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4. 4군 6진의 개척
  • 4) 함길·평안도에의 사민입거
  • (3) 평안도에의 사민입거

(3) 평안도에의 사민입거

 평안도의 압록강 灣曲지역을 향하여 영토를 넓혀가던 고려 말기부터, 이 지역에 사민입거가 시작되었다. 조선왕조의 태조대부터 세종 초기까지는 함길도에 여진의 침입이 계속되어, 국가적인 사민입거가 동북지방에 집중되었다. 여진의 침입은 세종대에 이르러서 차츰 함길도보다 평안도에 많아졌고, 이에 따라 그동안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 방어에 더욱 힘을 기울였던 함길도에 뒤이어 평안도에 대한 방어조치가 보다 구체화되어 갔다.

 평안도에 민호를 입거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이미 세종 11년(1429) 8월에 입법화되었다.388)≪世宗實錄≫권 45, 세종 11년 8월 을미. 이때 세종은 평안도가 명과 접경지역인데도 민호가 희소하므로 충청·경상·전라 지역의 민호를 이주시킴으로써 후환에 대비하고자하였다. 이러한 입법조처에도 불구하고 평안도의 신개척지에 대한 사민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고,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친 후에야 실행에 옮겨졌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역시 여진의 대규모 침략이었다. 즉 세종 17년 정월에 오랑캐 2,700騎가 閭延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389)≪世宗實錄≫권 67, 세종 17년 정월 경인·3월 경자·신축. 이를 계기로 비로소 평안도에의 사민입거가 본격적으로 논의·준비되었으니 그 일차적인 목표이자 궁극적인 목표는 “强壯을 뽑아 모아 邊疆을 채워 土兵을 삼고 그들을 鄕弓手라 부르며, 침구가 있으면 대적해 싸우고 물러가면 경작에 종사케 하는 옛 법을 모방하여, 사민입거함으로써 鄕兵을 만든다”390)≪世宗實錄≫권 67, 세종 17년 3월 신축.는 것이었다. 이미 같은 해 7월에 皇甫仁을 파견하여 사민입거지를 물색케 하고, 여연군을 부로 승격시켜 진을 두었다.391)≪世宗實錄≫권 69, 세종 17년 7월 병신·8월 신축.

 이듬해 9월에 이르러서야 결정된 사민입거의 규모는 210호로서, 대상은 평안남도의 민호이고, 사민입거 대상지는 여연·江界·理山·碧潼·昌城 등의 압록강 중류 만곡처 변경지대였다.392)≪世宗實錄≫권 74, 세종 18년 9월 기해. 실제로 사민입거가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한 것은 세종 19년 정월에 濟用副正 朴根을 보내어 입거민호의 추쇄에 종사케 한 데서 비롯되었다. 민호입거에 이어서 평안남도의 향리들도 변경지역의 고을마다 추쇄되어 여연과 자성 등에 입거케 되었는데,393)≪世宗實錄≫권 75, 세종 18년 10월 무인·권 76, 세종 19년 정월 정유·2월 을해 및 권 78, 세종 19년 8월 병진. 이를 민호와 합산하면 1차 사민의 규모는 최대 261호에 달하였다.

 평안도에의 1차 사민이 있은 이후, 세종 19년 12월에 또다시 야인 3,000기가 벽동에 침입하는 큰 사건이 있었다. 이에 자극되어 세종 20년 5월에는 대규모의 사민입거가 있게 되었다. 이것은 세종대의 평안도에의 제2차 사민입거로서 추쇄는 연변 6읍(여연·자성·강계·이산·벽동·창성)에 입거키 위해 34읍에서 많게는 200호, 작게는 4호에 이르기까지 뽑혔다. 이 때의 1호는 장정 3∼4명 이상의 有實戶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 부녀자와 노약자를 계산하면 호당 인구는 15인에 달한다. 총 1,000호 약 15,000명의 인구가 8차례로 나뉘어 이주하게 된 것이다.394)≪世宗實錄≫권 81, 세종 20년 5월 임진.

 이러한 대규모의 사민입거는 세종 20년에 계획되어395)≪世宗實錄≫권 80, 세종 20년 정월 갑오. 세종 22년까지 이루어졌다. 세종 21년 10월에 700호가 입거되었고, 세종 22년 3월에 이르러 도체찰사 황보인의 사목에 새로 입거한 인물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세종 20년에 입거계획을 주관하였던 박근이 이 때까지도 여전히 경차관으로 입거사무를 맡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396)≪世宗實錄≫권 87, 세종 21년 10월 정유 및 권 88, 세종 22년 3월 을사. 박근은 이 때 입거인에게 元居人의 熟田을 나누어 주되 원거인의 경작지가 10결 이상이면 3결, 7∼8결 이상은 2결, 5∼6결 이상은 1결, 3∼4결은 제외하며, 원거인은 자원하는 陳地의 개간을 허가하는 등의 조처를 내렸다. 그런데 세종 19년∼세종 20년에 걸친 두 해 동안에 입거한 호에서 도망·유리한 호의 수는 645호(口)나 되어 입거호의 10%에 달하였다. 이는 세종 19년의 211호 및 향리 50호, 20년 5월의 1,000호 등 1,261호에서 연이은 흉년과 축성, 부방 및 대명 외교관계에 따른 고역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인구가 도망쳤는가를 보여준다.

 이어서 세종 21년 10월에 평안도의 변경지대보다 남쪽에 사는 민호도 逃匿하여 감에 따라, 더 이상의 추쇄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보다 남쪽의 타도민을 安州 이북의 閑曠地에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고,397)≪世宗實錄≫권 87, 세종 21년 10월 정유. 이후 세종도 하3도지역이 인구밀도가 높으므로 富戶를 추쇄하여 북방으로 옮길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398)≪世宗實錄≫권 94, 세종 23년 12월 기유.

 이러한 계획은 세종 25년에 이르러 의정부의 건의를 계기로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다. 즉 황해도와 하3도의 민호 3,000호를 추쇄하여 안주 이북의 고을마다 입거시킬 것이 결정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황해도 550호, 충청도 630호, 전라도 830호, 경상도 1,000호 등 모두 3,000호를 세 차례로 나누어,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려 차례로 입거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특히 이 계획은 막연히 富實戶가 아니라 ‘鄕曲豪右 流品子弟’를 이주시키되 호주로서 본래 직이 있는 사람은 超資시키고 무직자에게는 처음 8품직을 주어서 下番 甲士職에 充差시키고, 4품 이상에 제수된 사람은 啓問하여 시행케 하며, 재간을 살펴 쓸 만한 자는 토관에, 특이한 재간이 있으면 계문하여 토관에 충차하고 경중 종사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예에 의해 시행케 하는 등 커다란 장려책을 아울러 제시하고 있다.399)≪世宗實錄≫권 96, 세종 24년 5월 임신. 이러한 계획에 의하여 세종 24년 7월에는 경차관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400)≪世宗實錄≫권 97, 세종 24년 7월 병술.

 그러나 이 3,000호의 이주계획은 현지주민들의 소요와 반대로 말미암아 다시 변경되어 세종 25년에 우선 경기도·개성부·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에서 추쇄한 유이민으로 입거시키되, 그래도 그 수가 모자랄 경우에 양민을 추쇄·입거시키는 안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다시 가뭄이 극심하자 미루어져, 세종 26년부터 유이민의 추쇄·입거가 시행되어 31년까지 계속되었다. 입거된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401)≪世宗實錄≫권 100, 세종 25년 6월 무자·권 103, 세종 26년 3월 갑인 및 권 105, 세종 26년 7월 계해.

 세종대에는 이와 같이 양민을 입거시키거나 유이민을 추쇄하여 연변에 입거시키는 외에도, 제주도의 牛馬賊이라 불리우던 범죄인과 일반 범죄인 혹은 부정한 세리를 변경지역으로 입거시키기도 하였다. 우마적은 세종 17년부터, 일반 범죄인의 경우에는 세종 18년 이래, 부정한 세리의 경우에는 27년 이래 양계지방으로 입거시켰으나, 그 어느 것도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렵다.402)宋炳基, 앞의 글, 40∼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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