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4)≪경국대전≫편찬의 사적 의의

4)≪경국대전≫편찬의 사적 의의

 ≪경국대전≫은 정치의 요체는 법에 있으며 여말에 문란한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법률의 정립에 있다고 서약 선명한 태조가 이상으로 하는 종국적 결정이었다. 이것은 태조의 강렬한 의지가 계승발전된 명실상부한 조종성헌이며, 우리 법사상 최대의 업적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법치주의를 표방한 태조는 창업군주다웠고 그를 계승하여 법전편찬에 전심전력한 여러 왕도 또한 정치의 요체를 체득한 명군들이었다. 왕에 의한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는 법치주의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으며, 그 정치를 실현하는 최대의 도구, 즉 국가의 정책을 구현하는 수단이 법인 것이다. 따라서 통일적·획일적 법전편찬은 통치의 필연적 요청이다.≪경국대전≫의 편찬은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 즉 통치규범체계가 확립되었다는 데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경국대전≫의 편찬은 예로부터의 법령·판례법·관습법 등 우리 고유의 법을 성문화 즉 祖宗成憲化함으로써 외국법, 즉 중국법의 무제한적 침투에 대해 방파제의 역할을 한 점에 있어서도 커다란 의의가 있다. 태조의 즉위교서에서 ‘儀章法制는 高麗故事에 따른다’고 한 것은 급격한 개혁을 피함으로써 민심의 안정을 꾀하는 목적이 있었다. 생소하고 혁명적인 법을 제정하거나 국법을 강제함으로써 법의 실효성이 상실되는 것보다는 전통적이고 현실적인 치자와 민중의 법의식을 존중함으로써 법의 타당성과 실효성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왕 14년(1388) 이후 태조 6년(1397) 12월까지의 현행법령을 편집하여≪경제육전≫을 편찬케 한 것이다. 태조의 진취적 기상과 현실타협적 복고적 정책의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 듯하지만 이러한 과도조치의 추이에 따라 법정책에도 큰 전환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태종대부터≪경제육전≫에 대해서는 그것이 매우 불완전한 법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업군주의 이념과 의지의 체현인 祖宗之法으로서의 성격과 함부로 변경할 수 없다는 성격이 부여되었다. 이 사실은 우리의 고유법 유지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일반적 법의식은 예로부터의 전통적인 법이 良法美意이며 새로운 법을 제정해서 전통을 깨뜨리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경제육전≫을 비롯한 속전, 그리고≪경국대전≫의 편찬 등 법전의 편찬은 법의 제정, 즉 신법의 정립이 아니라 현존하는 법의 기록이었다. 따라서 영구히 준행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는 것은 기존의 법의 발견이지 엄격한 의미에서 법의 창조가 아니었다. 설사 중국적 요소나 새로운 요소가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것에 근사한 예로부터의 법령이나 관습에 가탁함으로써 그러한 명목하에 채택 수록되었다.≪경국대전≫이 담고 있는 조문은 모두가 당시로서는 소화된 것이며, 民事的 규정들은 우리의 고유한 관습법·판례법 성문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조종성헌으로서 유지되었다. 끊임없는 속전의 편찬은 이전의 양법을 발견하는 작업이며≪경국대전≫완성까지의 편찬작업은 한 마디로 법의 발견작업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고유한 제도·관습·양법미의가 체계화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祖宗之法·國家萬世通行之法·垂世之規=永遠不變之法도 실은 극히 불완전하며 가변적이었다. 사실≪경국대전≫은 변개할 수 없다고 한 조종성헌인≪경제육전≫중 변개한 것이 적지 않았다. 그러면서도≪경국대전≫이 조종성헌이라고 존중되는 까닭은 그것을 조종성헌의 대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법전편찬에서의 성헌존중은 법률의 지도적 사명을 빼앗아 버리며 법률의 변개가 의식적으로 저지되면 법률의 진보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법률 내지 법률학이≪경국대전≫의 편찬 이래 4백 년을 통하여 침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원인은 성헌존중에 유래하는 점이 적지 않고, 구습의 묵수에 급급하는 현상은 비단 법률학계에 그치지 않고 사회전반에 걸쳐 나타났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475)花村美樹, 앞의 글, 116쪽. 이는 식민사관 내지 정체성이론에 입각한 편견이다.476)그러한 편견이 아니더라도 근대적 법이론으로써 규정지으려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종성헌 존중주의는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기도 하나 중요한 것은 법률을 경솔하게 개정하면 일반민중이 법에 대한 신뢰감을 잃어 안정된 사회를 기할 수 없으며, 또한 입법은 용이하나 법답게 시행하기는 어려우므로 법의 안정성을 기하자는 데 의의가 있었다.477)成憲尊重論을 밑받침하는 주장으로서는 태종 4년 9월 정사 前漢城府尹 尹穆·前鷄林府尹 韓理·戶曹典書 尹思修 등의 陳言, 세종 5년 5월 정미 李稷의 陳言, 문종 즉위년 11월 신유 同知經筵事 安完慶의 啓 등을 들 수 있다. 직접 법의 안정성을 거론한 주장으로서는 세종 22년 7월 임자 영의정 黃喜의 말, 세종 22년 8월 경진 세종의 말을 들 수 있다. 성헌 존중주의는≪경국대전≫이후에 형식상으로는 준수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무수한 변개가 가해졌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법의 타당성과 실효성을 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태조 이래의 제왕을 비롯한 양반관료들은 정치적 권력의 확립을 위해서 중국적 국가체제 내지 사회체제의 수립을 이상으로 하여 중국법을 이어받은 制定法에 의존하였으나, 아울러 고유의 사정에 적응한 조치를 취하였다. 조선왕조는≪경국대전≫의 완성을 정점으로 말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법전편찬에 전력하였으므로 법전편찬의 왕조라고 특색지을 수 있다.≪경국대전≫의 완성은 바로 조선왕조 존속의 뼈대이며 고유법계승의 주춧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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