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1) 명의 정치동향
  • (3) 명 성조의 대외확장정책

(3) 명 성조의 대외확장정책

 몽고는 명제국이 수립된 다음 북으로 퇴각하여 한동안「北元」이라는 국호로 정권을 유지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韃靼[타타르]·瓦刺[오이라트]·兀良哈[우량하]의 3대 부족의 형태로 출현하였다. 몽고 3대 부족 가운데 우량하는 평소 명과의 관계가 비교적 밀접하였다. 명 성조도「정난의 역」때 우량하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지라 大寧 이북의 지역을 그들에게 내맡긴 채, 방어선을 내지로 후퇴시켜 오직 북방의 타타르와 서북의 오이라트에게만 국방의 총력을 집중시켰다. 마침 韃靼可汗 鬼力赤이 阿魯台에게 피살되고 원 황실의 후예인 本雅失里가 아노태에 의해 可汗으로 옹립되었다. 명 성조는 타타르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촉구하며 우호관계를 수립하고자 희망하였으나, 타타르는 명사를 살해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이에 격노한 명 성조는 丘福으로 하여금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북정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명성조는 친정을 결심하였고 이후 다섯 차례에 걸친 잇따른 몽고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명 성조의 타타르와 오이라트에 대한 정벌은 궁극적으로는 명조의 통치를 안정시키고 변방을 공고하게 할 목적에서 시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명 성조는 몽고를 동쪽에서 견제할 목적으로 요동의 여진에 대한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흔히 遼東都司로 약칭되는 遼東都指揮使司라는 군정기관을 명 태조가 遼陽에 설치한 이래 衛所制度에 입각하여 衛 또는 千戶所를 각지에 설립하여 나갔으나, 조선 태종 3년(1403)부터 명 성조는 여진부족의 조직을 그대로 살려 명의 위소로 만드는 羈縻衛所를 대량으로 만들며 여진을 장악해 나갔다. 조선 태종 9년까지에는 멀리 烏蘇里江[우수리강]과 黑龍江 일대까지 진출하여 수많은 위소가 설립되자, 별도로 奴兒干都司를 흑룡강 어귀에 두어 이들 넓은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관할케 하였다.

 또한 명 성조는 명 태조 이래 유지해오던 동남아시아·남아시아·서남아시아 일대에 대한 폐쇄적이고 냉담하였던 대외관계의 틀을 깨어버리고 능동적인 자세로 임하였는 바, 그 결과가 유명한 鄭和의 7차에 걸친「西洋出使」로 나타나게 되었다. 정화의 원정대는 제1차의 경우 62척의 대선에 인원이 2만 7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항해도와 나침판을 갖춘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의 항해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3차와 제4차 항해 때에는 동남아시아 각국과 인도는 물론, 분견대가 페르시아만과 홍해를 거쳐 아프리카 동해안의 적도 이남 지역까지 항해하기도 하였다. 정화는 중국의 부강함을 과시하고 조공할 것을 촉구하며 동시에 약간의 교역도 행하였으나, 결코 무역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상업적 동기가 결여되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 채 7차 원정으로 끝나 고립적인 업적으로 남고 말았다.

 명 성조는 주위의 여러 나라와도 조공관계를 통한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정난의 역」이 종결되자마자 즉각 조선과의 정상적인 조공관계를 회복하였고, 南北朝 통일이 이루어진 다음 일본 室町幕府의 제3대 장군 足利義滿과도 조공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마침 安南은 권신 黎氏가 陳氏王朝를 찬탈하여 왕이 된 다음 廣西와 雲南의 변경을 침입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명조가 호송해 보낸 진씨 왕손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명과의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다. 마침내 명조는 조선 태종 6년(1406) 대군을 보내 안남을 정복하고 交阯로 이름을 바꾸어 직속영토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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