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1)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그에 대한 반발
  • (2)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대한 반발

(2)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대한 반발

 수양대군의 집권에 대한 최초의 반발은 계유정난 직후 咸吉道兵馬都節制使인 이징옥에 의해 일어났다. 이징옥은 세종 4년(1422)에 慶源鎭僉節制使가 된 이후 세종 25년까지 그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평안·함길도의 병마도절제사 이하 각급 관직을 역임하면서, 김종서와 쌍벽이 되어 6진을 개척하고 야인을 방어하였다.231)金成俊,<李澄玉과 六鎭>(≪史叢≫12·13, 高麗大, 1968), 473∼493쪽. 이어 문종 즉위년(1450) 8월에는 다시 함길도병마도절제사가 되었고, 계유정난 때에는 崇政大夫判中樞府事兼咸吉道兵馬都節制使로서 동북지방을 진무하고 있었다.

 수양대군과 그 일파는 이징옥이 김종서의 당이라 하여 그의 제거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정변 당일 비밀리에 이징옥을 파면하고 朴好文을 함길도병마도절제사에 임명한 후 그로 하여금 이징옥을 경사로 압송하여 처단하려 하였다. 이징옥은 자신의 제거계획을 눈치채고 박호문을 참살한 후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을 규합하여 독립할 것을 도모하였다. 북으로 진군하여 종성에 머무르면서 도읍을 五國城에 정하고 大金皇帝를 자칭하였으며, 여진족에 격문을 보내 후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던 중 그를 수종한 護軍 李行儉과 鍾城判官 鄭種의 야습을 받고 피살되었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 등은 계유정난 이후 세조 2년(1456)에 걸쳐 세조의 집현전관 융화책에 따라 공신에 책록되고 승지와 6조의 참판 등에까지 오르는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비판의식이 예리하고 유교적 명분론이 몸에 배인 이들로서는 계유정난은 방관하였지만,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즉위는 수긍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등의 집현전 출신 관인과 군권을 관장한 成勝·兪應孚·金文起 및 단종의 외숙인 權自愼 등은 단종의 양위 직후부터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고, 단종의 내락을 받았다. 이어 세조 2년 6월에 상왕·왕·세자가 창덕궁에 임석하여 세조의 誥命을 가지고 온 명사 尹鳳 등을 위한 환영연 자리에서 왕과 세자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거사 당일에 직접 세조를 참살하기로 된 別雲劍이 폐지되고 세자가 불참함에 따라, 거사의 완전한 성공을 위하여 일단 후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이 직후 金礩이 거사의 성공에 회의를 품고 그 내용을 장인인 議政府左贊成 鄭昌孫에게 고하였고, 정창손이 이를 세조에게 고함으로써 성삼문 등이 伏誅되고 이 거사는 좌절되었다. 이 사건을「死六臣事件」이라 하며 이 여파로 상왕은 魯山君으로 강봉되었고, 곧 ‘폐서인’ 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세조 3년에 다시 錦城大君 등의 단종복위기도가 있었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6남으로 수양대군과 대립하면서 단종의 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의 배척을 받고 경기도 朔寧에 유배되었고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사건으로 경상도 順興에 이배되었는데, 이곳에서 순흥부사 李甫欽과 품관 安順孫 등 영남유생과 단종복위를 모의하였다. 즉 고을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거사 준비 중에 순흥관노의 고발로 말미암아 사건이 드러났고, 금성대군 등은 사사되었다. 아울러 이에 연루되어 단종과 단종국구였던 宋玹壽도 사사되었다.

 세조는 2차에 걸친 단종복위사건을 계기로 왕권을 크게 위협하였던 단종 및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유신과 단종 측근들을 제거하였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국왕 중심의 강력한 정치를 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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