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6) 법전편찬의 계승과 법사상의 변화
  • (2) 변법사상

(2) 변법사상

 500)朴秉濠, 앞의 글, 1993.
―――,<韓國法思想의 흐름>(≪公法理論의 現代的 課題≫, 房山丘秉朔博士停年紀念, 1991).
건국초의 법사상은≪경국대전≫시행 후부터 古法墨守에 의한 안정성의 사상보다도 법의 개정에 의한 구체적 타당성에의 지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법의 지속지향성과 변동지향성의 상충과정에서 후자가 우세하게 된 결과라고 하겠다. 그에 따라 법은 변동하나 안정성을 위한 제동장치의 역할을 담당했던 건국초의 지배적인 법사상은 공전의 위험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른바 조종성헌 존중주의는 형식적인 명맥을 유지함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법의 자의적 개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즉 만세불변의 大經大法인≪경국대전≫이후 영조대의≪속대전≫편찬에 이르기까지「典」의 편찬은 없었다. 그러나 법의 창설과 개폐는≪경국대전≫당시까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양적팽창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건국초의 법사상은 기본적으로 계승되는 가운데서도 법의 변동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사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종 23년(1492) 10월의≪대전속록≫, 중종 38년(1543) 8월의≪대전후속록≫, 명종 10년(1555)의≪경국대전주해≫, 숙종 24년(1698)의≪수교집록≫, 숙종 말년의≪신보수교집록≫등 끊임없이「錄」의 편찬이 계속되었으며, 이들「녹」은 당시의 모든 법령을 망라한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항구적인 법이 될 만한 것을 취사선택한 것이다.≪대전속록≫과≪후속록≫은 각각 그 서문에서 “시대가 다르고 사정이 다르므로 신법과 구법이 서로 저촉하여 관리들이 시행하는데 현혹되며”, “법령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시행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이를 조화시켜 영구적 법을 모은 것”이라고 그 편찬 동기를 밝히고 있다. 즉 이들 속록은 조종성헌화할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기본적으로 건국초의 법사상을 견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본격적인 變法論은 선조대에 들어오면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건국 후200여 년이 지난 이 때는 이미 국가의 기강이 상당히 해이해지고 민생도 피폐해졌으며 법과 현실의 거리감도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保國安民을위해 更張之道로서 율곡의 변법론이 제시되었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며 폐단이 생기면 마땅히 이를 고쳐야 한다고 하는 그의 변법론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하는 周易의 변통론에 입각하고 있다. 이는理의 절대적 우위성과 氣의 종속성을 강조한 퇴계와는 달리, 이가 발전하는 형태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기에 의해 규정받는다고 하는 율곡의 철학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다. 즉 王道·仁政·三綱·五常 등은 언제나 추구해야 할 불변의 가치이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인 법제는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율곡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각종 제도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율곡의 변법론도 근본적으로는 시의에 합당하고 사정에 적합하도록 하는 방편적인 權義이며 기본적인 원리인 常經, 즉 선왕의 유지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법제개혁 자체에 중점이 주어진 본격적인 변법논의가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획기적임에 틀림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조선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치닫게 되면서 이러한 변법사상은 더욱 진작된다. 당시에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격화되고 사회경제적으로도 갖은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어 민생은 도탄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중국의 앞선 학문과 문물을 접촉하면서 이른바 實學이라고 하는 공리주의적·실용주의적 학문조류가 발흥하였다. 이 학문적 조류에 참여한 실학자들이 사회의 누적된 모순에 관심을 갖고 각종 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변법사상이 더욱 진작된 것이며, 사회제도 개혁사상 특히 經世致用을 중시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상당히 발전되어갔다. 물론 이들의 법제 개혁사상도 기본적으로는 앞선 변법론과 그 이론적 근거를 같이하고 있다. 즉 이들도 부국안민을 중시하여 아무리 훌륭한 법이라 할지라도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면 마땅히 고쳐야 한다는 근거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통치의 수단으로서의 각종 사회제도 그 자체에 비중을 크게 두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세부적인 법령의 개정에 그치지 않고 근본적인 사회제도 자체의 개혁까지 요구하였다. 즉 국가경제의 근간인 토지제도를 전면적으로 혁신하여 均田法·限田法·閭田法 또는 井田法 등을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문벌이나 파벌에 의해 문란해진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능력과 덕행에 의해 관리를 공정하게 선발하고, 심지어는 지역 및 서얼의 차별 금지, 점진적이긴 하지만 노비제의 타파 및 양반계급의 부정 등 불평등한 신분제까지 변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경국대전≫이후「녹」으로만 수록되어 오던 각종 법령을 영조대에≪續大典≫으로 편찬하고, 이어≪大典通編≫·≪大典會通≫등을 계속 편찬한 사실은 시대적 변화에 따른 이러한 변법론의 요청을 국가가 자체적으로 흡수한 것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의 주류적인 변법사상에 덧붙여 특기할 만한 법사상으로는 欽恤思想을 들 수 있다. 형정에 대한 신중성을 요구하는 흠휼사상은 유교의 정치사상에 본래 내재하는 것으로 조선 후기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지만 영조·정조대를 중심으로 특히 강조되었다.≪속대전≫편찬시에 각종 악형이 제거된 사실은 이러한 흠휼사상의 구체적인 표현을 의미한다. 또한≪審理錄≫·≪秋官志≫등의 관찬 法書와≪欽欽新書≫를 포함한 일련의 사찬 법서의 출현은 흠휼사상을 더욱 현실화하고 널리 보급시키고자 한 의지의 결실로 볼 수 있다.

<朴秉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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