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7. 무용과 연극
  • 3) 조희

3) 조희

 이색이 읊은 시에서<산대잡극>과<구나행>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의 가무백희는 奇伎가 주가 되는 규식지희와 음악이 주된 내용을 이루었던 듯하다. 조선조≪文宗實錄≫에서 분류한 規式之戱와 笑謔之戱와 음악0861)≪文宗實錄≫ 권 2, 문종 즉위년 6월. 중에서 소학지희에 해당되는 調戱는 즉흥극으로서 재담과 익살 등으로 놀이를 이끌어 가던 것인데 고려시대에는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고려사≫와 기타의 문헌에는 꽤 일찍부터 조희에 관한 기록들이 보이므로, 이러한 기록들에 근거하여 우리 나라의 話劇的 전통의 출발을 고려시대로 잡을 수 있겠다. 한국고전문학의 형태의 발전을 살펴볼 때 고려의 문학은 신라문학을 계승하여 조선시대의 문학을 낳은 모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고려의 연희는 신라의 가무백희를 계승하여 그 규식지희적 측면의 발전은 물론 소학지희적 측면의 희곡적 전개로서 조희를 발달시켜 조선의 후반기에 이르러 이 양면을 지양시킴으로써 산대도감계통극의 형성에도 모태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나라의 역사를 다룬 잡희의 예로써 예종 5년에 있은 河拱辰놀이를 들 수 있다. 하공진은 현종 원년(1010) 거란이 침입했을 때 철군교섭을 위하여 적진에 들어갔다가 포로가 되어 燕京에 억류되었고, 거란왕의 갖은 회유에도 끝내 변절을 거부하다가 살해된 충신이다.0862)≪高麗史≫ 권 94, 列傳 7, 河拱辰. 이러한 하공진의 이야기를 “優人 즉 배우가 있어 先代功臣을 기렸다”0863)≪高麗史≫ 권 13, 世家 13, 예종 5년 9월 갑술.는 것은 이 때 배우가 말을 주된 표현수단으로 하고, 거란왕과 하공진의 대화로 1인 2역을 했거나 2인 이상의 배역으로 연출된 조희로 공연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더욱이 공민왕 때는 거리에서 배우가 간신 廉興邦의 종들이 백성으로부터 조세를 수탈하는 모양을 연출한 우희를 놀았다.

興邦의 家奴 李琳과 사위 判密直 崔濂의 가노가 富平에 살았는데 권세를 믿고 방자 횡포하였다.…興邦이 일찍이 異父의 형 李成林과 함께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騎士가 길에 가득차 있고, 어떤 사람이 광대놀음을 하여 세력가의 가노가 백성을 괴롭혀 조세를 거두는 형상을 놀고 있었는데, 成林은 부끄러워 하였으나 興邦은 즐겁게 구경하며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高麗史≫ 권 126, 列傳 39, 廉興邦).

 이와 같이 선대 충신의 史實을 재현하거나 시류의 악폐나 권세가를 풍자하여 사회성을 띤 조희는 몸짓뿐 아니라 재담 즉 말을 주요한 표현수단으로 한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어보면 14세기 후반 충혜왕 때 將仕郞 永泰가 배우놀이를 즐겨 하였는데 충혜왕을 따라다니며 매번 우희를 보여드렸다. 그가 한번은 왕이 永泰를 물속에 던지자 물속에서 나와 왕과 주고 받은 문답은 기지에 찬 재담이 아닐 수 없다. 즉 왕이 크게 웃으며, “너는 어디로 갔다가 지금 어디에서 오느냐”고 물으니, 영태가 대답하기를 “屈原을 만나 보고 오는 길입니다”하였다. 왕이 “屈原이 무엇이라 하더뇨”하니, “屈原이 말하기를 ‘나는 暗主를 만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거니와 너는 明主를 만났는데 무슨 일로 왔느냐’ 하더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銀단지를 주었다고 한다.0864) 이 이야기는 成俔의≪慵齋叢話≫ 권 3에서 인용하였으나 唐代 문인 段成式의≪酉陽雜俎續集≫ 권 4에 비슷한 이야기가 보인다. 고려 충혜왕 당시 永泰는 이미 이 이야기를 읽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 우희, 俳優戱 또는 倡優戱로 불리던 놀이는 이같이 재담을 주로 하는 조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獨演 형태의 놀이만이 아니고, 다수인에 의한 놀이의 기록도 보인다. 의종 19년(1165) 4월에 좌우번의 내시들이 競演으로 채붕을 설치하여, 잡기를 싣고 이국인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바치는 광경을 보여준 공물바치기 놀이가 있다. 이 때 좌번은 모두 儒士들로 잡희에 익숙치 못하고 바친 물품도 귀족자제들이 많았던 우번 내시들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0865)≪高麗史≫ 권 18, 世家 18, 의종 19년 하4월 갑신. 이 때의 내시들은 모두 고관 귀족들의 자제이거나 유사들로서 직업적인 배우들은 아니며, 그 당시 배우들의 놀이를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의 양대 명절의 하나인 팔관회 때에는 대회일에 宋·女眞·耽羅 및 倭國 또는 大食國(아라비아) 상인들도 토산물을 바쳐0866)≪高麗史≫ 권 6, 世家 6, 정종 즉위년 11월 경자. 국제무역이 행하여졌다. 이러한 공물 바치는 광경을 재현한 놀이는 일종의 흉내내기놀이이며, 연희임에 틀림없다.

 이 밖에 고려조의 연희로 생각되는 놀이들의 기록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신종 5년(1202)에 崔忠獻이 彩(綵)棚을 매고 시설하여 크게 베푼 「伎樂雜戱」와, 고종 32년(1245)에는 崔怡가 마련한 伎樂百戱0867)≪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신종 5년·附 怡 고종 32년 4월 8일.가 있었고, 그 1년전에는 假面人雜戱0868)≪高麗史≫ 권 23, 世家 23, 고종 31년 2월 정해.를 놀았다. 충렬왕 14년(1288)에는 侏儒戱와 倡優戱0869)≪高麗史≫ 권 30, 世家 30, 충렬왕 14년 9월 임자.를, 충혜왕 4년(1343)에는 왕이 나희와「乞胡戱」를, 또 다른 날에는「處容戱」를 놀았다고0870)≪高麗史≫ 권 36, 世家 36, 충혜왕 후4년 5월 을유·8월 경자. 한다. 우왕 10년(1384)에는「唐人戱」·「巫現戱」·「處容假面戱」0871)≪高麗史≫ 권 135, 列傳 48, 신우 10년 2월 갑술·8월 을해 및 12년 정월. 등의 놀이 이름이 보인다. 이 놀이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고려 후기 몽고의 부마국이 된 후로 더욱 西域과의 교류가 빈번하였으리라고 짐작되므로「胡漢雜戱」나「乞胡戱」는 이색이<구나행>에서 읊은 西域胡人戱와 같은 종류일 것이다. 그리고「당인희」도 중국계 놀이로 신라 이래의 처용무와 함께 고려연희의 등장인물이 다양하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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