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2) 북방민족의 동향
  • (2) 타타르와 오이라트

(2) 타타르와 오이라트

 원나라 멸망 후 몽고로 이동한 북원정권은 대부분이 명에 항복하여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남옥군에 쫓겨 화림으로 향하던 탈고사첩목아 부자마저도 내분으로 말미암아 피살되자 원 직계의 유력한 후계자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원세력의 나머지 몽고인 집단과 변두리에서 기회를 엿보던 몽고인 유력자들이 몽고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明實錄≫은 “원의 운세가 다하고 順帝 이후 愛由識里達臘에 傳位되고 나서, 坤帖木兒에 이르기까지 무릇 6대가 순식간에 바뀌었으나, 한사람도 끝내 善終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505)≪明太宗實錄≫권 77, 永樂 6년 3월 신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유력자들의 10여 년간에 걸친 투쟁끝에 새로운 지도자가 부상한 것은 조선 정종 2년(1400)경이였다. 이는 “황제가 韃靼可汗 坤帖木兒에게 勅書를 보내 招諭하였다”라는 기사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506)≪明太宗實錄≫권 6, 永樂 2년 2월 계축.

 명에서「靖難의 役」이 한창 진행 중인 때에 새로운 몽고의 지배자가 ‘달단가한’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지금까지 故元이라든지 북원이라는 원과 연관되는 명칭에서 벗어나, 이후 오랫동안 몽고집단의 호칭으로 사용되는「타타르」가 나타난 것이다. 곤첩목아가 죽은 다음에는 비원나라계로 알려진 鬼力赤이 달단가한으로 활약하였으며, 얼마 후 그도 원의 遺臣인 아노태에게 피살되었다. 이렇게 혼란한 와중에 몽고로 진출하여 패권장악을 노리는 주변의 부족이 있었으니 그 대표가 오이라트부였다. 오이라트는 원대부터 몽고의 서북에 위치하여 몽고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어온 유력한 부족이었으나, 북원세력이 건재하였던 기간에는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몽고 쟁패전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당시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아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티무르도 몽고제국의 재건을 꿈꾸며 東征에 나섰으나 도중에 병사함으로써 그의 몽고진출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티무르의 동정을 선도하던 원 황실의 일족 출신인 本雅失里는 일부의 部衆을 이끌고 몽고로 와서 타타르부와 합류하고 그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로부터 몽고에서는 타타르부와 오이라트부가 대립하며 패권쟁탈전을 벌이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게 되었다.

 조선 태종 2년(l403)「정난의 역」이 끝나고 명 성조가 새로 즉위하자 주변의 여러 민족과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을 촉구하며 활발한 대외교섭이 시도되었다. 북방민족 가운데 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민족은 그 동안 명과 투쟁을 벌인 적이 없고 새로이 몽고 남부로 이동해온 오이라트였다. 명 성조는 당시 세 부족으로 나뉘어 부족연합체를 이루고 있던 오이라트의 馬哈木을 順寧王에, 太平을 賢義王에, 把禿孛羅를 安樂王에 봉하였고 이로써 명과 오이라트와의 관계가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한편 본아실리를 새로 가한으로 추대한 타타르는 몽고의 통일을 노리며 마합목 등이 명으로부터 왕으로 봉해진 직후에 오이라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본아실리와 아노태는 臚胊河 유역으로 피신하였다. 명 성조는 타타르를 회유하기 위해 사자를 파견하였으나, 본아실리는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사자를 살해하였다. 이에 격노한 명 성조는 조선 태종 9년 丘福에게 10만 병력을 이끌고 원정을 시켰으나 도리어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명 성조는 대대적인 타타르정벌을 계획하여 스스로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정에 나섰다. 본아실리는 대군을 피해 도망하던 도중 오이라트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세력이 약화된 타타르의 아노태는 명에 사죄하는 사자를 파견하며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명 성조로부터 和寧王에 봉함을 받을 정도로 관계가 개선되었다. 한편 차츰 세력이 강해진 오이라트의 마합목은 아노태를 공격하면서 명의 변경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명 성조가 다시 50만 대군을 이끌고 오이라트정벌에 나서서 격전을 벌였으나 결정적인 승패를 가름하지 못하고 끝났다.

 이렇게 되자 다시 한번 입장이 바뀌어 오이라트가 명에 사죄의 사자를 보내며 조공을 하는 등 우호관계의 회복에 노력하였다. 마합목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脫歡이 명으로부터 順寧王의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거꾸로 타타르의 아노태가 명의 변경을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명 성조는 조선 세종 4년(1422) 3차 친정에 나서고 이후 2년 연속하여 타타르를 공격하였으나 뚜렷한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5차 친정에서 귀환하던 도중 楡木川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명이 몽고에 직접 군사적 개입을 하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명군의 대규모 정벌을 받으면서도 타타르와 오이라트의 패권쟁탈전은 끈질기게 지속되었고, 명 성조의 5차에 걸친 친정은 주로 타타르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므로 오이라트에 보다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명군의 위협이 사라지자 오이라트의 부족연합이 이완되어 격심한 내부항쟁을 거쳐 결국 순녕왕 마합목의 아들 탈환이 대두하였다. 탈환은 오랜 투쟁상대였던 타타르의 아노태를 먼저 공격하여 죽이고 그 部衆을 손에 넣는 한편, 오이라트의 부족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던 현의왕·안락왕의 두 부족마저 멸하여 사실상 몽고의 통일세력이 되었다. 탈환은 여세를 몰아 可汗의 지위에 오르고자 하였으나 부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고, 원 황실의 후손인 脫脫不花를 맞아 가한으로 옹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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