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1. 개국초 왕권의 강화와 국정운영체제
  • 4) 태조·태종대의 국정운영체제

4) 태조·태종대의 국정운영체제

 왕정시대의 정치운영은 왕권·신권·정치체제·정치세력·시내성 등이 상호연관을 갖고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태조대의 국정운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앞서 도평의사사의 정치활동이 태조대 국정운영에 중요한 것이었으나 모든 정치가 도평의사사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음을 살핀 바 있다. 이 시대의 중요한 정치방법의 하나는 국왕이 직접 왕명으로 정치를 펴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대의 정치는 도평의사사나 개국공신 등 많은 관료가 직접 국정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국왕과 소수의 재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밖에 각 관아에서 직접 국왕에게 주달하고 국왕의 재결을 받아 시행하는 방법이 있었고, 대간의 언론활동도 국정운영의 중요한 일부였다.

 먼저 왕명에 의한 정치를 살펴보자. 태조는 국가의 대소사를 왕명으로 처리했다. 왕명이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며, 왕명의 빈도와 내용에 따라서 왕권의 강약을 가늠할 수 있다. 도평의사사에 내린 왕명에 대하여는 앞서 살핀 바 있고, 관원의 임명·정직·좌천·면직 등 인사관계의 왕명은 생략한 다.088)태조의 국정운영체제에 관해서는 崔承熙, 앞의 글(1987), 148∼164쪽 참조.≪太祖實錄≫에서 왕명을 뽑아 내용별로 분류한 결과 교서(2회), 제사(2), 相地·축성·영선(12), 양천·노비쟁송(1), 사면령(1), 군사(8), 진휼(1), 사초입납(2), 천거(5), 인사규정(1), 금령(3), 농정(1), 海稅(1), 講書·製撰·校正(11), 불사(3), 기타(12) 등으로 나타났다. 모든 것이 중요한 국정에 대한 태조의 直命이었으나 특히 도읍의 택정(相地)과 축성문제, 군사관계(병권의 부여, 병선의 점고·군적의 개수, 군사훈련 등)와 불사관계(왕씨를 위한 水陸齋 설행, 興天寺에 舍利殿 설치 등) 등의 왕명은 강력한 왕권의 뒷받침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었고, 신하들의 반대를 받지 않고 시행될 수 있었다. 이처럼 태조는 개국 초의 중요한 국정은 물론 사적인 관심사까지도 왕명으로 풀어간 것을 볼 수 있다.

 태조는 능력있고 신뢰할 수 있는 소수의 재신을 중심으로 정치를 폈다. 조준·정도전·남은 등이 중용된 재신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국공신은 52명, 원종공신은 1,400여 명에 이르며, 이들의 출신과 능력도 각양각색이었다. 학문적·정치적 능력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태조 원년(1392) 7월 도평의사사의 위원 29명 가운데 개국공신이 17명, 원종공신이 9명으로 확인되고 있고, 도평의사사의 위원수는 42명으로 증가되었고 태조 7년에는 56명에 이르고 있다.089)崔承熙, 위의 글, 150쪽. 이처럼 많은 공신들이 모두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이며, 개국초에 폭주하는 국정을 도당의 위원이 모두 모여 모든 국사를 의논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조조의 국정운영체제는 도당의 합좌에 의하기 보다 국왕으로부터 신뢰받는 유능한 몇몇 재신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도당에서 상달할 경우에도 도당 합의에 의하기보다는 몇몇 위원이 중심이 되었고 왕명을 받아 擬議·시행할 때에도 소수의 재신위원이 중심이 되었다. 즉 태조대 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도당위원 가운데서도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조준·정도전·남은 등은 개국공신이며 도당의 위원으로서 또한 태조의 신임받는 재신으로서 정치를 주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준과 정도전·남은 간에는 요동정벌계획 추진을 둘러싸고 틈이 벌어졌다. 정도전·남은은 그 계획 추진에 적극적이었으나 조준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태조대의 요동정벌계획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태조 5년 表箋문제로 난처해진 정도전이 명에 대한 반감에서 태조 6년에 갑자기 세운 것으로 보기도 하였고, 정도전 등이 사병혁파의 명분을 세우기 위한 제스처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반면 그 계획은 실제 추진되었으나 조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고 보기도 하였고, 태조초부터 정도전 등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 조준의 반대로 중단되었다가 표전문제 이후 대명관계의 악화와 더불어 태조 7년부터 정도전 등 강경파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090)崔承熙, 위의 글, 153∼154쪽. 그러나 태조의 의사에 반하는 요동정벌계획을 정도전 등이 독단으로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요동정벌계획은 태조초부터 태조의 의지에 따라 정도전을 앞세워 추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태조실록≫편찬자들은 정도전과는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세력이었으므로 요동정벌계획과 관계되는 모든 책임을 정도전에게 전가시킨 곡필의 결과로 이 문제에 대한 이해에 혼란을 초래케 한 것으로 보인다. 태조는 즉위한 다음해부터 군사훈련과 군비증강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陣圖에 의한 군사훈련에 직접 간여하였다. 태조 3년(1394) 3월 정도전에게 五軍陣圖를 강의하게 하고 節制使들을 소집하여 “전에 이미 각기 陣圖를 익힐 것을 명령하였다. 明日에 만약 익히지 못한 자와 명령을 어긴 자가 있으면 내가 벌하겠노라”091)≪太祖實錄≫권 5, 태조 3년 3월 경술.라고 하였다. 그 후에도 군사훈련은 태조가 직접 관심을 갖고 강력히 추진하였고, 태조 7년 8월에는 군사훈련에 힘쓰지 않은 자에게는 파직 또는 杖刑을 가하기에 이르고 있다. 공신과 종친들은 곤장은 면했으나 요동정벌을 목표로 한 군사훈련과 관련된 충격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092)崔承熙, 앞의 글(1987), 154∼159쪽.

 이와 같은 소수의 재신을 중심으로 한 태조 때의 정치는 몇몇 재신들에게 정치·군사상의 권력을 집중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정도전·남은을 앞세운 요동정벌계획의 추진과 이를 위한 대대적인 군사훈련, 절제사의 관군화 논의 등은 당시 대부분의 개국공신과 종친들에게 불안·불평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결국 태조와 정도전 등에게 불만을 품어오던 방원이 앞장 선「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요동정벌계획을 추진하던 정도전 등은 제거되었고 그 총수였던 태조도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태조대 또 하나의 정치하는 방법은 各司로부터의 주달을 국왕이 재가하여 시행하는 것이다. 6조와 각 관부에서는 그 직무상의 중요한 일들을 국왕에 게 직접 올렸고 국왕의 재결을 받아 시행하였다. 즉 태조는 도당을 통하지 않고 각 사로부터 직접 주달한 것을 재가하여 시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태조대의 또 하나의 정치운영방법은 대간의 언론을 이용하는 것이다. 태조대의 대간의 정치활동 즉 언론활동은 도평의사사 다음으로 활발한 것이었다.≪태조실록≫에서 언관의 언론은 123회로 집계되는데 그 중 사헌부 46회, 문하부낭사 54회, 대간合辭 4회, 3省(대간·형조) 19회로 나타난다.093)崔承熙, 앞의 책 (1983), 246쪽. 대간의 언론과 관련된 것은 이 책 105∼113쪽과 168∼172쪽 참조. 당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에 대간의 언론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내용은 ① 국왕의 언행을 바로잡기 위한 간쟁언론, ② 관료의 정치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탄핵언론, ③ 時政의 득실을 논박하는 시정언론, ④ 관리의 인사를 바로잡기 위한 인사언론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새 왕조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위하여 왕씨의 제거, 반이성계파의 제거를 위한 언론, 정치기강의 확립을 위한 불법·부정한 관료의 탄핵 등은 이 시기 언관의 중요한 몫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언론은 태조의 왕권확립과 정치적·사회적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조의 왕권에 저촉되는 언론은 용납되지 않았고 강력한 언관탄압이 따랐다.

 태조 재위기간 왕권에 저촉되는 언론으로 파직·유배된 경우는 빈번하였다. 태조 2년 6월에 內竪 李萬을 사형에 처하고 세자빈 柳氏를 사제로 쫓아낸 사건094)≪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6월 계사.이 있었는데, 그 내막을 규명할 것을 요청한 3성의 관원이 모두 유배되었다.095)崔承熙, 앞의 책, 162∼163쪽.
11명이 유배되고 6명은 공신으로서 유배는 면하고 파직되었다.
태조는 왕실의 私事를 3성에서 망론한 것이라고 진노하고 강경한 대응을 하였는데, 이는 왕권의 저촉으로 인식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의 예로서 태조 5년 7월 도성의 축성역을 정지할 것을 청한 간관들을 모두 정직시켰다. 그 10일 후에 태조는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각 도의 군인을 징발하여 축성을 마칠 것을 명령하는 한편 그 가부를 물었을 때 모두 흉년을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태조는 이에 구애받지 않고 강행하여 같은 해 9월에 축성을 마쳤다. 그 동안 대간들은 待命상태에 있다가 12월에야 복직을 명령받았다. 그간 언관의 언론은 정지상태였고 그 후에도 언관의 언론은 크게 위축되었다. 태조 7년 5월에 知中樞院事 李至의 상서에 “지금 간신은 소외되어 전하의 득실과 民情의 휴척을 상달할 수 없습니다”096)≪太祖實錄≫권 14, 태조 7년 윤 5월 병술.라고 한 것은 그간의 사정을 전해준다.

 태조대의 언관의 언론은 국정운영의 한 방법이었으며, 왕권의 강화와 정치 적 안정에 기여하였으나 반면 태조에게 거스리는 언론, 또는 왕권에 손상을 주는 언론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한 언관에 대하여는 정직·파직·유배 등 강경한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 태조대의 이와 같은 국정운영체제는 왕권강 화와 관계있는 것이며 또한 태조의 강력한 왕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종의 재위 2년간은 태조에서 태종으로 넘어가는 과도적 시기로서, 이 시기에 실세가 된 방원에 의하여 국정운영체제의 중요한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종 2년(1400) 4월 사병의 혁파와 함께 도평의사사를 개혁하여 의정부로 고쳤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삼군부의 관원은 삼군부에만 근무하고 의정부에는 합좌하지 못하게 하였다.097)≪定宗實錄≫권 4, 정종 2년 4월 신축. 즉 도평의사사체제에서 의정부체제로의 개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개혁은 방원이 장차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태종대의 국정운영체제는 태종의 왕권안정·강화를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종래에는 태종대의 정치체제를 의정부 중심체제에서 6조직계체제로의 전환으로 보았고 또 그것을 태종의 왕권강화와 연관하여 이해했으나, 태종대의 정치 운영체제가 그처럼 단선적인 것은 아니었다.

 태종 원년(1401) 7월의 관제개혁으로 의정부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門下府를 폐지하고 그 재신을 의정부에 귀속시켰고 三司를 司平府로 개칭하고 합좌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의정부는 합좌기관이 아니라 서정을 총괄하는 관부가 되었다. 의정부는 도평의사사보다 그 관원수가 크게 축소되었고 宰樞합좌의 기능도 제거되었으나 정치권력은 강대하였다. 따라서 태종대에는 의정부의 정치 권력을 약화시키는 노력이 계속되었고 그것은 왕권강화와 관련있는 것이었다.

 정치체제의 변혁은 제도개혁만으로 즉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태종 원년 7월의 관제개혁으로 의정부제가 성립되었으나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도평의사사적인 합좌의 관행이 상당기간 계속되고 있었다. 그 예를 보면, 태종 2년 4월 태종은 內書舍人 李之直, 左正言 田可植이 올린 상소를 三府에 내려 擬議하게 하였다.098)≪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4월 계축.
태종대의 정치운영체제에 관하여는 崔承熙, 앞의 글(1991a), 32∼34쪽 참조.
3부는 의정부·사평부·承樞府를 지칭하는 것이며 ‘下其 疏于三府 擬議’라 한 것은 도평의사사체제하의 문하부·삼사·중추원의 합좌와 같은 형태이다. 3부합좌는 태종 4년까지 계속되고 있다. 태종 4년 4월 3부대신이 모여 號牌制 실시의 가부를 논의하였고 동년 7월에는 도읍에 관 한 일을 3부와 기로에게 논의할 것을 명하였다.

 태종 5년 정월의 관제개혁에서 사평부는 호조에, 승추부는 병조에 귀속시키고, 정부의 서무를 6조에 분속시킴으로써 제도상으로는 3부의 합좌가 사라졌고, 3부라는 용어도 없어졌다. 그러나 합좌의 관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태종 5년 4월에 호조판서 李至 등이 올린 상서를 의정부에 내려 6조·諸君·三軍摠制와 합의하여 보고하게 하였고, 태종 6년 윤 7월에 時弊제거 등 현안문제를 의정부와 前銜耆老·재추가 합좌하여 논의·보고하게 하였다.099)≪太宗實錄≫권 9, 태종 5년 4월 갑술 및 권 12, 태종 6년 윤 7월 무오.
崔承熙, 위의 글, 24쪽.
이와 같이 합좌제적 운영을 계속한 것은 강력한 의정부의 정치권력을 견제·약화시키려는 태종의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왕조시대에 있어서 국정운영의 중요한 방법의 하나가 왕명에 의한 정치였음은 당연한 것이므로 태종대의 정치운영에서 왕명에 의한 것은 생략한다.

 태조대의 소수 재신중심의 정치관행은 태종대에도 계속되었다. 그 예를 보면, 태종 2년 4월에 西北面都巡問使 李彬의 飛報가 도착되자 태종은 그 대책을 義安大君 이화·判承樞府事 趙英茂·朴錫命 등과 의논하였다.100)≪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4월 을묘. 같은 해 9월에 태종은 좌정승 김사형·우정승 이무·판승추부사 조영무와 더불어 동·서북면의 量田문제를 의논하였다.101)≪太宗實錄≫권 4, 태종 2년 9월 신묘. 그 이후에도 그러한 형태는 계속되고 있다. 시기에 따라 총신하는 중신·근신은 약간 변화를 보이는데 하륜·조영무·이숙번·남재·성석인·황희 등이 그러한 인물이다.

 태종도 그 시대의 정치가 자신과 소수의 재신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태종 13년 8월 좌정승 하륜·우정승 조영무·이조판서 이천우·병조판서 이숙번을 인견하였을 때, 하륜 등이 각 사로 하여금 도성수축문제의 가부를 논의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태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와 두세 명의 대신이다. 어찌 각 사에 묻는 것이 옳겠는가”102)≪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8월 정미.라고 하였다. 나라의 정치를 일일이 각 관부에 물어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왕과 몇몇 재신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의정부·6조·대간 및 기타 관부에서 계·상소에 의하여 상달하고, 국왕이 이를 재가하여 시행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태종대의 정치운영체제의 핵심은 태종 14년(1414) 4월까지는 議政府署事制였고, 그 이후는 六曹直啓制였으며 이에 따라 의정부·6조·대간 및 각 관부의 계·상소의 빈도가 다르게 나타났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태종 14년을 전후로 의정부서사제와 6 조직계제를 설정한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태종조 의정부의 계·상소를 통한 정치활동을 보자. 의정부는 태종 14년 4월 6조직계제가 확실히 실시되기 이전에는 서정을 총괄하는 정치권력의 핵심기관이었다. 의정부 대신들은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국왕을 대하여 크고 작은 국정을 직계할 수 있었으므로 상소를 올리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러므로 태종 14년 4월 이전까지의 의정부의 계는 국정을 망라한 것으로서 그 내용은 크게 ① 입법·定制를 위한 계와 ② 시무·시정을 위한 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한 계는 대부분 국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되었다. 또한 의정부에서는 각 관부로부터 보고를 받고 이를 啓聞하기도 하였다.103)韓忠熙,<朝鮮初期 議政府硏究>上(≪韓國史硏究≫31, 1980), 113쪽<표 8>에 의하면, 태종 14년까지 의정부의 啓는 434회로 나타나고 있다. 태종 14년 4월 이후, 의정부의 계는 그 빈도가 크게 감소되고 있으나, 의정부의 최고관부로서의 법제적 위치는 계속 유지되었다. 따라서 의정부는 국가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그 대책을 진언하였으며, 그 정승들은 국왕의 측근에서 계속 국정에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태종 14년 4월 6조직계제 이후에도 의정부의 위상은 계속 높은 것이었다.

 다음 6조의 계를 통한 정치활동을 보자. 태조 원년 7월의 관제에서 6조의 관직과 職掌이 정해졌으나 태조대에는 6조의 정치기관으로서의 위상은 뚜렷하지 못하였고 활동도 미약하였다. 그러한 상태는 정종 2년(1400)에 도평의 사사를 개혁하여 의정부를 설치한 후에도 큰 변동이 없었다. 태종 5년 정월 의 관제개혁에서 6조를 정3품아문에서 정2품아문으로 승격시켰고, 의정부의 서무를 나누어 6조에 귀속시켰다.104)≪太宗實錄≫권 9, 태종 5년 정월 임자. 그 해 3월에는 6조의 직무분장

 과 속아문이 정해졌다. 이와 같은 관제개혁은 태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의도와 관계있는 것이지만, 이로써 의정부의 정치권력이 하루 아침에 약화되고 6조의 정치적 지위가 급격히 상승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태종 8년 정월에 좌정승 成石璘 등의 상언을 좇아 ‘始以議政府庶務 歸之六曹’105)≪太宗實錄≫권 15, 태종 8년 정월 임자.라고 한 것은 그간 의정부서무가 6조에 귀속되지 못하였음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 8년 이후에도 의정부의 서무가 6조에 완전히 귀속되지 못하였음은 태종 14년 4월에 이르러 다시 ‘分政府庶務 歸之六曹’106)≪太宗實錄≫권 27, 태종 14년 4월 경신.라고 한 사실로써 알 수 있다. 태종 5년 정월에 6조 중심체제의 개혁을 기도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온전히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정치체제의 개혁과 6조의 정치활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태종 5년 정월 이전의 6조의 정치활동은 미미하였다.107)韓忠熙, 앞의 글, 119쪽<표 11>참조. 각 조의 장관인 典書(정3품)는 朝啓·啓事에 참여하여도 국왕에게 직계할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따라서 태종 5년 정월 이전에는 각 조에서는 그 조에 관계되는 일을 상소로 올렸고 그것도 드물게 볼 수 있다.

 태종 5년 정월 이후에도 6조의 활동은 이전보다 약간 증가되기는 했으나 아직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과 구별되는 것은 그 조의 일을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국왕에게 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종 5년 4월에 태종은 병조에 대하여 기밀한 일, 친품할 일이 있으면 의정부에 보고하지 말고 직계할 것을 명하였다.108)≪太宗實錄≫권 9, 태종 5년 4월 계미. 이는 6조직계가 태종 5년 4월부터 이루어지고 있음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태종 8년 이후는 그 이전에 비하여 6조의 활동이 증가하고 있으며, 6조에서는 대부분 의정부를 통하지 않고 직계하고 있다. 6조직계는 태종 14년 4월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태종 5년 4월부터 시작되었고 8년 이후에는 더욱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태종 14년 4월까지는 의정부에서 6조에 대한 감독권을 장악하고 있었고109)≪太宗實錄≫권 15, 태종 8년 정월 임자. 대간 및 각 사에서 올린 상소·계도 대개 의정부에 내려 심의하게 하였으므로 의정부는 정치권력의 핵심기관이었다. 태종 14년(1414) 4월 이후 의정부는 그 서무를 실제로 6조에 분속시켰으므로 그 정치권력도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반면 6조는 그 직사가 확대되었고 완전한 6조직계제가 이뤄져 정치력도 강화되었다. 이로써 6조는 국정 전반에 걸쳐 활발한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6조직계제하에서 6조의 계는 중요한 정치활동의 하나였다. 6조는 각각 관장사무를 국왕에게 계하고 재결을 받아 시행하였다. 태종 14년 이후 의정부의 계는 현저하게 감소하였고 6조의 계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계의 내용은 국정 전반에 걸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대간의 상소는 태종대 국정운영의 중요한 일부였으며 정치체제의 변동과 관계없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 대간의 언론은 사헌부와 사간원이 따로 하기도 하였고 臺諫合辭 또는 대간·형조(3성)합사로 하기도 하였다.

 태종대에는 언관에 대한 탄압, 언론에 대한 봉쇄가 잦았다. 그러나 모든 언론이 탄압된 것은 물론 아니었고, 왕권에 저촉되는 언론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국정을 위한 건설적인 언론, 왕권강화에 도움이 되는 언론이 충분히 수용되었음은 물론이다. 태종은 반왕세력을 제거하는 데 대간을 이용하였으므로 대간의 상소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태종대 대간의 언론활동은 총 875회에 달하며 그 내용은 크게 간쟁(98회)·탄핵(581회)·시정(184회)·인사(8회)·척불(4회)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110)태종대 臺諫의 上疏에 관하여는 崔承熙, 앞의 책, 115∼127·174∼184·252∼254쪽 참조. 간쟁은 사간원이 중심이 되었으나 사헌부에서도 하였고 양사가 함께 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은 왕권에 저촉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대간은 많은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탄핵은 사헌부에서 주도하였으나 때로 사간원에서도 가담하였고, 대간 합사도 적지 않았다. 탄핵은 관원의 부정·불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탄핵의 내용은 반역·모반·불충·불경·부정·불법·과실·월직·패상·간통·범장·수뢰·분경·위조 등 다양하였다. 탄핵언론은 이 시기 관료체제의 기강을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시정에 관한 언론은 중앙정치·지방정치·인사제도·관직제도·재정경제·군사·사법·과거·교육·의례·토목영선·사회민생 등 국정 전반에 걸쳤다. 인사에 관한 언론은 부당한 인사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그 언론은 많지 않았으나 관료제도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척불언론은 당시 억불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으므로 그 언론은 많지 않았다.

 태종대 대간의 상소는 그 시대의 정치의 내용과 성격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다. 의정부서사제하에서도 대간의 상소는 의정부의 논의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고, 태종 14년 이후에 6曹擬議의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국정운영에 있어서 대간언론의 중요성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중외의 각 사와 使星의 啓聞도 태종대 국정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일부였다. 尙瑞司·巡禁司·辨正都監 등에서 그 관부와 관계되는 일을 직접 계하여 재가를 받아 시행하였고, 한성부·각 도의 관찰사도 그 관장하는 일이나 개혁해야 할 일 등을 계문하여 재가를 받아 시행했다. 지방에 파견된 巡問使·敬差官 등도 그들에게 부과된 사명에 따라 그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계문하고 있다.

 태종대 국정운영의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각 사에서 올린 상소·상언을 의정부에 내려 심의하게 한 후 이를 왕이 재결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다. 의정부서사제가 그것이며, 이 제도는 태종 14년 4월 6조직계제 실시 이전까지 계속되면서 의정부에 정치권력이 집중되게 하였고 반면 왕권 강화에는 불리한 제도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태종 14년 이후 의정부 단독의 擬議는 없어졌으나 그 대신 ① 6조의의 ② 의정부·6조의의 ③ 의정부·6조·대간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 우선 의정부의의를 보자. 태종은 의정부·6조·대간 등의 계·상소 가운데 상당부분을 직접 재결하였으나 중요한 문제는 일단 의정부에 내려 의의하게 한 후 시행 여부를 결정하였다. 의정부의 의의는 태종 원년 4월부터 보인다. 태종은 즉위년 12월 하순에 ‘中外大小臣僚閑良耆老’에게 求言敎書를 내린 바 있는데, 이에 따라 올린 진언을 의정부에 내려 의의하여 보고하도록 명하였다.111)≪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4월 무오. 그 채택여부를 의정부의 의의를 참작하여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대간이나 그 밖에 관부에서 올린 시정·시무관계의 상소 가

 운데 중요한 문제는 의정부에 내려 논의·심의하게 하고 그것을 참작하여 실시여부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번다한 국정을 국왕이 모두 파악할 수 없는 일이므로 신하들의 자문을 받아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종 14년 4월 이전에는 그 자문을 의정부에서 전담하는 체제였고, 태종 14년 4월 이후에는 의정부 단독의 의의가 아니라 6조 또는 6조·대간과 함께 논의하는 방식으로 존속되었으니 의정부의 정치권력은 그만큼 저하되었다고 하겠다.

 의정부의 단독 의의 대신 새로 시작된 것이 6조의의이다. 6조의의는 태종 14년 4월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각 관부의 상소 가운데 중요한 문제를 6조 에 내려 논의·심의하게 한 후 참작하여 그 문제의 채택·실시여부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6조의의는 6조판서(또는 6조당상)의 합좌에 의한 의의로 이해된다. 의정부의의 대신 6조의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일단 6조의 정치권력 은 강화되고 의정부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의정부의 단독 의의는 태종 14년 이후 사라졌으나 의정부는 계속 최고관부로서 존속하였으므로 그 대신들이 국정논의에 전혀 참여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의정부는 6조와 함께 국정에 대한 의의에 참여하였다. 즉 당시의 정치현안을 의정부·6조에 내려 심의하게 하고 채택여부에 참고하였던 것이다. 태종 14년 이후 의정부 단독 의의에서 6조와의 동의가 이루어진 것은 의정부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의정부·6조·대간의 동의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정치의 핵심기관들이 합의하는 체제는 태종 14년 이후 의정부의 정치적 권한과 위상이 약화된 상태에서 나타났다. 태종 7년 2월에 의정부·6조·대간에 ‘屯田 煙戶米’의 편부를 논의하게 한 일이 있다. 이 경우는 모든 관원이 시행이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오직 정승 하륜만이 시행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다시 논의시킨 것이었다.112)≪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2월 임진. 의정부·6조·대간에게 국정문제를 함께 논의하게 한 것은 대개 태종 14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 공신, 摠制, 承政院까지도 동의하게 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이는 그 이전보다 국정논의에 참여하는 관부와 관원의 수가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태종 14년 이후 의정부를 비롯하여 6조·대간·승정원·공신·총재 등 정치의 중심이 되었던 여러 관부와

 그 관원들이 국정논의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정운영체제의 변화는 이전에 정치권력이 의정부에 집중되었던 체제에서 여러 관부로의 권력분산을 의미한다. 태종은 의정부 또는 6조 등에 의하여 정치권력이 천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의정부·6조·대간·승정원·공신·총재 등에 정치권력을 분산시키는 정책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113)崔承熙, 앞의 글(1991a), 31∼34쪽. 이와 같은 국정운영방식은 왕정에 있어서 발전적인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래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태종 14년 6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의정부의 정치권력을 약화시켰고 반면 6조의 정치권력이 강화되었다고 이해한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崔承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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