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4. 4군 6진의 개척
  • 5) 행성·읍성·진성의 축조
  • (3) 연해책보와 진성의 축조

(3) 연해책보와 진성의 축조

 세종 24년(1442)에 이르러서는 雜色軍과 沿海柵堡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었다.446)≪世宗實錄≫권 97, 세종 24년 8월 신묘. 이 때에 마련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각도의 연해에 흩어져 사는 주민들을 마을마다 모여 살도록 하여 10인을 1統으로 하고, 10家를 1隊로 삼으며, 弓矢와 槍劍은 각각 재질대로 마련하도록 한다.

② 연해지역의 주거자를 되도록 읍성 가까이에 모여 살게 하고, 통과 대를 정해 놓고 두목을 뽑아 농사일로 출입할 때 각기 병기를 소지하며 부득이한 사정일 때는 빨리 읍성에 입보토록 한다.

③ 바다에 연한 곳으로 읍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은 토지가 기름지고 풍년이 계속되므로, 읍성근처에 이주시킬 수 없다. 왜구가 침입할 때 근처에 숲이 우거진 곳이 있어 숨을 수 있으면 그 곳에 숨게 하고, 적변이 염려되나 숨을 곳이 마땅치 않은 곳에는 목책 혹은 석보·토축의 보를 쌓아 밤에는 모두 입보하고 낮에는 두목과 색장의 영솔하에 농사짓게 한다.

 이것이 알려주는 바는 연해책보가 설치되어야 할 조건은 읍치에서 멀리 떨어진 해변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모여 살면서도 인근에 피난할 곳이 없는 곳이었다.≪世宗實錄地理志≫에 보이는 연해지역의 책보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① 경주 하서지목책(경주 동쪽 60리):둘레 730척, 小池 1, 우물 2 ② 함평 해제목책도니성:둘레 143보 2척 ③ 장흥 두원목책도니성:둘레 80보 ④ 순천 여수목책도니성:둘레 143보 ⑤ 보성 남양양강역목책도니성:둘레 83보 ⑥ 옹진 회산목책(서쪽 25리):둘레 136보, 우물 1 ⑦ 장연 웅심리목책(서쪽 30리):둘레 122보, 우물 2

 세종 26년경에 연해읍성의 1차적인 축성이 끝나고, 이어서 이듬해 2월에는 병조판서 안숭선을 경상도와 전라도에 보내어 연해지역의 책보를 돌아보게 하였다.447)≪世宗實錄≫권 107, 11종 27년 2월 갑인. 그 결과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한 군데씩 석보를 쌓자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불명확하나 후일의 축보사실로 보아서는 울산 柳浦石堡와 순천의 麗水石堡를 말하는 듯하다. 연해지역의 小堡설치는 중국 요동지역의 예가 참고된 듯하니 요동에 소보를 많이 설치하여 오랑캐의 침략을 막는 이점을≪遼陽誌≫를 통해 알고 있었으며, 당시 사정으로는 大城과 小堡의 동시 축성이 매우 힘든 것이었다.448)≪世宗實錄≫권 112, 세종 28년 4월 정묘. 그 후 세종 29년에는 우찬성 김종서를 충청도에 보내어 태안반도 지역의 책보를 자세히 조사하여 정하도록 하였고, 다음달에 태안 長命淵의 책보, 柿洞 소보의 축조를 중단하고, 그 대신 태안의 영지산·대소상 및 남면 잠문이에 연대를 쌓아 信砲를 설치하도록 조처하였다.449)≪世宗實錄≫권 115, 세종 29년 3월 을축 및 권 116, 세종 29년 4월 병신. 이리하여 세종대에 연해의 책보시설은 계획만 있었을 뿐 하나도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세종대의 석보축조계획은 문종대로 이어졌다. 문종은 즉위하면서 우찬성 정분을 충청·전라·경상도도체찰사로 삼고 김순·신영손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연해성보를 돌아보게 하였다. 그 주된 목적은 연해읍성을 조사하여 정하는 데 있었으나 수어의 요충에 책보를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450)≪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0월 무술 및 권 5, 문종 즉위년 12월 임진. 석보는 분명히 읍성이나 진과는 동일한 목적과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읍성의 역할에 가깝되, 지키는 군사는 진에서 파견되었다.

 15세기 후반의 석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전의 목책과 같은 임시적·응급적 시설물이 석축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석보는 영진의 보조적방어시설이어서 본진의 군사가 파견되었다. 규모에 있어서는 읍성과 다를 바 없이 2,000척이 넘는 규모가 있었으나, 1,000척 미만의 작은 규모도 있었다. 물론 다른 陸鎭의 성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육군에 의한 방어시설로서 읍성과 책보가 설치된 뒤에는 수군에 의한 방어시설이 갖추어지는 단계로 이어졌다. 수군은 대부분 원칙적으로는 병선에 승선하여 해상에서 왜적을 막아야 하였다. 이러한 수군의 ‘長在船上守禦’의 원칙은 왜구가 점차 소멸되면서 잘 지켜지지 않게 되었는데, 해변에 만호·천호들이 營舍를 두는 폐단이 이미 15세기 전반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수군의 진영에는 군량을 감추어 두거나 어염을 보관하는 작은 규모의 막사 이외엔 두지 못하게 하였고, 다만 군기와 화약 등을 보관하기 위한 성보·목책·土壘 등은 허락되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사적으로 영사를 마련하는 폐단이 적지 않게 나타나더니,451)≪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2월 기축. 왜구가 점차 소규모화되고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자 船軍은 해상에 있으면서 작전하는 그 자체가 고역이 되어 갔다.

 선군의 ‘船上守禦’가 무너지고 대부분의 만호들이 초막을 가지게 된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현실을 인정하자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등장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성종 5년(1474) 10월 대사헌 李恕長의 주장을 국왕이 받아들인 것에서 당시의 실정을 알 수 있다.452)≪成宗實錄≫권 48, 성종 5년 10월 경술. 성종 13년 12월에 이르러 선군의 기지에 성이 없어서 적변이 있으면 만호가 먼저 사로잡히게 될 것이므로, 축성함이 좋을 것이라는 견해가 나왔으나 대부분의 조정대신들은 반대하였다.

 이처럼 성종초에 관료 일각에서 만호·천호들의 현실적인 처지를 인정하여 초막을 허락하거나 축성케 하자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여론은 현실을 무시하고 전통적인 ‘선상수어’ 원칙을 고수하려고 하였다.453)≪成宗實錄≫권 149, 성종 13년 12월 을축. 성종 15년 10월에 사헌부 執義 曹叔沂가 만호 소재의 영처에 성보를 마련하자고 주장하자 洪應이 찬성하고 국왕 또한 대신을 보내 가장 긴요한 곳의 設堡 후보지를 살피게 하였다.454)≪成宗實錄≫권 171, 성종 15년 10월 임오. 이 때의 水鎭設堡는 그 대상지역이 경상우도와 전라좌도로 한정되어 주로 남해안에 성보를 쌓을 것이었다. 이듬해 3월 홍응의 복명에 의하면 전라도의 6개소와 경상도의 3포 등 9개소에서 이미 축성이 시작되고 있었다.455)≪成宗實錄≫권 174, 성종 16년 정월 임진 및 권 176, 성종 16년 3월 무술. 성종 16년에 1차적으로 이들 19처와 왜인이 왕래하는 부산포·제포·염포를 합하여 22개소의 수군영진에 축보를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다.456)≪成宗實錄≫권 176, 성종 16년 3월 병오. 이 때에 설보처로 계획된 것을 보면 전라우도와 경상좌도의 수군절도사영을 비롯하여 3포와 가장 긴요하다고 생각되는 남해안의 만호영이 망라되어 있었다. 수군영진에의 축성은 각 포의 수군병력이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역역의 규모가 커서인지 소재관의 수령들에게도 축성에 병력을 동원하도록 지시되었다.457)≪成宗實錄≫권 178, 성종 16년 윤 4월 신묘. 설보가 촉진된 주요한 계기는 이즈음에 일어난 彌助項에서의 왜변과 성종 19년 5월에 있었던 고성 두도와 加背梁에의 왜구 침입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가배량의 방어시설 확충, 미조항과 성고개의 성보축설과 수군병력의 증원이 논의되어 築堡處가 더욱 증가되었다.

 이와 같이 수군영진에의 축성 대상지는 성종 16년에 모두 22포소로 계획하였으나 성종 19년에 추가되어 모두 24개처로 늘어났다. 성종 17년(1486)에 薺浦城이 축조된 이래 성종 22년까지 6년 사이에 모두 23개처의 水鎭築城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의 축성처와 규모를 정리한 것이 앞의<표 3>이다.

연 대 성 이 름 당초예정둘레 둘 레 높 이
성종 17년 10월
19년 6월
19년 12월
20년 2월
21년 4월
21년 5월
21년 6월
21년 6월
21년 8월
21년 8월
21년 8월
21년 8월
21년 9월
21년 윤 9월
21년 윤 9월
21년 윤 9월
21년 윤 9월
21년 윤 9월
21년 10월
21년 10월
21년 11월
22년 3월
22년 10월
薺 浦 城
巨 濟 水 營 鎭 城
泗 川 三 千 鎭 城
南 海 城 古 介 鎭 城
會 寧 浦 城
鹽 浦 城
助 羅 浦 城
突 山 浦 城
富 山 浦 城
玉 浦 城
唐 浦 城
加 背 梁 城
平 山 浦 城
赤 梁 城
知 世 浦 城
固 城 蛇 梁 城
安 骨 浦 城
鉢 浦 城
全 羅 左 道 營 城
鹿 島 城
多 大 浦 城
呂 島 城
蛇 渡 城

4,002척
996척



2,240척
3,600척

1,440척
1,440척

1,720척
1,500척
1,840척
1,850척
1,866척



1,298척
1,680척
 
4,316척 3촌
2,620척
1,440척
760척
1,990척
1,039척
1,890척
1,313척
2,026척
1,074척
1,445척
883척
1,558척
1,182척
1,605척
1,252척
1,714척
1,360척
3,634척
2,020척
1,806척
1,320척
1,440척
13척
13척
15척
13척
13척
15척
13척
13척
13척
13척
13척
13척
9척
13척
13척
13척
13척
13척
13척
13척
13척
15척
15척

<표 3>성종 17∼22년간 水鎭축성 상황표

 이 때의 축성은 경상우도 수군진영과 전라좌도 수군진영내의 모든 만호영에서 이루어졌으며, 전라우도는 한 군데서도 축성이 없었다. 경상좌도의 경우는 왜인의 기항지인 부산포·염포와 다대포 등 동해의 최남부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이 때의 수진축보는 남해안에 국한된 1차적인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성종 22년 10월에 1차로 계획된 남해안지역의 성보축조가 완성된 후 이듬해에 서해안과 동해안까지 축조지역을 확대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으나,458)≪成宗實錄≫권 225, 성종 20년 2월 임진. 이 계획은 성종대에 실현되지 못하고 연산군대를 지나 중종대에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나 있다.

<車勇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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