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8. 체육
  • 2) 궁사

2) 궁사

 활쏘기는 상고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특기였다고도 하겠는데, 고려시대에도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주로 쓰인 활은 짧고 굽은 활인 角弓이었다.0901) 김기웅,≪무기와 화약≫(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176쪽. 활쏘기는 역사적으로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냈지만, 射禮 또는 수렵의 기능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한편 이 시대의 활쏘기를 경기 및 스포츠적 요소가 내포된 활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 기록이 다수 나타나는데 궁술의 연습을 위한 공식 활터를 설치하고 일반에게도 공개하였다.

 즉 선종 8년(1091)에 戶部 남쪽 회랑에 활터를 설치하여 군대의 병졸과 일반의 활쏘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習射(肄習)하게 하되 만약 과녁을 맞히는 자가 있으면 은주발·대접 한 벌을 상주기로 하였으니 이는 나라에서 射風을 격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0902) 李重華,≪朝鮮의 弓術≫(朝鮮弓術硏究會, 1929), 23쪽. 이후로 군대의 훈련과는 달리 상품을 수여하는 경기적 활쏘기행사가 빈번히 개최되었음은 기록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숙종 7년(1102) 왕이 會福樓에 나아가 동반신료들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이를 뽑아 활쏘기를 시켰다. 長慶寺에 행차하여 兩京과 靜州의 將士·馬隊를 사열하고 宰樞와 扈駕臣僚들에게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힌 자에게는 廐馬와 綾絹을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0903)≪高麗史≫ 권 81, 志 35, 兵 1, 五軍 숙종 7년 10월. 의종 때 왕이 양경 문무관에게 활을 쏘게 한 적이 있었다. 해가 저물자 큰 촛불을 과녁 위에 꽂아 놓고 활쏘기를 하였는데 西都人이 이를 많이 맞혔으나 수행관원은 맞힌 자가 없었으므로 왕이 자못 불쾌하게 여겼다. 恭이 첫 화살에 촛불을 맞히고 두 번째는 과녁을 맞히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비단을 내려주었다.0904)≪高麗史≫ 권 94, 列傳 7, 徐熙.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동반신료·재추·호가신료 등 문무관이라는 집단의 성격과 행사장소의 특성상 군대의 훈련적 성격보다는 스포츠 경기적 요소가 크게 돋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과거 우리 나라 군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에 6藝가 있었음을 상기할 때 궁사의 능력은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여, 그들의 궁사활동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군사활동과는 별개인 경기형식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고려사≫刑法志에 보면 “음식을 걸거나 활쏘기와 무예를 익히며 도박하는 자는 돈과 물건을 걸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0905)≪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하여, 도박으로서 범죄에서도 예외로 하였음을 볼 때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官設射場을 일반에게 공개하여 활을 쏘게 하고 상을 수여한 활동이나 교외의 정자 등에서 실시된 활쏘기는 스포츠적 요소가 내포된 경기활동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러한 활동은 조선시대의 便射에까지 그 맥이 이어져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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