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6. 음악
  • 4) 대성아악의 등장과 그 향방
  • (2) 대성아악의 역사적 변천

(2) 대성아악의 역사적 변천

 태묘악장의 정성과 중성이라는 구분이 공민왕 12년 당시에는 없어지는 변천과정을 거쳤듯이, 대성아악도 수용과정에서 변천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성아악의 역사적 변천은 태묘의 제향에서 뿐만 아니라, 원구·사직 등의 제향에서도 있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0813)≪高麗史≫ 권 70, 志 24, 樂 1, 雅樂 軒架樂獨奏節度. 첫째 명종 18년(1188) 당시 대악서와 관현방 소속의 악공들이 음악연주에 전념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둘째 의종 15년(1161) 고려의 유신과 그릇된 악사들이 멋대로 아악연주의 순서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佾舞의 舞具 숫자를 변경시켰다. 셋째로 예종 11년 대성아악을 수입할 때 아악기와 의물만이 전해졌을 뿐이었고 아악기의 연주법이 고려의 악공들에게 전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승지 徐溫이 송에서 연주법을 익혀와 고려 악공들에게 가르쳤다.

 특히 대성아악이 변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셋째 사실에서 찾아져야 마땅하다. 편종과 편경을 포함한 수십종의 아악기 연주법이 고려 악공들에게 전수되지 못한 형편에서 대성아악의 연주가 제대로 고려조정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고려의 유신과 악사들이 의종 때 멋대로 아악연주의 순서를 바꾸었다는 사실도 그런 관점에서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태묘를 위시한 궁중제향에서 등가와 헌가의 연주절차가 확정된 시기는 의종(1147∼1170) 때였지만,0814) 李惠求,<고려대성악의 변천>(≪韓國音樂序說≫, 서울大 出版部, 1966), 149쪽. 명종 18년에 이르렀을 적에 벌써 많은 변천이 있었다. 그 이전의 것과 비교해서 바뀌 것은 첫째로 아악기의 八音 중에 금과 슬 그리고 훈과 부가 없었고, 둘째로 晋鼓가 새로 사용되었으며, 셋째로 제향절차 가운데 아헌과 종헌에서 향악이 연주되었고, 넷째로 박부가 진고와 함께 일무의 춤반주에 사용되었다는 점 등이다.

 대성아악이 고려조정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셋째 사실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궁중제향의 모든 절차에서 아악 일색일 수 없었고, 향악이 아헌과 종헌의 절차에서 연주되는 역사적 변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대성아악이 수용된 후 보존 차원에서 전승만을 일삼았던 것이 아니라 고려문신들에 의해서 자주적 입장에서 고려의 사정에 알맞게 고쳐졌다는 사실은 고려음악사에서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대성아악의 변천에는 국내의 이러한 사정 이외에 대외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바로 고종 이후 고려조정에 미친 몽고의 정치적 압력은 대성아악의 변천에 결정적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강화도로 천도한 후, 왕립음악기관의 악공과 아악기가 제대로 옮겨졌거나 또 제례음악이 개성에서처럼 때마다 거행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성아악의 변천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공민왕 때 대악서의 명칭이 여러 차례 개칭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대성아악의 전통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공민왕 19년 명 태조가 하사한 새로운 아악기를 태묘에서 사용한 사실은0815)≪高麗史≫ 권 70, 志 24, 樂 1, 雅樂 軒架樂獨奏節度. 대성아악의 변천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고려조정에서 사용한 아악기는 모두가 송에서 보낸 것들이었음을 상기할 때, 명의 아악기는 송의 아악기와 음율적으로 조화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음율의 기본인 황종율관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로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과 송의 아악기가 조화를 이룰 수 없었고, 이것이 대성아악의 변천을 일으킨 결정적 요인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14세기 무렵에 이르러 대성아악의 전통은 사실상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아악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고려조정은 공양왕 원년(1389) 樂學을 설립했고, 또 동왕 3년 雅樂署를 설립했다. 그러나 음악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악학 및 종묘의 악가를 익히기 위해서 설립된 아악서는 대성아악의 변천이라는 대세를 바로잡지 못했고, 고려의 멸망과 함께 조선의 음악기관으로 전승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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