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2. 유교정치의 진전
  • 4) 편찬사업의 성행

4) 편찬사업의 성행

 한 시대의 문화수준은 그 시대에 이루어진 편찬물(도서)의 질과 양으로써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시대의 찬란했던 문화는 그 시대에 활발했던 편찬사업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여도 좋을 것이다. 편찬사업을 통하여 문화적·사상적인 정리가 이루어졌으며 정치·제도의 기틀이 잡혔던 것이다. 당시 편찬사업의 주체는 세종이 육성한 집현전과 그 관원들이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편찬사업은 집현전이 학술적 기관으로 정착되고 그 학자들의 학문적 수준이 제고된 세종 1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 당시 편찬사업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며 그 의의는 무엇인가. 이를 살피기 위하여 먼저 중요한 편찬물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孝行錄≫ (세종 10년:1428,<집현전>) ②≪農事直說≫ (세종 11년:1429,<鄭招 등>) ③≪太宗實錄≫ (세종 13년:1431,<17:2>) ④≪三綱行實≫ (세종 14년:1432,<집현전>) ⑤≪八道地理志≫ (세종 14년;1432,<尹淮 등>) ⑥≪無寃錄註解≫ (세종 15년:1433,<崔致雲 등>) ⑦≪鄕藥集成≫ (세종 15년:1433,<3:1>) ⑧≪資治通鑑訓義≫ (세종 16년:1434,<53:22>) ⑨≪將鑑博義所載諸將事實≫ (세종 19년:1437,<집현전>) ⑩≪韓柳文註釋≫ (세종 20년:1438,<4:3>) ⑪≪國語補正≫ (세종 22년:1440,<집현전>) ⑫≪明皇誡鑑≫ (세종 23년:1441,<3:2>) ⑬≪絲綸全集≫ (세종 24년:1442,<집현전>) ⑭≪杜詩諸家註釋≫ (세종 25년:1443,<집현전>) ⑮≪韻會諺譯≫ (세종 26년:1444,<9:5>) (16)≪五禮儀注≫ (세종 26년:1444,<7:2>) (17)≪七政算內外篇≫ (세종 26년:1444,<2?:1>) (18)≪治平要覽≫ (세종 27년:1445,<집현전>) (19)≪龍飛御天歌≫ (세종 27년:1445,<鄭麟趾 등>) (20)≪龍飛御天歌註解≫ (세종 27년:1445,<8:6>) (21)≪醫方類聚≫ (세종 27년:1445,<10:5>) (22)≪訓民正音≫ (세종 28년;1446,<8:6>) (23)≪東國正韻≫ (세종 29년;1447,<9:5>) (24)≪四書諺解≫ (세종 30년:1448,<집현전>) (25)≪高麗史≫ (세종 31년:1449, 문종 원년완성<28:12>) (26)≪大學衍義註釋≫ (문종 원년:1451,<집현전>) (27)≪高麗史節要≫ (문종 2년:1452,<18:8>) (28)≪歷代兵要≫ (단종 원년:1453,<집현전>) (29)<朝鮮全圖><道·州郡圖> (단종 원년:1453,<1:1>) (30)≪世宗實錄≫ (단종 2년:1454,<57:11>) (31)≪世宗實錄地理志≫ (단종 2년:1454,<위와 같음>) (32)≪貞觀政要註≫ (세조 원년:1456,<2:2>) (33)≪文宗實錄≫ (세조 원년:1456,<48:9>) (34)≪世宗朝鮮定儀注≫ (세조 2년:1457,<1:1>) (35)≪曆象集≫ (세종 연간:<李純之>)  *<집현전>은 집현전에서 편찬한 것을,< >안의 성명은 편찬자를,< >안에 대비한 숫자는 편찬에 참여한 전체인원수 대 집현전 관원수를 표시한 것임.

 위의 도서들은 편찬·주해하여 간행한 것으로서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 역사서, ㉯ 유교경서, ㉰ 유교윤리·의례, ㉱ 중국법률, ㉲ 중국문학, ㉳ 중국정치귀감서, ㉴ 병서관계, ㉵ 훈민정음·음운·언역관계, ㉶ 지리관계, ㉷ 천문·曆數관계, ㉸ 의약관계, ㉹ 농업기술관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역사서는 중국역사에 관한 것과 우리 나라 역사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우리 역사에 관한 것으로는≪고려사≫·≪고려사절요≫·≪태종실록≫·≪세종실록≫·≪문종실록≫의 편찬을 들 수 있다. 역대실록은 왕이 죽은 후에 편찬하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으나≪고려사≫의 편찬은 매우 중요한 뜻이 있다.≪고려사≫는 조선 개국초에 정도전·조준 등에 명하여 편찬하게 하였으나 곡필이 많아 改修가 불가피하였다. 태종대에 개수를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종 6년에≪讎校高麗史≫가 柳觀·尹淮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나 그 내용이 소략하고 탈루가 많아 또 개수를 명하여 세종 24년에≪高麗史全文≫이 權踶·安止 등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러나 또 왜곡한 사실이 드러나 세종 31년에 金宗瑞·鄭隣趾 등에게 개찬을 명하여 문종 원년(1451)에 완성을 본 것이≪고려사≫이다. 세종이≪고려사≫편찬에 얼마나 신중을 기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으며, 특히≪고려사≫편찬이 대부분 집현전관과 그 출신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문장이나 내용이 훌륭해질 수 있었다.≪고려사≫의 편찬은 다만 전 왕조의 역사·정치·제도·문화의 정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그것을 정리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였다.≪고려사≫를 편찬한 직후 왕의 열람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새로 편년체로 편찬한 것이≪고려사절요≫인데, 두 사서는 정치귀감서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오늘날에는 고려사연구의 기본사료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중국역사에 관한 것으로는≪자치통감훈의≫와≪국어보정≫이 있다. 세종은 사서를 대단히 중하게 여겼으나 방대한 중국의 사서를 모두 읽을 시간도 없으려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중국의 통사인≪자치통감≫의 열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사서의 필요는 중국 역대의 ‘治亂之迹’을

 박람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고 후세에도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자치통감≫이 가장 적당한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자치통감훈의≫의 편찬을 위하여 집현전학자들은 모두 동원되었고 또 이를 위하여 집현전에 6명을 증원하였으며 다른 관아의 학자(관원)들까지 동원하였다(총 53명). 3년이나 걸쳐 완성한 이 사업을 위하여 세종은 밤이 깊도록 친히 교정을 보았으며 경연까지도 중지하였다. 훌륭한 유교정치를 펴기 위하여는 훌륭한 귀감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 유교경서에 관한 것으로는≪사서언해≫와≪대학연의주석≫이 있다. 세종이 경연에서 강독한 책에는 4서(論語·孟子·大學·中庸)와 5경(詩經·書經·周易·禮記·春秋)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특히≪대학연의≫와≪성리대전≫등도 완독한 서목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135)南智大,<朝鮮初期의 經筵制度>(≪韓國史論≫6, 서울大 國史學科, 1980), 170쪽. 신·구의 유학을 모두 중요시한 것을 볼 수 있다. 4서와 5경은 유자의 필독서이지만, 연해와 주석을 편찬한 것을 보면 세종은 4서와≪대학연의≫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듯 보인다.

 ㉰ 유교윤리·의례에 관한 것으로는≪효행록≫·≪삼강행실≫·≪오례의주≫·≪세종조상정의주≫등의 편찬이 있었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유교사회·유교정치를 지향하는 조선 초기에 있어서 당연한 사업이었다.≪효행록≫과≪삼강행실≫은 백성들에게 유교윤리를 깨우쳐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 밖의 것들은 국가의 유교적 의례의 정리사업이었다. 이와 같은 유교윤리서의 편찬·보급과 의례의 정리는 유교정치의 기초작업이 되는 것이었다.

 ㉱ 중국법률에 관한 것으로는≪무원록주해≫와≪사륜전집≫의 편찬이 있다.≪무원록≫은 1341년 원나라 王與의 저작으로, 崔致雲이 주해하여 간행한 것이며, 그 목적은 백성들이 원통한 일이 없도록 형률·법률을 선용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사륜전집≫은 진·한으로부터 명에 이르는 동안의 制誥·詔勅을 集錄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 법률서의 편찬·간행은 정치의 참고자료로서 또는 억울한 사람이 없는 형정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 중국문학관계로는≪한유문주석≫과≪두시제가주석≫이 있다. 세종은 韓愈·柳宗元의 文과 杜甫의 詩와 같은 시·문이 중국문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며 유신들의 교양에 유익한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 중국정치귀감서로서는≪명황계감≫·≪치평요람≫·≪정관정요주≫등의 편찬이 있다.≪명황계감≫은 당 玄宗의 治亂之迹을 엮은 것이었고,≪치평요람≫은 주에서 원에 이르는 중국역사와 기자조선에서 고려에 이르는 우리 나라 역사 가운데 국가의 흥망과 군신의 邪正과 정교·풍속·윤리 등 각 방면에서 권장하고 징계할 만한 것을 발췌하여 엮어놓은 것이다.≪정관정요≫는 당 태종이 신하들과 정치를 의논한 것을 40편으로 분류하여 엮은 것으로서 정치의 교과서라 할 만한 정치귀감서이다. 모두 정치의 참고서·귀감서로서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노력의 일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치평요람≫은 학자 수십 명을 뽑아 집현전에 모여 5년이나 걸려 완성한 큰 사업이었다.

 ㉴ 병서관계로는≪장감박의소재 제장사실≫과≪역대병요≫를 편찬하였다. 軍談·武勇·兵略에 관한 지식은 국방·군사상 중요한 것이었다.

 ㉵ 훈민정음·음운·언역관계로≪운회언역≫·≪사서언해≫·≪용비어천가≫및 그 주해·훈민정음 창제·≪동국정운≫등이 있다. 이러한 편찬·주해·언역사업은 모두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사업으로 거의 집현전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목되는 일은 이 일련의 사업에 동원된 집현전 학자들은 교리 崔恒·부교리 朴彭年·부수찬 申叔舟·成三問·李善老·李塏 등 소장학자들이었고 부제학 崔萬理·직제학 辛碩祖·직전 金汶·응교 鄭昌孫 등 상위 직위의 중진학자들은 세종 26년(1444) 2월에 훈민정음의 제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사실이다.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 있는 여러 사업은 소장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우리 민족문화 발전에 초석이 되었고 우리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자랑할 만한 것임은 재언할 필요도 없다.≪운회언역≫과≪동국정운≫은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하여 세종의 음운에 대한 깊은 연구와 관심의 소산이었다.≪용비어천가≫와 그 주해의 편찬은 훈민정음의 반포에 앞서 그 실용화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동시에 왕실 조상들의 업적을 칭송하여 개국의 정당성과 왕실의 전통과 권위를 세우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 지리관계로는≪팔도지리지≫·<朝鮮全圖>·<各道別圖>·<州郡別圖>와≪세종실록지리지≫의 편찬이 있다.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제작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각 지방의 지세·특성·물산·인적 자원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정치의 기본이다. 국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수취체제를 확립하여 국가의 정치적·재정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지도와 지리지의 편찬은 필요한 사업이었다.

 ㉷ 천문·역수관계로는≪칠정산내외편≫과≪역상집≫이 있다. 세종이 농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천문기계의 제작에도 힘을 써 大簡儀·小簡儀·渾儀·日晷 등과 측우기를 제작하게 한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천문·역수에 관하여 관심이 컸던 것은 그것이 농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천문의 변화가 왕정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천재지변을 왕정의 잘못을 견책하는 징후로 생각했기 때문에 선정을 펴고자 하는 군주로서는 천문의 변화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위의 편찬은 천문·역수의 연구와 정리를 위한 것이었으며, 조선시대 천문학의 수준을 높이 올려 놓은 성과였던 것이다.

 ㉸ 의약관계로는≪향약집성≫과≪의방유취≫가 있다. 당시 질병이 성행하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단히 큰 문제였다. 백성들이 당하는 질병의 고통 을 덜어주는 일은 선정을 베풀고자 하는 군주로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다.≪향약집성≫은 85권 30책,≪의방유취≫는 265권 264책이나 되는 방대한 편찬물로서,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하여 투약·치료기술을 집대성한 것이며 조선의 의·약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획기적인 편찬사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 농업기술관계로는≪농사직설≫이 있다. 이 책은 세종이 각 도 관찰사로 하여금 경험이 많은 독농가들로부터 농업기술을 수집하게 하여 그 자료를 편찬한 것이며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서이다. 국가의 경제가 완전히 농업에 의존하던 당시에 농업기술의 발전은 국가의 부강 여부가 달려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 책은 세종의 농업진흥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주로 세종시대에 이루어진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정치·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 등 각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이 방대하고 수준높은 편찬사업을 통하여 정치·문화·사상이 총정리되었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그 시대의 문화가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을라갔다. 국가의 정치적 기반이 이 사업을 통하여 더욱 다져졌고 문화의 황금시대를 초래했다. 특히 국가의 유교적 의례의 정리와 경서의 언해,≪삼강행실≫·≪효행록≫의 반행은 유교사상·유교윤리를 더욱 널리 보급하여 유교사회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위와 같은 중대한 과업을 담당한 주체는 집현전과 그 학자들이었다. 위에서 열거한 35개의 편찬물 가운데 집현전 현직학자가 참여하지 않은 것은≪농사직설≫·≪무원록주해≫·≪역상집≫등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집현전에 의하여 또는 집현전 학자가 중심이 되어 이룩한 것이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양성과 학문진흥을 위하여 쏟은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그 후 성종대에 이루어진≪경국대전≫·≪국조오례의≫·≪동국통감≫·≪동문선≫등도 그 편찬을 주관한 인물들이 모두 집현전출신의 학자관료였다는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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