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0. 의식주생활
  • 2) 식생활
  • (3) 고기음식과 유즙, 기타 찬물류

가. 고기음식과 우유

 漢나라에서는 貊炙이란 고기구이가 있어야 비로소 성찬으로 알았다 하며, 맥적은 맥족 즉 동이족이 만든 고기구이로 해석되고 있다. 맥적은 수렵을 숭상하였던 고대사회의 생활에서 형성된 고기굽는 솜씨로써, 그 조리법은 미상이나 우리의 고대식품으로 미루어 장과 술로 양념한 구이로 추정되며 이것이 우리 고기요리의 전통으로 이어져 온다. 그러나 그 발달과정에는 기복이 있었다.

 ≪三國遺事≫에서 왕의 하루 식사가 쌀 세 말, 꿩 아홉 마리였다고1193)≪三國遺事≫ 권 1, 紀異 1, 太宗春秋公. 한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는 대체로 武를 숭상하던 분위기로 인해 육식을 많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에는 숭불환경에 따라 육식을 절제하였다. 원종 2년(1276)에 “왕은 인심을 금수에까지 베풀어야 하므로 肉膳을 올리지 말라”고1194)≪高麗史≫ 권 25, 世家 25, 원종 2년 3월 경오. 한 바 있다. 또≪고려도경≫에서도 왕은 부처님을 받들어 살생을 삼가고 국왕·상신이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屠宰를 즐겨하지 않으며 도재를 할 때에는 네 발을 묶어 불 속에서 절명하게 한 다음 내장을 제거하므로 고기요리 맛이 없다고 쓰여 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고기요리 솜씨는 한때 주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에 들면서 육식이 크게 선호되어 고기요리의 솜씨가 복원된다. 고기요리의 복원 배경은 대체로 유목인의 고려 향화, 원의 영향, 숭불사조의 쇠퇴로 보인다. 고려 초기부터 고려의 북진정책과 거란·여진 등 북방민족과의 충돌이 빈번하던 중 난을 피하여 또는 향화한 이민족에게 매사냥이나 도살업을 전담하게 하였다. 한편 원과의 교류가 빈번해졌을 때 제주와 함경도에 목축이 확대되어 연례적으로 탐라의 牛肉을 원으로 보냈고, 원으로부터는 왕의 탄일에 양·거위 등이 보내져 왔다. 공양왕 3년(1391) 9월에 간관 許應이 상인을 북경으로 보내서 양육을 사오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간한 바가 있다.1195)≪高麗史≫ 권 45, 世家 45, 공양왕 3년 9월. 한편 공민왕대의 제학 李達衷은 오계와 백마를 즐겨 먹었고, 풍수승 曺華卿이 熊掌·豹胎와 같은 특수육을 즐겼다 한다.1196)≪高麗史≫ 권 112, 列傳 25, 李達衷 및 권 124, 列傳 37, 曺華卿. 이같이 육식을 숭상하게 되고 그 풍조에는 파행적인 양상이 있은 듯 하지만, 고려 초기와는 다른 환경에서 고기요리가 다시 성하게 되었으며 雪夜覓이란 고려의 명물 고기구이가 만들어져서 후대에까지 남게 되었다.

 신라는 근해의 섬에서 목축을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특히 12세기 이후로 목마가 활발하였고 乳牛所를 두었으며 유즙을 약용으로 알고 일부에서 썼다. 명종대 李純佑가 아뢴 다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酪酥를 상납하게 하는 일은 농민의 農牛를 상하게 할 뿐, 그 약효가 위급할 때 소용이 닿는 것이 아니다(≪高麗史≫ 권 99, 列傳 12, 李純佑).

 이것은 곧 왕에 의해 받아들여져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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