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6. 음악
  • 2) 향악
  • (2) 향악기와 향악활동

가. 향악기

 고려의 향악기는 앞 시대에 비해서 숫자상으로 늘었기 때문에, 다양한 향악기로 연주되었던 향악도 질적으로 향상되었고, 따라서 향악의 연주양상도 새로워졌다. 여러 향악기들은 두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大樂署나 管絃房 같은 고려의 왕립음악기관에서 연주되었던 향악기이고, 다른 하나는 궁중 밖의 일반사회에서 연주되었던 향악기이다. 고려의 왕립음악기관에서 악공과 악사들에 의해서 연주됐던 향악기에 관한 기록은≪고려도경≫과≪고려사≫ 악지에 전하고, 궁중 밖의 일반사회에서 연주됐던 향악기에 대해서는≪高麗名賢集≫에 기록되었다. 우선≪고려도경≫이 전하는 향악기와 관련된 기사는 아래와 같다.

중국음악의 악기는 다 중국제도 그대로이다. 다만 향악에는 고·판·생·우·피리·공후·오현·금·비파·쟁·적이 있는데, 그 모양과 제도가 약간씩 다르다. 슬의 괘가 고정되어 있어서 움직이지 않고, 또 관의 길이가 두 자나 되는 소가 있는데, 그것을 호금이라고 한다. 몸을 굽혀서 먼저 그 악기를 불면, 여러 악기들이 따라서 소리낸다(徐兢,≪高麗圖經≫ 권 40, 同文 樂律).

 이 글에서는 12세기 초 고려의 왕립음악기관에서 사용되었던 11종의 향악기를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1종의 향악기 중에 琴 또는 瑟은 거문고를 기술한 것이고, 笛 또는 胡笒이라는 것은 젓대인 大笒을 의미한다고 풀이된다. 그리고 고는 腰鼓로, 판은 拍板으로, 오현은 향비파로, 비파는 당비파로, 쟁은 가야금으로 공후는 와공후로, 피리는 향피리로 각각 해석될 수 있다.0768) 宋芳松, 앞의 책(1988), 10∼33쪽.

 이 향악기 중에서 적(胡笒)·필율·공후·고·생·우는 신라 때 향악기로 사용되었다가 고려 초기의 왕립음악기관에 수용되었는데, 고려 후기에는 대금(笛·胡笒)과 향피리(篳篥)만이≪고려사≫ 악지에 향악기로 기록되었다. 향비파·거문고·가얏고로 밝혀진 오현·금·쟁은 통일신라시대의 三絃전통이 그대로 전승된 결과였다. 당비파·박판·요고로 해석된 비파·판·고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악기의 유래에 따라서≪고려사≫ 악지에 당악기로 기록되었다. 요컨대 통일신라시대 三絃과 三竹의 향악기 전통이 다른 악기들과 함께 고려 전기에 잘 전승되었으나,≪고려사≫ 악지 편찬 당시에 당비파·박판·요고는 당악기로 분류되었고, 와공후·생·우는 향악기에서 제외되었으며, 오직 향비파·거문고·가얏고·젓대·향피리만이 향악기로 기록되었다.

여섯 줄의 거문고, 다섯 줄의 비파, 열두 줄의 가얏고, 열세 구멍의 대금, 장고, 여섯 매의 아박, 장식이 있는 무애·무고, 두 줄의 해금, 일곱 구멍의 피리, 열세 구멍의 중금, 일곱 구멍의 소금, 여섯 매의 박(≪高麗史≫권 71, 志 25, 樂 2, 俗樂 樂器).

 여기서 거문고·(향)비파·가얏고는 신라 삼현을 그대로 전승한 것이고, 대금·중금·소금은 삼죽의 전통을 전승한 결과이므로, 통일신라시대 향악의 중추적 구실을 담당했던 삼현과 삼죽의 전통이 고려왕조에 잘 전승되어 조선왕조로 이어졌다. 그 나머지 7종의 향악기 중에서 아박·무애·무고·박은 음악연주를 위한 악기라기보다는 궁중정재의 舞具였고, 장고·해금·피리는 고려시대에 새로 추가된 향악기였다.

 향피리로 해석되는 피리는≪고려도경≫에도 언급되었던 관악기였음을 상기할 때, 고려시대 향피리는 왕립음악기관에서 향악기의 위치를 확고히 차지하게 되었다. 장고는 고려 전기에 사용된 요고 대신에 송나라에서 수입된 이후 많이 사용하게 됨으로써, 고려 후기에는 향악기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해금은 元의 胡笒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려 전기에는 안보이고≪고려사≫ 악지에 나타나는 사실로 미루어, 해금은 장고처럼 고려 후기에 향악기의 하나로 취급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의 왕립음악기관에서 연주되었던 향악기 이외에≪고려명현집≫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사회에서 연주된 향악기는 신라의 삼현과 삼죽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 향악기들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서 연주되었다. 가야금과 거문고는 고려의 문신들에 의해서 四藝의 하나로 애용되었고, 향비파는 주로 하류계층의 妓女들에 의해서 애용되었음을 상기할 때, 신라 삼현의 전통이 왕립음악기관에는 물론이고 고려사회에서도 잘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삼현의 경우처럼 삼죽도 고려사회의 승려와 문사들에 의해서 애용되었다.0769) 宋芳松, 앞의 책(1988), 108∼136쪽·137∼164쪽. 따라서 고려향악은 조정에서 수입한 송나라의 교방악과 대성아악에 눌리지 않고 제대로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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