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0. 의식주생활
  • 3) 주생활
  • (3) 살림집의 성향

(3) 살림집의 성향

 선비들의 조촐한 집도 적지 않았다. 東山齋도 그 중의 하나인데 寶鳳山에 있어 봉우리에 의지하고 집을 지었다. 姜邯贊·安裕(珦)·李穡의 집은 다 良醞洞에 있었다. 정몽주의 집은 花園 북쪽에, 金九容의 집은 龍峀山 書齋洞에, 崔瑩의 집은 배고개에 있었다.1243)≪中京誌≫ 권 7, 古蹟. 그 중에서 손꼽히는 집이 자하동의 中和堂이다. 시중을 지낸 蔡洪哲의 집인데 松山(송악) 아래의 그윽하고 고요한 동부, 가장 아름다운 자리를 차지하였다. 나이 많은 어르신네들을 모시고 극진한 잔치를 벌였다. 바로 “집은 송산의 자하동에 있는데…”로 시작하는 유명한<紫霞洞歌>가 바로 이 중화당을 찬탄하는 노래였다.1244)≪高麗史≫ 권 71, 志 25, 樂 2, 紫霞洞.

 이들 이름난 제택들은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모습을 알 수 없다. 다행히 충남 온양에 최영의 고택으로 알려진 조촐한 살림집 한 채가 남아 있다. 지금은 牙山의 孟氏杏壇으로 알려져 있다. 古佛 孟思誠이 최영의 손주사위이고 그가 물려주어 세거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해지는 이야기인데, 더러는 그렇지 않다는 설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집은 댓돌이 매우 낮다. 조선조의 보편적인 집이 세벌 대를 위주로 한다면 이 집은 외벌 대로 아주 낮은 특성을 보인다. 같은 충남의 예산 땅, 아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秋史의 故宅 사랑채 댓돌도 외벌 대만의 구조이다. 조선조 말엽의 건축물이다. 외벌 대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추사의 고택은 주초석의 키가 훨씬 높다. 결국 마루 높이는 여느 집의 대청이나 진배없다. 따라서 최영장군의 고택으로 알려진 이 집은 매우 낮은 편이라 할 수 있다.

 평면은 工자형이다. 유사한 모양의 평면을 갖춘 집은 더러 있다. 국가에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는 집 중에 善山 海平의 崔相鶴의 집이 있다. 외모로 보아서는 흡사해 보이나 구성방법은 전혀 다르다. 최씨가는 홑집으로 工자의 획에 충실하게 방과 대청을 포치시켰는데 최영의 집은 겹집으로 가득차게 짓고 앞과 뒤로 반칸씩 돌출시킨 형태이다. 쉽게 말한다면 ㅁ자의 평면에 앞과 뒤쪽으로 반칸의 돌출부를 첨가시킨 것인데 반칸 돌출부분은 단칸으로 하였다. 현존하는 수많은 집들 중에는 이와 동일한 것이 없다.

 앞의 반칸도 앞으로 물매 잡힌 기와지붕으로 가려져 있어 터진 공간은 아니다. 좌우로 반칸씩의 돌출부를 각각의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여 무심히 보는 눈의 인상이 터진 부분처럼 느껴질 뿐이다. 잔돌로 돌각담 쌓듯이 낮게 쌓은 댓돌에 올라서면 낮은 높이로 구조한 툇마루가 있는데 넓이는 반칸이다. 안에 대청이 있고 중심부가 대청의 넓은 마루이다.

 고려시대 살림집 가운데는 우물마루를 깐 예를 有嘉堂에서도 볼 수 있었다. “세 칸 집을 지었는데 두 칸은 마루를 깔았다. 열두 우물…”이라는 기사가 자료이다.1245) 李奎報,≪東國李相國集≫ 후집 권 11, 記 朴樞府有嘉堂記. 오늘에 볼 수 있는 우물마루의 존재가 확인되는 내용이다. 대청 좌우엔 구들 들인 방이 있다. 외벌 대이고 주초와 地枋(아랫중방)의 간격이 좁다. 정상적인 구조의 구들을 들이기엔 부적합하다. 고래를 제대로 설치하려면 기단 표면보다 파고 내려가야 한다. 이는 합리적이 아니므로 의문이 생긴다. 혹시 당초엔 지금과 같이 방 전면에 시설한 구들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고려도경≫에 방 일부에만 구들을 시설하고 臥榻을 만들어 침상으로 삼고 탁자와 의자를 놓고 살림하였다고 보인다. 이는≪三國史記≫에 기술된 생활방도나 고구려 고분벽화의 침상·의자·탁자의 존재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각종의 의자나 탁자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알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고려청자의 유물 중에 의자로 사용하게 만들어진 것이 있어 상류생활에서는 그것을 이용한 생활방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초기 家舍를 제한한 법령에 ‘단청하지 말며 花栱을 시설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다듬은 돌도 주춧돌 말고는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1246)≪世宗實錄≫ 권 51, 세종 13년 정월 정축. 이는 고려에서 허용하여 관습이 되어 온 관행을 금지하려 한 것이어서 상당한 후유증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유가당에도 단청을 하였었다. 즉 천장을 하고 단층으로 그림을 그렸다.1247) 李奎報,≪東國李相國集≫ 후집 권 11, 記 朴樞府有嘉堂記. 조선조에서도 이런 흐름을 차단시킬 수 없어 가묘에는 단청해도 좋다는 예외를 인정하는 방편을 택한다. 단청을 억제하려 하였던 것처럼 화공도 금지시키려 하였다고 이해된다. 고려시대에 허용되던 화공을 최영의 고택에서 볼 수 있다. 맹사성처럼 곧은 분이 국가에서 금제한 화공을 자기 집에 채택하였을 리 만무하다고 한다면 맹씨행단의 화공이 있는 건축물은 고려시대 허용되던 시기에 최영이 조영하였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하겠다.

 세종조 가사제한령에 거론된 여러 가지 금제사항을 살펴보면 살림집 형상의 윤곽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다. 고려시대 대제택들의 조영이 법령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스러운 것이었다면 살림집에는 반듯한 터전 외곽에 담장을 두르고 중심곽에 예의를 돈독히 할 목적으로 지은 내당과 외당이 있고, 內樓와 寢樓·斜廊·西廳·行廊·翼廊과, 대문·중문·곳간·곡간·육고간·뒤주·반빗간·마구간·외양간·수레간·마판·방아실간과 북수간·측간 등의 부속건물들을 배치하였다고 봐야한다. 이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구조와 방불하다. 특히 안악 제3호분1248)≪안악 제3호분 발굴보고≫ 3,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1958).에서 볼 수 있는 형상과 흡사하다. 이는 조선조의 제택과도 유사한 것이라 보이므로 역대의 살림살이가 큰 줄기에서 대략 같았다고 할 수 있고 고려시대 말기에도 대동소이하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집 주변을 말끔하게 하며 반듯하고 평탄하게 해서 빗물이 잘 빠지게 하였다. 집 둘레에 아름다운 꽃을 심었는데, 유가당에서는 黃花를 18종이나 심었다. 시기에 따라 황백의 꽃이 번갈아 피니 대단히 현란하였다. 바깥에서나 안에서 담장에 우련하게 비치니 잘 차려 입은 여인들이 거닐면서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듯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또 남쪽에서나 볼 수 있는 대나무를 40여 그루나 가꾸어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1249) 李奎報,≪東國李相國集≫ 후집 권 11, 記 朴樞府有嘉堂記. 마당 가꾸는 園冶의 방식도 후대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보면 오늘의 우리들 살림살이가 고려로부터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다.

<申榮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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