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6) 이제현의≪국사≫
  • (2) 이제현의 생애와 기타 사서

(2) 이제현의 생애와 기타 사서

 益齋 李齊賢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나아가 당대의 최고 역사가로서도 활약한 바가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많은 편이다.0604) 이제현의 생애와 활동 및 사상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金庠基,<李益齋의 在元生涯에 대하여>(≪大東文化硏究≫ 1,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63).
金哲埈,<益齋 李齊賢의 史學에 對하여>(≪東方學志≫8, 延世大, 1967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428∼482쪽).
金泰永, 앞의 글.
鄭求福, 앞의 책, 163∼225쪽.
鄭玉子,<麗末 朱子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震檀學報≫51, 1981).
閔賢九,<益齋 李齊賢의 政治活動>(≪震檀學報≫51, 1981).
卓奉心, 앞의 글, 327∼375쪽.

 이제현은 검교정승 李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5세인 충렬왕 27년(1301)에 成均試를 거쳐 과거에 합격했고, 22세에 藝文春秋館을 시작으로 71세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하기까지 50여 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다가 공민왕 16년(1367)에 81세로 사망하였다. 특히 그는 28세 때인 충숙왕 원년(1314)에 원의 수도 燕京으로 가서 충선왕을 시종하여 萬卷堂에 머물면서 원의 유명한 문인들과 교유하여 학문과 식견을 더욱 넓혔다. 그리고 원나라에 머물던 10여 년 동안 중국의 각지를 여행하고 많은 견문을 쌓기도 했다.

 그가 34세 때인 충선왕 7년에는 知密直司事가 되었고, 이 해에 귀국하여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했다. 충선왕이 토번으로 귀양가 4년이나 풀려나지 못했을 때 이제현은 원의 승상이던 拜住에게 글을 올려 충선왕의 방면과 환국을 탄원하기도 했고, 직접 유배지로 찾아가 왕을 위로하기도 했다. 또한 입성책동이 일어나자, 이제현은 원에 글을 올려 입성책동의 부당성을 강조하여 그것을 저지시키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그는 39세에 정당문학이 되었지만, 40대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 58세 때인 충목왕 즉위년(1344)에는 判三司事가 되어 개혁정치에 참여했고, 충정왕대를 거쳐, 공민왕이 즉위한 뒤에는 7년 동안에 4번이나 정승의 직에 올라 국정에 참여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71세 이후에도 중대한 국사에는 자문에 응하였다.

 이처럼 이제현은 충렬왕부터 공민왕에 이르는 7대에 걸쳐 관직에 있었다. 이 시기는 원의 간섭이 계속되었고, 국내에서는 입성책동 등 자체의 분열과 정치적 갈등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던 공민왕대에 수상으로 있었던 점은 주목되기도 한다.

 그는 국내의 정치·경제적 개혁을 통해서 국가질서를 회복하려고 했었다. 따라서≪국사≫,≪증보편년강목≫, 충렬·충선·충숙왕의 삼조실록,≪역옹패설≫,<김공행군기>,<충헌왕세가>등 이제현에 의해 편찬된 여러 사서에 그의 현실인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역옹패설≫은 이제현이 충혜왕 후3년(1342) 曺頔잔당의 횡포로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시기에 편찬한 책으로 전·후집 각각 2권씩으로 되어 있다. 전집 2권은 주로 40여 항목에 걸쳐 당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였으며, 후집 2권은 시에 대한 자신의 평론을 싣고 있다.

 <김공행군기>는 고종 3년(1216)부터 5년 동안 고려에 쳐들어온 거란의 金山·金始 왕자의 무리를 격퇴시킨 金就礪장군의 전투기록이다. 편찬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에 붙인 사론이≪역옹패설≫에 실린 점으로 보아 그의 나이 55세(충혜왕 후3년) 이전에 쓰여졌을 것이다. 행군기 사론의 요지는 이 전투에서 고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400년간의 전통을 지닌 고려 역대 왕들의 신령이 음으로 도와주었으며, 당시 최씨무신정권 아래 강한 군사는 중앙에 있고 변방의 군사는 연약했는데도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김취려의 능력과 품성이 장군으로서 뛰어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충헌왕세가>는 태조부터 충선왕까지 역사를 다룬 세가라 할 수 있는데, 그 편찬시기는 충숙왕 12년(1325) 이후 충혜왕 5년 사이로 추정된다.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역사를 閔漬와 權溥가 쓴≪世代編年≫에서 발췌하여 썼으며, 나머지 충헌왕, 즉 고종부터 충선왕까지의 기술은 이제현이 직접 서술하였다. 책명을<충헌왕세가>라 하였지만 고종에 대한 기록보다는 충선왕에 대한 기록이 더 자세하다. 저술동기에 대하여는 원에 충선왕의 시호를 청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입장과 원에서 고려의 왕조사를 물을 때 답하기 위하여 저술된 것으로 보는 입장으로 대별되고 있다.0605) 鄭求福, 앞의 책, 189∼190쪽.

 이외에도 이제현은≪金鏡錄≫을 지었다고 한다. 조선조 순조 14년(1814) 金魯應이 쓴<益齋先生年譜>에는 이제현이 공민왕 6년(1357)에≪금경록≫을 지었다고 했고, 李睟光의≪芝峰類說≫에도 이제현 등이 지은≪해동금경록≫ 1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서가 정말 이제현의 저술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0606) 今西龍은 “李仁復·李穡 등의≪金鏡錄≫을 잘못 말한 것”이라고 보았고(<王氏高麗朝に於ける修史に就いて>,≪高麗及朝鮮史硏究≫, 國書刊行會, 1974), 邊太燮은 “李睟光이 본≪海東金鏡錄≫이 정말 李齊賢의 것인지, 아니면 그의≪史略≫인지, 아니면 李仁復·李穡의≪금경록≫을 잘못 말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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