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5. 미술
  • 3) 서화
  • (1) 회화

가. 일반회화

 고려 후기의 일반회화는 元의 간섭을 받기 시작하는 원종 원년(1260)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과 이후의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0669) 洪善杓,<고려시대의 일반회화>(≪韓國美術史≫, 藝術院, 1984), 281∼287쪽. 무신들이 집권했던 명종대(1171∼1197)에서 고종대(1214∼1259)까지의 약 1세기간의 일반회화는 문종연간부터 급성장한 기반 위에서 왕실과 새로운 지식계층으로 대두된 문사들, 그리고 이 시기에 다시 부상된 禪宗승려들을 중심으로 보다 심화되었다. 특히 문사들은 앞선 시기 문신들의 고대적 귀족성과 문벌성이 약화되고 문인학자적 기능이 강화된 중세적 관료지식인으로 등장하여, 그림을 시문과 함께 자신들 상호간의 감흥교환과 심성도야 등의 내적 자원을 확충하는 매체로 즐겨 활용했었기 때문에 이를 그리고 수집하고 완상하는 풍조를 크게 진작시켰다.

 이러한 풍조는 이들 신진문사들이 중세적 지성의 이상적 모델로 적극 추구했던 北宋代 사대부들의 문인화사상과 이념의 본격적인 수용을 통해 더욱 촉진되었다. 그 중에서도 蘇軾에 대한 숭배는 崇蘇熱을 이룰 정도로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강조되었던 ‘詩畵一律論’과 ‘神似論’을 비롯하여 ‘胸中成竹論’과 ‘身興竹化論’, ‘心手相應論’과 같은 문인화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림을 소재로 하는 題畵詩文類도 소식에 의해 크게 성행되면서 學蘇풍조에 따라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회화이론이 지식계층 사이에서 널리 활용되었다.0670) 洪善杓,<高麗時代의 繪畵理論>(≪考古美術≫187, 1990), 7쪽.

 무신집권기를 통한 회화이론의 전개는 李仁老에 의한 詩畵一律論의 본격적인 파급을 비롯하여 林椿·丁鴻進·陳澕·崔滋(1188∼1260) 등도 일정한 기여를 했지만, 보다 투철한 의식과 이론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표명했던 인물은 李奎報였다. 무신집권기의 대표적인 문사로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규보는 그림을 보고 평가하는 안목이 매우 높아서, 본인 스스로 “작품을 보는 눈이 망령되이 높다”고 했다. 또 “늙은 장사꾼이 물건을 알아보는 것 같고”, “품평은 나만한 이가 없다”고까지 호언했을 정도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식견과 소식을 중심으로 강조되었던 북송대 문인화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고려시대 회화이론의 전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그의 이와 같은 회화에 관한 이론적 견해는 우리 나라 그림이 감상화로서의 성격과 기반을 다지며 정착하는 데 계도적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겉만 꾸민 ‘紛紛한 俗畵’를 숭상하던 종래의 회화풍토를 비판하고 중세적 회화가 수행해야 할 실천적 지침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0671) 洪善杓,<李奎報의 繪畵觀>(≪美術資料≫ 39, 國立中央博物館, 1987), 28∼45쪽.

 무신집권기에는 이와 같이 북송대의 회화이론과 文人畵觀의 확산으로 이와 관련된 화풍이 크게 풍미하게 된다. 대나무·소나무·전나무 등 문인취향 화목의 유행이 눈에 띄고 또 鄭得恭·安置民·李仁老·金君綏 등 문인화가들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낭중과 홍문관학사, 비서감 등을 지낸 정홍진의 경우 더욱 현저하여, 그의 墨竹畵는 고려뿐 아니라 중국에서까지 명성이 자자했으며, 북송 최고의 묵죽화가인 文同을 능가한다고 평가되었을 정도로 높은 경지를 이룩했었다.0672) 李奎報,≪東國李相國集≫ 후집 권 5, 古律詩 次韻丁秘監而安和前所寄詩以墨竹影子親訪見贈幷序.

 이 당시의 묵죽화 역시 전하는 유작이 없어 그 구체적인 양태를 파악하긴 어렵다. 다만 이들 문사들이 사물의 겉모습 보다는 生成化育하는 자연적 창생력을 갖추고 있는 참모습을 그릴 것을 중시한 점이라든가 북송의 소식과 문동, 또 이들을 추종한 남송의 湖州竹派 문인화가들의 화풍을 참고로 삼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상물의 기운생동하는 생명력의 유출을 강조한 그러한 그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시대가 다소 내려가지만 14세기경 제작된 日本 西福寺 소장의<觀經序品 變相圖> 속의 전각 안에 그려져 있는 병풍의 묵죽과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의 화가로 추정되는 海涯가 그린<歲寒三友圖> 등을 통해 그 편영을 엿볼 수 있다(<도판 1>). 이들 그림에 표현된 묵죽의 경우, 규칙적인 竹葉의 배합이라든가 서예성의 가미, 가는 줄기의 모습 등에서 조선 초기 묵죽화풍과 관련된 특색이 발견된다.

확대보기
<도판 1>歲寒三友圖
<도판 1>歲寒三友圖
팝업창 닫기

 한편 명종이 문신들에게 명하여 瀟湘八景의 시를 짓게 하고 李寧의 아들인 李光弼에게 그 시의 내용에 따라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당시 팽배해 있던 詩畵一律思想의 조류를 반영해 준다. 이광필이 그렸던<소상팔경도>의 화풍은 아마도 宋迪을 중심으로 북송 말에 성행된 潑墨山水風의 소상팔경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송적이 활동했던 당시 이녕이 북송에 다녀온 바 있었고 또 그가 가르쳤다고 전하는 王可訓이 송적의 영향을 받은 소상팔경을 그린 바 있었고 또 이러한 그의 화적이 고려에 전개되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와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소상팔경도는 무신집권기 무렵부터 대두하기 시작하여 ‘江南景’ 理想山水의 대표적 화제로서 17세기까지 성행했을 뿐 아니라,<松都八景圖>를 비롯한 八景圖類 실경산수의 전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0673) 우리 나라 소상팔경도의 흐름에 대해서는 安輝濬,<韓國의 瀟湘八景圖>(≪韓國繪畵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 162∼248쪽 참조.

 무신집권기의 회화는 승려화가들의 활동과 더불어 문인적 교양을 겸비하고 있던 선승과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문사들이 서로 어울려 그림을 완상하고 휘호하며 교유하던 풍조를 통해서도 활기를 더해 갔다. 韓生이 인물을 그리고 정홍진이 대나무를 그린<水墨白衣觀音圖>를 소장하고 있던 禪師인 幻長老가 이규보에게 찬문을 구했던 사실은 이러한 풍조를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0674) 李奎報,≪東國李相國集≫ 후집 권 11, 贊 幻長老以墨畵觀音像求予贊. 이 관음도는 水墨禪宗畵 계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나무가 배경에 그려져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13세기 남송의 牧谿가 그렸다고 전하는 일본 圓覺寺 소장의<白衣觀音圖>와 유사한 형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백의관음도를 특징짓고 있는 절벽으로 채워진 배경이라든가 흑백대비가 심하고 거친 묵법, 바위에 기댄 인물의 포즈 등은 조선 초기 姜希顔의<高士觀水圖>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0675) 洪善杓,<仁齋 姜希顔의 高士觀水圖硏究>(≪정신문화연구≫ 22, 1985), 99∼103쪽.

 이와 같이 무신집권기를 통해 일반회화는 새로운 문화담당층으로 대두된 문사들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교양과 교제수단의 하나로 여겨지는 등 그 기반을 보다 공고히 구축하였다. 또 이들을 통하여 소식을 중심으로 전개된 북송대의 문인화론과 문인적 취향의 화목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소상팔경도와 같은 수묵풍 이상산수의 대두와 승려화가들의 활동 및 수묵선종화의 성행도 눈에 띈다.

 일반회화는 원나라 간섭기인 원종대(1260∼1294)부터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학자적 관료로 크게 성장한 신흥사대부들의 성향과 밀착되어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념으로 새롭게 수용된 性理學은 그림에 대한 지식인들의 가치관과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 회화발달의 배경도 이러한 사대부들의 회화관에 기초하였다고 하겠다.0676) 洪善杓,<朝鮮初期의 繪畵觀>(≪第3回 國際學術會議發表論文集≫,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5), 598∼601쪽.

 이 시기를 통해서는 李承休(1224∼1301), 安軸(12282∼1348), 李齊賢(1287∼1367), 李穀(1298∼1351), 李穡(1328∼1396), 李詹(1345∼1405) 등의 신흥사대부들이 그림에 대한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이들 중 이승휴는 그림을 六藝의 하나로 보았는데, 이는 곧 고려 후기를 통해 지식인들의 갖추어야 할 필수교양으로 부각되었던 회화가 당시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착되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회화에 대해 높은 식견을 지니고 있었던 이색은 산수화에 관한 상당수의 題畵詩文을 통해 처사적 성향을 짙게 띠고 있던 신흥사대부들의 친자연적 경향을 강조했었다. 그는 또한 그림에서 기상과 함께 의장을 중시했으며, ‘繪事後素’에 대한 논의에서는 “素는 바탕의 문채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능히 5가지 채색을 잘 받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성품에 비유하면 가라앉아 움직이지 않고 순수전일하여 잡것이 없고 五常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인격의 완성을 우선 중시하는 관점에서 朱子에 의해 주석된 성리학적 儒家思想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0677) 洪善杓, 앞의 글(1990), 7∼8쪽.

 이와 같은 이론적 기반 위에서 전개된 고려 말기의 일반회화는 원과의 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중국화의 유입이 다시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었다. 특히 충선왕이 이제현 등과 함께 燕京에 萬卷堂을 짓고 그 곳에서 趙孟頫·朱德潤과 같은 중국 문인화가들과 가졌던 교유와 여러 화적을 직접 본 경험, 그리고 魯國大長公主가 고려에 올 때 가져온 서화를 비롯하여 양국 왕실간의 혈연적 결합에 따른 왕족들의 내왕을 통해 이루어졌던 회화 교류가 이 시기의 화풍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렇게 유입된 원대의 화풍에는 남송적 요소가 짙게 내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당시의 고려화단에 남송 院體畵風이 이제현 등의 만권당계 문인학자들에 의해 대거 수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0678) 金起弘,<朝鮮中期畵風硏究의 淵源的 考察>(≪澗松文華≫ 26, 1984), 42∼44쪽. 그러나 이 시기의 고려회화에 영향을 미쳤을 조맹부와 주덕윤 등의 문인화가들이 남송적인 경향만을 보였던 것도 아니고 또 원말 4대가의 화풍을 제외한 원대의 대체적 흐름이 남송 원체화풍 위주로 전개되지 않았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원대 회화의 일반적 흐름은 전대 요소들의 융합 즉 북송의 李郭派화풍과 남송화풍의 절충적 경향이었으며, 비슷한 혼합과정에서 형성된 墨面과 여백의 대비가 심한 강렬한 墨調와 거칠며 방일한 필치, 그리고 공간의 평판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른바 前浙派的 양식을 주류로 하였다.0679) 鈴木敬,≪明代繪畵史硏究:浙派≫(東京大 東洋文化硏究所, 1968), 39∼62쪽. 특히 조맹부와 주덕윤을 비롯한 이들 주변의 문인화가들은 이러한 화풍과 관련이 있으며, 충선왕과 이제현도 이들과의 교유를 통하여 비슷한 경향과 접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제현의<騎馬渡江圖>는 이와 같은 절충적 경향의 일면을 부분적으로나마 반영하고 있다(<도판 2>). 물론 이 그림에는 연경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던 원대 원체화풍의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나 있다.0680) 安輝濬,<韓國山水畵의 發達硏究>(≪美術資料≫ 26, 1980), 19∼20쪽. 그러나 근경의 한쪽 구석으로 景物이 많이 치우쳐 있는 변각적 구도인 점과, 소나무의 크게 굽은 모습, 車輪葉法의 침엽과 같은 남송의 馬夏派的 요소와 함께 주덕윤의<山水圖>와 唐棣의<山水圖>의 나무 모습과 비교적 유사해 보이는 가지만 남은 裸木들에 깃들어 있는 이곽파의 잔영이 혼재해 있는 것은 원대의 절충적 경향으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그리고 절벽의 표면에 구사된 성긴 필치와 화면의 하단 중앙에 윗부분만 작게 돌출된 토파의 배치 등은 후대의 절파화풍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요소로서 주목된다.

확대보기
<도판 2>騎馬渡江圖
<도판 2>騎馬渡江圖
팝업창 닫기

 일본의 相國寺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14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 작가 미상의<雪景山水圖>는 남·북송 혼합적 경향에 바탕을 둔 이러한 전절파적 화풍을 좀더 잘 보여준다(<도판 3>). 화면의 좌반부에 경물들이 치우쳐 있고 반대편이 비교적 소략하게 다루어진 구도는 곽희의 전칭작인<江山雪霽圖>와 함께 남송대 목계의 그림으로 전칭되고 있는<漁村夕照圖>와 비슷하다. 묵법은 원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夏珪의 전칭작들과 유사한데, 전절파의 영향을 받아 이 그림이 흑백대비가 더 심하고 거칠다는 데 차이점이 있다.

확대보기
<도판 3>雪景山水圖
<도판 3>雪景山水圖
팝업창 닫기

 이와 같은 경향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高然暉 전칭의<夏景山水圖>와<冬景山水圖> 2폭도 주목된다.<하경산수도>는 주산들이 米點으로 처리되어 있어 이 시기에 남종화계 米法山水畵風의 수용을 입증해 주기도 한다.0681) 安輝濬,<韓國南宗山水畵의 變遷>(≪三佛金元龍敎授 停年退任紀念論叢≫ Ⅱ, 一志社, 1987), 17∼18쪽. 그런데<동경산수도>에 보이는 필선의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거친 윤곽선이라든가 강렬한 묵조, 공간의 평판화 등은 禪餘양식과 함께 원대 전절파 양식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으며, 원대의 이곽파화가 曹知白의<群峯雪霽圖>도 화풍상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게 느껴진다.

 고려 말기에는 이러한 경향의 이상산수 이외에 實景山水畵에서도 좀더 다양한 전통을 형성했었다. 名勝名所圖계열에서는<금강산도>와<關東圖>등이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사대부들의 성장과 관련하여 이들의 卜居현장을 다룬<梅雪軒圖>와<獨谷燕坐圖>,<獨谷散步圖>와 같은 別墅幽居圖계열과<元岩讌集圖> 등의 野外雅集圖계열의 실경산수화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특히<금강산도>의 경우는 曇無竭보살이 사는 불교의 성지로 금강산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직접 참배하기 어려운 원 황실 등에서 그림으로나마 그 경관을 배견하고자 하는 소망과 결부되어 제작되기 시작했었다.0682) 洪善杓,<金剛山그림의 실상과 그 흐름>(≪月刊美術≫ 4, 1987), 57∼59쪽. 충렬왕 33년(1307)에 魯英이 그린<阿彌陀九尊圖> 뒷면 상단의<담무갈보살예배도>는 당시 금강산그림의 편모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도판 4>). 검은 칠을 한 나무판에 金泥로 그려진 이 그림의 상단부에는 태조 왕건이 금강산 절고개에서 담무갈보살에게 예배드리는 장면과 함께 正陽寺 뒷산으로 추정되는 금강산의 뾰족한 암봉들이 묘사되어 있다.0683) 文明大,<魯英筆 阿彌陀九尊圖 뒷면 佛畵의 再檢討>(≪古文化≫ 18, 1980), 2∼12쪽. 험준하고 날카로운 고산준봉들의 전반적인 양식은 북송대 이곽파화풍의 대가였던 許道寧의 화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밑으로 길게 죽죽 그어 내린 필치는 조선 후기의 鄭敾이 금강산의 암산을 묘사할 때 사용했던 垂直皴과 상통되고 있어 그 전통이 이미 고려 말기에 형성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확대보기
<도판 4>曇無竭菩薩禮拜圖
<도판 4>曇無竭菩薩禮拜圖
팝업창 닫기

 이 시기에는 인물화도 보다 다양해져 鑑戒性을 띤<三綱行實圖>와<孝子圖>를 비롯하여 道釋人物畵·故事人物畵·궁궐행사도·풍속인물화의 선구적 의의를 지닌<豳風圖>등이 그려졌으며, 초기부터 고려시대 인물화의 대종을 이루었던 초상화의 유행이 더욱 확산되었다. 초상화의 경우 화원들뿐 아니라 문인화가들과 왕에 이르기까지 즐겨 다루었으며, 공민왕의 경우는 노국대장공주와 廉悌臣·李岡·尹澤 등 여러 군신들의 초상과 자화상까지 그릴 정도로 애호했었다.

 당시의 초상화로는 현재 安珦(1243∼1306)의 초상이 전하고 있다(<도판 5>). 右顔九分面으로 나타낸 반신상의 안향 초상화는 그가 죽은 지 12년 후인 충숙왕 5년(1318)에 형상을 그려서 문묘에 모시고 致祭케 하기 위해 왕의 명에 의해 興州守 崔琳이 都目에 의거 묘사케 한 것이다. 얼굴의 윤곽을 가늘고 연한 붉은 선으로 나타냈는 데 이러한 기법은 조선시대에 볼 수 없는 高麗的인 특징으로 간주된다.0684) 安輝濬,≪韓國繪畵史≫(一志社, 1980), 74쪽. 그러나 옷의 윤곽과 주름을 가늘고 유연한 선으로 간결하게 요약하고, 음영없이 線描 위주로 처리한 화법은 조선 초기 초상화 양식으로 이어받아 발전된다.

확대보기
<도판 5>安珦像
<도판 5>安珦像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도판 6>天山大獵圖(殘片)
<도판 6>天山大獵圖(殘片)
팝업창 닫기

 고려 말기의 인물화풍은 이 밖에도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天山大獵圖>(<도판 6>)와<圍碁圖>중의 인물묘사법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0685) 安輝濬,<高麗時代의 人物像>(≪考古美術≫ 180, 1988), 9∼13쪽.<천산대렵도>의 인물들은<安珦像>에서 볼 수 있는 가늘고 섬세한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이 잡혀 있다. 그리고<위기도> 인물의 옷주름은 일종의 釘頭鼠尾描로 되어 있으며, 모두 정확한 묘사와 예리한 필력을 보이고 있어 당시 인물화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고분벽화의 인물기법 중에서 水落岩洞 1호분에 그려진 人面人身의 12지신상들이 윤곽선으로 묘사되는 白描法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북송대 李公麟의 백묘화법의 경향을 위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0686) 安輝濬, 위의 글, 14쪽.

 이와 같이 원나라 간섭 이후의 고려 말기 일반회화의 경향과 화풍은 그 이전에 형성된 기반 위에서 조맹부의 화풍을 비롯한 새로운 원대의 양식이 유입되어, 보다 다양하고 심화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곧바로 조선 초기로 이어져 조선시대 회화발달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