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7. 무용과 연극
  • 1) 산대잡극
  • (2) 교방가무희

(2) 교방가무희

 고려왕조는 이와 같이 팔관회와 연등회 등 큰 잔치를 축하하는 절차를 갖추기 위하여 殿庭의 백희로는 신라 이래의 여러 종목을 집성했으며, 殿上의 가무에는 문종(1046∼1083) 때 송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한 敎坊樂0853) 車柱環,≪唐樂硏究:高麗史樂志≫(汎學圖書, 1976), 12∼18쪽.을 사용하여 이를 보강하였다.≪고려사≫ 樂志에 보이는 당악의 종목 중 가무희의 형태를 갖춘 것은 獻仙桃·壽延長·五羊仙·抛毬樂·蓮花臺·惜奴嬌曲破·萬年歡慢 같은 7종의 대곡들인데, 이 중에서≪고려사≫ 악지에 舞譜가 전하는 것은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락·연화대의 다섯 가지이며, 이 다섯 가지는 조선시대 成俔이 편찬한≪樂學軌範≫에도 時用唐樂呈才로서 그림으로 해설되고, 그 진행절차가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어 조선조에도 계속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헌선도의 구성을 보면 “元宵嘉會에 군왕에게 慶壽하기 위해 왕모가 仙界에서 내려와 千歲靈桃를 헌상하는 간단한 것”0854) 車柱環, 위의 책, 51∼54쪽.이나, 18인의 무용대로 구성되었다. 수연장은 16인으로 구성된 무대로 왕이 술마실 때의 송축을 확대시킨 가무희다. 오양선 역시 군왕을 송수하는 내용의 왕모출장의 가무로 18인의 무대로 구성되어 있다. 포구락은 연회에서 주흥을 돕기 위한 가무희의 일종으로 좌우 각 8인 2대로 갈리어 각 대에서 차례로 1인씩 나와 포구희를 하고, 좌우의 唱詞는 같지 않으므로 창은 16회, 가사는 16종이 나온다. 연화대는 西域의 한 나라인 石國(Tashkent)에서 전래된 춤으로 柘枝舞 중에서 두 童女의 對舞만을 감상할 수 있게 편성된 것으로 “竹竿子의 개장 구호에 이어 두 동녀의 가무가 시작되고, 악관의 班賀舞의 주악으로 앞을 보이기도 하다가 뒤를 보이기도 하는 對舞가 전개되는데 이 반하무는 두 번 되풀이되고 두 번째는 준비해 놓았던 蛤笠을 쓰고 춤을 춘다. 이 반하무가 끝나면 竹竿子의 遣隊致語로 퇴장하게 된다.”0855) 車柱環, 위의 책, 68쪽.≪악학궤범≫의 時用鄕樂呈才圖儀에는 鶴舞蓮花臺處容舞合設로≪고려사≫ 악지의 연화대 本注의 설명을 그대로 상연하기 위해서 악공들이 고안하여, 拍板의 박자에 맞추어 청·백 두 마리의 학이 미리 준비해 놓은 못에 걸어가서 청·백학이 각각 한 蓮筒씩을 쪼아 열고 두 동녀가 나타나면 질겁을 해서 물러나고 두 동녀의 대무가 있다. 여기에 처음과 마지막에 五方處容舞가 합설된다. 처용무는 원래 독무로 전래되었던 것을 중국의 五方舞를 본떠 오방처용무로 구성한 것 같다.0856) 車柱環, 위의 책, 70∼73쪽.

 석노교곡파의 曲辭의 내용은 上元燈夕에서 군왕을 송수하는 것으로≪고려사≫ 악지에는 곡파의 가사가 보존되어 있고,≪악학궤범≫에는 2인무인 곡파의 춤을 상연하는 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만년환만은 萬年歡大曲의 일부로 생각되는 곡사가 보존되어 있을 뿐 그 춤은≪악학궤범≫에도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 연등회와 팔관회에서 연행되던 당악으로 踏沙行·九張機別伎·王母隊歌舞가 있다. 답사행과 구장기별기는 모두 13명의 가무대가 상연하였고, 왕모대가무는 1대가 55인으로 구성된 字舞로 「君王萬歲」나 「天下太平」 같은 네 글자씩을 만든다.

 한편≪고려사≫ 악지에 속악으로는 舞鼓·動動·無㝵의 3곡만이 2인무의 呈才 즉 舞樂伎로 무보가 실려 있다. 무고는 두 기녀가 음악에 맞추어 북채를 잡고 북을 치는데 음악의 절차에 따라 장구와 더불어 서로 맞추어 나가며 음악이 끝나면 춤도 멎는다. 동동과 함께 고려 이래로 향악정재의 白眉였으며, 현재까지 700년에 가까운 오랜 전통을 가진 귀중한 춤의 하나이다. 동동은 고려가요 動動詞를 부른 데서 온 이름이며, 두 손에 상아로 만든 작은 박을 치면서 춤춘다. 이 무구에서 후대에 이르러 牙拍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춤은 조선조 말까지 전승되었으나 지금은 단절되었다. 다음은 무애에 대하여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元曉大師가 항상 목이 구부러진 표주박을 어루만지며 시중에서 가무하였는데, 이를 이름하여 無㝵라 하였다. 그런 후로 호사가가 표주박 위에 金鈴을 달고, 아래에는 彩帛을 늘어뜨려 장식하고, 이를 두드리며 진퇴하니 모두 음절에 맞았으며, 經論偈頌을 노래하매 無㝵歌라 불렀다고 전한다(李仁老,≪破閑集≫ 권 하).

 따라서 無㝵舞의 연원은 퍽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三國遺事≫ 권 4 元曉不覇條에 보이는 무애가의 유래를 이인로도 그대로 옮겨 무애가가 원효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무애라는 놀이는 서역에서 나왔다. 그 가사는 불가의 말이 많이 씌어져 있고, 또 방언이 섞여 있어 그것을 짜넣기가 어렵다. 잠시 節奏만을 남겨 두어 당시에 사용하던 음악의 하나로 갖추어 둔다(≪高麗史≫ 권 71, 志 25, 樂 2, 俗樂 無㝵).

 그러나 무애는 위에서 보듯이 서역에서 나왔고, 그 내용도 불가와 관련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대에 무애무가 제거되었다가 순조 때 재연되었고, 궁중에서뿐 아니라 사찰에서도 다분히 유흥적인 가무로 연무되었음을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唐樂呈才와 鄕樂呈才가 다른 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0857) 張師勛, 앞의 책, 124∼129쪽. 첫째, 당악정재는 죽간자 두 사람이 舞員을 인도하여 출퇴장하고, 향악정재는 이러한 인도가 없이 음악이 울리면 곧 춤이 시작되고 춤이 끝나면 꿇어 앉아 큰절을 하고 일어서서 퇴장하는 자연스러운 형식을 갖는다. 둘째, 당악정재는 원칙적으로 앞뒤에 致語와 구호가 있는데 반하여 향악정재에는 구호와 치어가 없는 것이 본래의 양식이다. 셋째, 당악정재는 춤을 추다가 순한문으로 된 唱詞를 부르고, 향악정재는 춤을 추다가 井邑詞·動動 등 그 춤과 관련있는 노래를 부른다.

 이상에서 보아온 고려의 백희가무를 집약해서 읊은 고려 말의 李穡의 시<山臺雜劇>이 있다. 그 내용을 의역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5색 비단으로 장식한 山臺(綵棚)의 모양은 蓬萊山과 같고, 바다에서 온 仙人이 과일을 드린다(獻仙桃). 俗樂을 울리는 북과 징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處容의 소맷자락은 바람에 휘날린다. 솟대쟁이는 긴 장대 위에서 평지에서와 같이 재주를 부리고(百戱의 하나인 奇伎曲藝), 폭발하는 불꽃이 번개처럼 번쩍인다(李穡,≪牧隱詩藁≫권 33, 詩 山臺雜劇).

 이것은 14세기 후반에 산대잡극이라고 불리던 놀이의 내용을 묘사한 것으로 당악정재인 獻仙桃와 향약정재인 處容舞 등의 가악무와 솟대쟁이·火戱 등의 奇伎曲藝로 관중을 즐겁게 하던 축제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高麗圖經≫에 “百戱를 노는 자 수백 인으로 모두 민첩하기가 뛰어났다”0858) 徐 兢,≪高麗圖經≫ 권 40, 同文 樂律.고 하여 숙달된 고려의 백희가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산대잡극은 연등회와 팔관회 외에도 왕의 行幸이나 몽고로부터의 환국, 궁중의 宴樂歡娛 때, 그리고 개선장군의 환영잔치 등에 쓰인 것이≪고려사≫에 보인다.0859)≪高麗史≫ 권 19, 世家 19, 의종 24년 윤4월, 권 94, 列傳 7, 姜邯贊 및 권 126, 列傳 39, 邊安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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