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3) 일본의 동향
  • (3) 도잇끼

(3) 도잇끼

 겸창막부시대 후기에 近畿지방에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형태의 농촌은 남북조·실정막부시대에 들어서면 확실하게 변모된 모습을 드러내며 각 지방으로 퍼져갔다. 이들 농촌은 지주가 되어가고 있던 名主들과 새로이 성장한 소농민을 그 구성원으로 하여 神社의 제사나 농업의 공동작업을 통해 지연적 결합을 강화시켜 나가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마을의 운영은 寄合이라는 村人회의의 결정에 따라「오또나」 또는「沙汰人」으로 불리는 지도자에 의해 이루어지고, 촌인이 지켜야 할 규약인 總掟을 정한다든지, 촌내의 질서를 스스로 유지하기 위해 경찰권을 행사하는 일도 있었다. 總村으로 불리던 이러한 자치적인 촌에서는 관개용수의 관리도 자기들 손으로 하지만, 領主에게 바치는 年貢도 촌단위로 한꺼번에 청부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강한 연대의식으로 맺어진 총촌의 농민은 불법을 일삼는 代官의 면직이나 자연재해에 따른 연공의 감면을 요구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였다. 그들은 영주에게「强訴」한다든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모두가 경작을 방기하고「逃散」해버리는 실력행사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강소」나「도산」은 강한 농민결합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도망 등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즉 농민은 생존권을 걸고 영주와 투쟁하였으며, 강소와 도산은 영주에 대한 강한 압력인 동시에 나아가서는 부근의 농민과 제휴한 폭동인 一揆[잇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족리의만의 뒤를 이은 장군 足利義持대는 장군과 유력한 대명 사이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막부정치가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6대 장군에 취임한 足利義敎가 수호대명의 통제를 엄격히 하며 장군권력의 강화를 노리자 막부와 겸창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조선 세종 20년 족리의교는 토벌군을 관동으로 보내 겸창공방인 足利持氏를 멸망시켰다. 전제정치가 강화되고 정치불안이 고조되어 가자, 조선 세종 23년 마침내 숙청을 두려워한 수호 赤松滿祐에 의해 족리의교가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적송씨는 막부군에 의해 곧 토벌되었으나 이후 장군의 권위가 크게 하락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바로 족리의교의 치세에 앞으로 격동의 시대가 닥쳐올 것임을 예고하는 대규모 민중봉기가 잇따라 발생하였다. 조선 태종 18년(1418) 이미 경도에서는 馬借로 불리는 운수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봉기하여 목적을 달성한 이래 德政을 요구하는 잇끼가 해마다 일어나고 있었다. 족리의교가 장군이 될 것이 결정된 조선 세종 10년에는 近江의 馬借를 선두로 경도의 시민이 주변의 총촌과 결합한 대규모 土一揆[도잇끼]가 일어났다. 그들은 덕정을 요구하며 酒屋과 土倉을 습격하고 약탈을 자행하며 차용서를 모조리 파기하였다. 大乘院의 尋尊僧正은 “무릇 망국의 기초로서 이보다 더한 일이 없을 것이다. 일본의 개벽이래 土民의 봉기는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509)≪大乘院日記目錄≫正長 원년 9월.라고 탄식하였다.

 正長년간의 도잇끼는 경도에서는 管領 畠山滿家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德政令은 발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잇끼는 이후 근기지방과 그 주변에 확대되어 각지에서 이른바「德政一揆」가 빈발하였다. 족리의교의 뒤를 이어 足利義勝이 장군이 되는 것으로 결정된 조선 세종 23년에 또 다시 도잇끼가「代始의 덕정」을 요구하며 폭발하였다. 수천의 민중이 경도를 점령하고 덕정을 요구하였으므로 막부는 덕정령을 발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도잇끼는 덕정을 요구하며 각지에서 수시로 폭발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 도잇끼는 도시와 농촌의 민중투쟁이 강소나 도산의 단계로부터 무장하여 봉기하는 단계로 비약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잇끼는 한 사람의 영주나 한 사람의 代官의 압박에 대한 저항이 아니고, 상업과 고리대의 착취와 연결된 지배계층에 대한 투쟁에 민중이 결집하기 시작하였음을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도잇끼가 일어난 지역의 농민은 영주와 막부로부터 이중부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화폐경제가 발달하였어도 그 이익은 영주나 名主에게 돌아가고 농민은 토지를 팔거나 전당잡히는 일이 많았다. 고리대업인 土倉은 이에 의하여 부를 축적하였고, 酒屋이나 米屋 등의 富商은 영업을 독점하거나 매점에 의한 미가조작에 의해 농민·하층무사·도시빈민을 곤궁으로 몰아 넣었다. 막부는 이를 단속하기는 커녕 오히려 고리대나 부상에 대한 과세를 통해 재원의 확보를 노렸다. 따라서 종래 장원영주나 地頭의 수탈에 대해 총촌의 단결로서 대항해오던 농민은 삼위일체인 막부·장원영주·고리대업의 새로운 상대에게 잇끼로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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