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7) 기타 역사서의 편찬
  • (2) 기타의 역사서

(2) 기타의 역사서

 고려 후기에는 현존하는 것 이외에도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충렬왕 때 鄭可臣은≪千秋金鏡錄≫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虎景大王으로부터 원종까지를 서술한 고려 당대사였다. 충렬왕 16년(1290) 세자가 원에 갈 때 그는 민지와 함께 왕을 수행했는데, 원의 세조가 고려의 풍속과 세대의 서로 전함과 理亂의 사적을 물었을 때 이에 답했고, 4년 후 원의 成宗이 한림학사 撒刺蠻을 시켜 고려가 귀부한 시기를 물을 때 답한 것이라던가,0624)≪高麗史≫ 권 105, 列傳 18, 鄭可臣. 평소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雪齋라고 편액하고 賢士大夫와 함께 매일 고금의 일을 논의했다고 한 것에서 정가신은 고려역사에 상당히 밝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이≪천추금경록≫은 왕명에 따라 민지와 권부(또는 보)에 의해 증수되어≪世代編年節要≫ 7권으로 개편되었다.0625)≪高麗史≫ 권 107, 列傳 20, 閔漬. 이≪세대편년절요≫와≪천추금경록≫은 충선왕 즉위년(1308) 12월에 하정사 趙璉를 통해 원에 전해졌다.0626)≪高麗史≫ 권 33, 世家 33, 충선왕 즉위년 12월 무오.

 공민왕 20년(1371)에 왕은 이인복과 이색 등에게 명하여≪本朝金鏡錄≫을 증수토록 했는데,0627)≪高麗史≫ 권 43, 世家 43, 공민왕 20년 5월 계유. 아마도 이 책은≪천추금경록≫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增修本朝金鏡錄≫은 靖宗代까지를 서술한 것으로 그 내용이 소략하다는 지적을 받았다.0628) 鄭 摠,<高麗國史序>(≪東文選≫ 권 92, 序).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훗날 정도전·정총 등이≪高麗國史≫를 편찬할 때 많은 참고가 되었다.0629)≪世宗實錄≫ 권 22, 세종 5년 12월.

 충렬왕 10년 6월 감수국사 元傅, 수국사 許珙·韓康 등이≪古今錄≫의 편찬을 시작해서 5개월 만인 10월에 완성했다.0630)≪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10년 6월 병자. 2년 후 다시 충렬왕은 直史館 吳良遇 등에게 명해≪國史≫를 편찬케 하였는데, 이는 원에 바치기 위한 사서였다.0631)≪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12년 11월 정축. 그러나 이 사서가 언제 완성되었는지, 또 원나라에 보냈는지는 기록이 없다. 한편 공민왕 6년(1357) 왕은 이인복에 명하여≪고금록≫을 편찬시켰다.0632)≪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6년 윤9월 을사. 그런데 이인복은 이미 충렬·충선·충숙왕의≪삼조실록≫ 및≪증수본조금경록≫의 편찬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 밖에도 충렬왕 19년에 고려에 왔던 원의 사신 王約이 돌아가≪高麗志≫ 4권을 저술했다고도 한다.

 金寬毅가 의종 때≪王代宗錄≫을 편찬한 이후에도 왕실세보류의 사서가 몇 차례 더 편찬되었다. 고종 때에 활약한 任景肅은≪瓊源錄≫을 지었는데, 종실의 세보를 기록하면서 宗女와 宗子를 함께 열기하였다.0633) 李齊賢,≪益齋亂藁≫ 권 9 하, 史贊 宗室傳序. 충렬왕 21년경 동수국사였던 任翊은 교지를 받아서≪선원록≫을 편찬하였다.0634)≪高麗史≫권 95, 列傳 8, 任懿 附 翊. 이외에도 왕실세보류의 사서로는≪王代宗族記≫·≪聖源錄≫ 등이 있었는데, 그 저자 및 찬술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이≪왕대종족기≫ 및≪성원록≫에는 김관의의≪왕대종록≫의 기록과는 다른 내용이 있었고, 이제현은 이 두 책을 인용하면서 김관의의 설을 비판하기도 했다.0635) 李齊賢,≪櫟翁稗說≫전집 1. 또한 불교사와 관련된 사서도 몇 종 간행되었다. 李藏用은≪禪家宗派圖≫를, 一然은≪祖派圖≫ 2권을 각각 저술했는데, 아마도 이 두 책은 선종의 계보를 도표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장용은 經史·陰陽·醫藥·律曆 등에 두루 통했고, 특히 그는 불교를 독실하게 신앙하여≪華嚴錐洞記≫를 윤색하기도 했다.0636)≪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藏用. 이색은 이≪조파도≫를 보고, “우리 동방의 韻釋으로 중국에 들어가 법을 이어받은 이가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傳燈錄≫을 읽고≪조파도≫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0637) 李 穡,≪牧隱文藁≫권 8, 序 送絶上人序.

 眞靜國師 天因은 원종 9년경에≪海東法華傳弘錄≫ 4권을 편찬했다. 이 책은 그 책명과 현전하는 일부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 이래 고려 원종까지의 법화신앙에 대한 영험담을 수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 수록되었던 8항목이≪法華靈驗傳≫에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다. 천태종의 천인은 법화신앙을 홍포하기 위해서 우리 나라에 법화신앙이 퍼지게 된 역사와 靈異한 신앙을 강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숙왕 15년(1328) 雲黙無寄에 의해 지어진 장편 서사시≪釋迦如來行蹟頌≫ 2권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천태종 백련사계의 운묵은 새로 입문한 승려들이 석가의 행적과 교설의 내용을 쉽게 알아서 참다운 불자가 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의도에서 이 행적송을 지었다. 이 서사시는 5언 776구 3,880언 상하 2권으로 된 장편으로 단락 곳곳에 장문의 주를 덧붙였다. 상권에서는 석가 일대의 사적을, 그리고 하권에서는 불교가 동점하는 역사적 사실을 읊었다. 운묵은 당시 불교계 현실에 대해서 강한 위기의식을 갖고 당시 불교와 불자들의 병리적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권세에 영합하여 부귀를 탐하는 승려들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어떤 비구는 불교가 금하는 법을 어기고, 오랫동안 이식하여 재산을 많이 가지게 되었으며, 혹은 왕공·대신 등 세도에 붙어 스스로 부강을 믿고 남의 빈약을 능멸하고, 음란을 탐하고 술을 즐기며, 혹은 외서를 찬양하고, 속인들과 벗하여 서로 창화하거나 혹은 잡회·바둑·장기·금슬·퉁소·피리 등 여러 좋지 않은 법을 즐긴다. 이처럼 뜻에 맡겨 저지르지 않는 악이 없다. 아아, 이들이 어찌 선악의 업보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겠는가. 利養心이 강한 탓에 임의로 하는 것이다(雲黙,<天台末學雲黙和尙警策>,≪釋迦如來行蹟頌≫ 권 하 ;≪韓國佛敎全書≫ 6, 541쪽).

 운묵은 당시 불교계의 잘못된 현실을 직시하면서 “급하고 급하다. 위태롭고 위태롭다”고 강조했다. 이에 그는 불제자라면 불법의 흥망성쇠를 마땅히 알아야 하며 또한 그것은 거울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서사시를 썼던 것이다. 이 시는 당시 불교에 대한 현실인식이 잘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 후기에는 20여 종의 사서가 편찬되었다. 이 중에는 詠史詩도 있고, 불교사서도 있다. 또한 기존 사서에 대한 증보, 혹은 개찬도 있었고, 원의 사서 進貢에 대한 요구에 응해서 편찬된 것도 있다.

<金相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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