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4. 4군 6진의 개척
  • 2) 압록강 중상류방면 영토개척
  • (2) 4군 철폐와 군사지역화

가. 철폐론과 조종구지의식

 4군 설치의 의미는 여진 내습에 대한 적극 대응책에서 찾아진다. 그리고 국초 이래 세종대까지는 압록강 상류지역의 국토 경영도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군 설치지역은 본래 벽지여서 교통이 불편하였고 방위하기에도 매우 어려웠으며, 토지가 척박한 데다가 여진과의 충돌이 그칠 사이가 없는 접경지역이었다.

 4군의 연변구자 중에서도 유지하기 가장 어려운 곳은 조명간구자라고 할수 있지만, 4군 전체가 지형적으로 북계 중 가장 깊숙히 적지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여진의 침입 요해처가 되는 곳이 무려 24개소나321)≪輿地圖書≫平安道江界府에서는, 彼邊賊路로 다음 24개처를 명기하고 있다.
大食鹽洞·門巖洞………兩路渡江入豆之洞把守境
城洞·三洞·直洞·北水洞………四路渡江入竹田把守境
大北水洞·小食鹽洞………兩路渡江入中江把守境
會養洞·伐草嶺·大巖洞·小巖洞·板乃洞………五路渡江入麻轉嶺境
田尙祿接戰洞·羅仕立接戰洞·河加乙應接戰洞·李順接戰洞………四路渡江入梨嶺境
拒柴項洞………渡江入滿浦境
介也之洞………渡江入伐登境
仇郎哈洞·古道水洞·細洞………三路渡江入高山里境
野土里·長洞………兩路渡江入甘湯嶺
되었다. 이 점으로 보아 4군지역은 여진에서는 침입하기가 쉬웠던 데 비해 방어하기에는 매우 곤란한 위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당시 4군 연변의 수비는 강계부진관 소관의 神光·平南·馬馬海·楸坡·從浦·上土·夞怪·滿浦·伐登·高山里鎭 중에서 신광·평남진을 제외한 진에서 담당하였다. 각 진의 군사들은 주로 남도지방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이들은 赴防 길에 이미 지쳐 버리기 일쑤여서 적의 예봉과 맞닥뜨리기도 전에 기세가 꺾이게 마련이었고, 지형상 군량미를 운반하는 우마를 중도에서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한때 군량미 운반의 어려움을 덜고자 대사헌 李叔□가 압록강을 이용한 수운을 건의한 바도 있지만,322)≪世宗實錄≫권 67, 세종 17년 3월 갑술. 여진의 약탈이 염려되어 실현되지 못하였다.

 또한 연변지방 거주 인민들도 고역에 시달렸다. 축성과 입보, 그 밖의 노역부과는 물론이지만, 가장 큰 고통은 여진인들에게 인민·우마·양식을 약탈당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땅을 버리고 유리하는 자들이 생겨 평안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세종 말년에는 평안도의 연속되는 기근과 함께 인민들의 고통이 극심하였다.

 이와 같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과 세종의 적극적인 북방개척 의지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사실 세종의 당초 계획은 “변두리로 떨어져 있는 땅을 버리고 방어가 편리한 곳으로 入守코자 한 바 있다”고 하였듯이 방수가 편리한 곳이었으나 “조종의 강역은 가벼이 버릴 수 없는 곳이므로, 募兵賞職함으로써 연변 방비를 충실히 하도록 시도할 것”323)≪世宗實錄≫권 117, 세종 29년 7월 정사.이라고 하여 연변 수비를 지지하여 개척의 성과를 온전히 하려는 의지를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다.

 분명한 것은 전시대의 영토의식이란, 영토를 왕실 재산의 한 형태와 같이 파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의식은 ‘祖宗舊地는 不可縮’이라는 데로 연결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한편 연변지방에 거주하는 둔전병적인 거주민으로서도 실효를 보장할 수 없었으므로, 이제 募兵賞職의 변통론이 제기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이런 의지 때문에 세종 재위기간 중에는 4군 철폐 주장이 없었으며, 다만 防守가 곤란한 점을 들어 연변 한 두개의 口子를 철폐하는 데 불과한 제안만이 있었다.

 4군 철폐문제가 크게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문종이 즉위하면서부터이다. 문종 즉위년(1450) 8월, 평안도 연변구자 민호와 군병의 혁파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우예 이북의 3군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 논리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324)≪文宗實錄≫권 3, 문종 즉위년 8월 정유.

 첫째, 지리적으로 적지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척박하여 백성들이 살기 어렵다.

 둘째, 군사적으로 남도 군사의 부방에 따른 폐단이 많다.

 셋째, 3군을 폐지한다 해도 압록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여진족이 입거하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 국토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근거는 현실적 상황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논리는 당시의 확고한 ‘舊地’의식의 벽에 부딪혔다. 즉 도체찰사 皇甫仁의 종사관으로서 북방 개척에 종사한 바 있는 좌승지 鄭而漢은 “北境의 邊備는 오로지 세종의 聖謨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국토를 넓히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조종의 봉강을 줄일 수 있겠는가. 비록 촌토라고 줄일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당시의 국토는 왕실의 소유지로서 파악되어 조종구지의식이 강하였던 것이다. 문종도 “일찍이 세종이 布置한 일인데, 그 고수책을 의논하지 않고 도리어 폐지책을 주장하는가”라고 하여, 3군 폐지론은 철회되었다.325)위와 같음.

 3군 철폐론이 제기되었던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3군 철폐문제에 대해 북방영토 개척에 공적이 큰 金宗瑞가 가담한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대륙정세의 변동과 관계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326)李仁榮,<廢四郡問題의 管見)(≪韓國滿洲關係史의 硏究≫, 乙酉文化社, 1954). 이 무렵 몽고족의 瓦刺[오이라트]部가 북방에서 맹위를 떨쳐 그 세력이 여진족에 미치게 되고, 또 그 여파가 조선에도 미치게 될 위험이 있었다. 즉 오이라트의 여진족 공략의 영향으로 建州衛 추장 이만주·童昌·童凡察 등이 대거 조선으로 몰려 올 위험이 있었다.

 압록강 연변 경영에 있어서 군읍과 小堡의 설치는 행정과 군사적 체계를 최소한으로 조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이라트의 활동이 알려

 지자 압록강 연변의 방어책은 크게 바뀔 수밖에 없었다. 즉 세종 29년(1447)에 연변의 군읍을 江界道와 朔川道로 나누어 2품 이상의 절제사를 두고, 도절제사지휘체제로써 연변구자를 통합 방수하는 명령체계를 채용하게 되었다.327)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都節制使營(寧邊)─江界道(節制使)-渭原·慈城·虞芮·閭延·茂昌
          └朔川道(節制使)-理山·碧團·昌城·定寧·義州·麟山

 이러한 군사 명령체계는 소규모의 방어체제인 만호-구자체제를 그보다 상위단위인 이른바 중익·좌익·우익의 3익체제로 개편한 것으로서 적의 대거침공에 대해 공동 대처하는 방어체제이다. 세종 30년 자성군의 西鮮口子의 만호, 문종 즉위년 태일·滿浦口子의 만호 폐지는 바로 이러한 방어체제의 전환을 의미하며, 동시에 4군을 철폐하는 시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종 즉위년 7월, 명으로부터 이만주·동범찰 등 15,000여 명이 요동으로침입하였는데, 이들이 곧 조선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음을 통보해 왔고, 대내적으로도 평안도는 축성·방수·기근 등으로 극도로 피폐된 상태였다. 이같은 대내외적 상황을 감안할 때, 평안도 방면의 방비계획은 급박한 현안문제로 대두되었다.

 이같은 당시의 대내외적 상황을 반영하여 3군의 철폐론이 강하게 제기되었던 것이다. 문종 즉위년 8월, 河演 등은 우예 이북 3군의 철폐를 주장하였고, 김종서도 이 철폐 주장에 가담하였다. 동년 9월에는 판중추부사 韓確이 여연·무창의 철폐를 주장하였으나 薰豆堡의 만호를 철폐하는 데 그쳤고, 이듬해에는 예조참판 朴以昌이 철폐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優納하는 데 그쳤다. 당시 상황에 대처하는 3군의 철폐론은 ‘寸土라도 줄일 수 없다’고 하는 강한 영토 계승의식에 부딪혀 결행되지 못한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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