 등에 대해서는 폄론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왕을 위협하여 자의로 폐위시킨 자들이며, 정중부·이의민·최충헌·임연 등의 비판을 통해 특히 무신정권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제왕운기≫의 한국사 인식의 사학사적 의의는, 첫째 한국사의 출발점을 단군으로부터 잡고 삼국의 시조까지도 단군족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경순왕이 태조에 귀순한 연대를 新羅紀 말미에 ‘檀君으로부터 지금까지 3218년’이라고 하여 단군조선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역사를 단군기원이라는 기준에 서서 계통적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역사의 시작을 삼국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고 삼국의 시조를 중국계와 연결시킨≪삼국사기≫에 비해 한국사 인식의 시야가 확대된 것이며, 자주적 역사의식이 강조된 것이다.

 고려 후기 사학사상에 나타난 민족사에 대한 자긍의식과 독자성에 대한 인식은 李奎報가 동명왕설화를 시로 지어 고구려 시조 1인을 하늘에 연결시킨<東明王篇>에서 비롯되었다.0548) 卓奉心,<東明王篇에 나타난 李奎報의 歷史意識>(≪韓國史硏究≫ 44, 1984), 91∼92쪽. 그 후 一然은≪삼국유사≫에서 삼국 시조 전체의 신이한 탄생설화까지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더욱 확대하였다.0549)≪三國遺事≫ 권 1, 紀異 2, 叙. 그리고 이승휴는 고려의 창업까지도 천명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단군에서 충렬왕대에 이르는 대민족서사시를 제작하여 한층 심화시켰던 것이다.

 둘째≪삼국사기≫에는 제외되어 있고≪삼국유사≫에서는 말갈족의 국가로 이해하고 있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보고 그 후손들이 고려에 흡수·통합되었음을 서술한 것은 고구려의 활동무대였고 발해의 옛 영토였던 만주 일대가 우리의 영역이었다는 관점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하여 동명왕의 개국지를 西京으로 고증하고 있는 점,0550) 李承休,≪帝王韻紀≫ 권 상,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라고 하였는데 물론 그것은 역사적 사실로는 잘못된 고증이다. 자신이 비록 문신이었으나 묘청의 난을 폄하하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 점 등은 개국 초 이래 서경을 중시하는 북진주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다음에는≪제왕운기≫ 상권의 중국사 내용을 분석하면 이승휴의 중국문화에 대한 인식과 대외관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먼저 정통론을 중국사에 직접 적용하고 음양오행설에 입각하여 왕조변천의 원리를 해석하였다. 그것은 一亂의 시대가 지나고 一治의 시대가 반드시 오리라는 현실극복의 의지를 유교사관이 아니라 민중의 의식을 대변하는 오행적 역사관에서 찾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다.0551) 음양오행설은 풍수지리도참사상과 함께 고려 일대를 통해 지방사회의 전통적 생리를 갖고 일반민중의 의식을 대변하는 사유형태로서 보수적 유교정치이념에 반발하고 있었다고 한다(崔柄憲,<高麗時代의 五行的 歷史觀>,≪韓國學報≫ 13, 1978, 一志社, 23∼23쪽). 그는 또≪춘추≫를 역사서술의 모범으로 삼았으므로 중국사 서술에 있어서는 칭원법도≪춘추≫의 예에 따라 踚年稱元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한국사 서술에 있어서는 卽位年稱元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한 점은 중국의 전통사학을 존중하면서도 무조건 수용하지 않고 우리의 역사사실을 그대로 직서한 것으로,≪삼국사기≫의 서술방식을 계승하여 한국전통사학의 방법론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0552) 金富軾의 그러한 편사의식은 당시 사대환경이나 유교적 가치관의 획일적 의식 속에서도 자아발견을 위한 노력으로 지적된 바 있다(申瀅植,≪三國史記硏究≫, 一潮閣, 1981, 375쪽).

 그가 중국사에 첨가한 사론들을 보면 우선 선조의 聖·賢·享·忠·義·積善·四知淸德·儉德에 의해 건국되고 그 후손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충렬왕의 실정과 권세가들의 횡포를 목격하고 군신이 아울러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유교적 정치이념을 채용하는데 있어서도 고려 당시의 정치사회상황에 비추어 사회질서와 윤리의 확립에 적합한 것을 선택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한편 그의 대외관을 살펴보면 원나라 이전에는 송나라만을 중화의 문화국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 거란에 대해서는 북진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금나라의 여진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문화의식의 토대 위에 일시적으로 굴복하는 현실적인 태도를 취한 고려 전기 문신들의 입장을0553) 이와 같은 고려 전기 문신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金哲埈,<益齋 李齊賢의 史學>(≪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435쪽 참조.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원에 대해서만은 ‘개벽 이래 비유할 바 없는 나라’로 칭송하는가 하면, 원 간섭하의 충렬왕대를 ‘百代에 듣기 어렵고 萬代에 보지 못함이 일시에 뭉쳐 있다’고 하면서 밝은 시절 만나 스스로 기쁘다고 미화하고 있다.0554) 李承休,≪帝王韻紀≫, 進呈引表. 바로 이와 같은 對元觀이 그의 역사관 전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즉 사대적인 태도라고 보거나 현실타협적인 역사관이라는 견해가0555) 李佑成,<高麗中期의 民族敍事詩>(≪韓國의 歷史認識≫상, 創作과 批評社, 1976), 187쪽.
邊東明,<李承休의≪帝王韻紀≫ 撰述과 그 史書로서의 性格>(≪震檀學報≫ 70, 1990).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元使行을 통해 양국의 세력관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던 그로서는 고려국의 존속 근거를 원만한 대원관계를 유지하는 데서 찾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고려와 원의 정치적 관계만을 능동적으로 강조하게 된 것이다. 원이 무신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던 원종의 왕위를 복위시켜 준 사실과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됨으로써 양국관계가 긴밀해진 사실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0556) 李承休,≪帝王韻紀≫ 권 하, 本朝君王世系年代. 그러나 我君同德이라 하여0557) 李承休,≪帝王韻紀≫ 권 상, 幷序. 고려와 원을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는 동등하게 인식하고 있고, 특히 삼국멸망의 원인에 대해 외세의 간섭을 들고 있는 것은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 볼 때 원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경순왕이 귀순하여 두 왕을 섬기게 되었다고 비난한 것은 고려국의 입장에서 끝까지 몽고에 저항할 것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삼국사기≫가 고구려·백제의 멸망 원인을 드는데 중국측의 입장에 서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이승휴의 역사관을 사대적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오히려 당시 정세로 보아 元帝國에 대한 불가능한 비판을 역사 속에서 비유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경계를 삼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문화에 대한 자국문화의 독자성과 그 계승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것은 대원관계에 있어서의 정치·군사적 열세를 중국과 구별하는 독자적 역사전통을 가진 민족임을 강조하는 문화의식으로 만회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충렬왕 중엽 이후부터는 附元勢力이 원의 침략정책에 편승하여 사회와 민중을 유린하기에 광분하였고 이해관계에 따라 파벌을 지어 국왕을 폐위하려는 암투마저 벌이고 있었다. 또한 원은 고려를 그들의 한 직할성으로 편입시키려고 하므로 고려국의 존속자체가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은 원 간섭 초기에 이승휴가 제시한 문화적 저항의식만으로 몽고의 간섭을 배제하고 국내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현실인식과 새로운 지배질서 모색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내세운 개혁론은 더욱 왕권중심, 국가위주의 방향을 취했던 것이다.0558) 金泰永,<高麗後期 士類層의 現實認識>(≪創作과 批評≫ 12-2, 1977), 347쪽. 바로 그 점은 이승휴가 성리학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질서를 회복코자 했던 의지와도 통하는 것이다.

 또한 민족의 역사전통에 대한 심화된 인식도 성리학적 소양을 가진 이들 사대부층에 전승되어 단군기원의 역사의식으로 발전되었으며0559) 李 穡,≪牧隱詩藁≫권 17, 君子라는 시에서, “戊辰年에 단군이 統緖를 드리운 지가 오래되었다”고 하였고, 또≪高麗史≫권 112, 白文寶傳에도 “…단군에서 지금까지 3600년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공민왕대 요동수복의 역사적 당위성도 그 곳이 단군 이래 우리의 강토였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0560)≪高麗史≫권 114, 列傳 27, 池龍壽. 그 후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곧 이 국조숭상에 대한 여론이 일어났으며 세종대에는 단군을 국조로서 제사하게 되었고0561) 金泰永,<朝鮮初期 祀典의 成立에 對하여>(≪歷史學報≫ 58, 1973), 105∼134쪽. 이른바 정사에도 國祖로 기록하기에 이르렀다.0562)≪世宗實錄地理志≫, 平安道 平壤府(≪世宗實錄≫권 154).
徐居正,≪東國通鑑≫, 外紀.
그리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시작을 단군조선으로 잡게 되었고 5천년 민족의 유구한 역사전통에 대한 긍지를 지니게 되었다.

 이승휴의 역사관은 궁극적으로 사대적인 것 혹은 자주적인 것으로 양분하여 평가될 수 없다. 즉≪제왕운기≫의 서술목적이 대내적으로 왕권강화를 통해 국가질서를 회복하려는 데 있었으므로 실정한 군주, 왕권에 도전한 신하, 그리고 외세의 간섭을 국가멸망의 징후로 강조하여 역사의 교훈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군·신이 갖추어야 할 유교적 정치이념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삼국사기≫에 나타난 유교적 가치관에 의한 포폄 위주의 역사관을 계승한 것으로 유교사관적 성격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란이나 여진보다 더욱 강포한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면서,≪삼국사기≫에 반영된 지배층 중심의 유교사관에 입각한 역사서술로는 현실극복을 위한 범국민적인 정신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삼국유사≫에 반영된 전통적 역사관을 계승하여, 민간신앙이나 고기류를 통해 전승되어 온 단군신화와 삼국시조의 신이한 탄생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재인식한 새로운 방향의 국사를 서술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민족과 국가의 입장에서 조화를 이룬 유교사관과 전통적 역사관은 조선시대에 민족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바탕이 되었다.

<劉璟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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