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3) 일본의 동향
  • (4)「응인의 난」

(4)「응인의 난」

 족리의승이 불과 2년만에 병사하고 동생인 足利義政이 3세의 나이로 장군이 되니, 막부는 수립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여 연발하는 도잇끼에 대처할 정책이나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실정막부는 이러한 잇끼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기생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면 享德의 덕정령에서 채무를 파기할 때 막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이를 위해 채무의 1/10을 막부에 납부하게 한 규정을 들 수 있다. 이후의 덕정령에는 늘 이 규정이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족리의정에게는 민중반란이 오히려 하나의 재원으로 파악된 셈이었다.

 도잇끼의 주체는 원래 농민·도시빈민과 在地武士·名主 등의 연합이었으나 잇끼가 발전하면서 재지무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잇끼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재지무사가 주도하는 도잇끼는 고리대나 寺社 등에 대해서는 공격하였지만 막부권력과는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았으므로, 부패한 족리의정정권이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도잇끼의 발전과 함께 농민에 대한 봉건적 지배는 오히려 강화되고 武家세력 내부에서 하극상과 같은 내분과 전쟁이 일어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장군 족리의정이 여자들과 근신들에 둘러싸여 정무를 내던지고 있는 동안에 관령 細川勝元과 侍所 山名持豊과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게다가 족리의정의 동생 義規와 아들 義尙 사이에 장군직 계승분쟁이 연결되고, 나아가 斯波·畠山家의 家督분쟁까지 얽혀 諸國의 수호대명들이 두 세력 중 어느 한편에 가담하는 형세가 만들어졌다. 조선 세조 13년(1467) 드디어 세천승원과 산명지풍의 두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여「應仁의 亂」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 동원된 병력은 東軍인 세천승원측이 24개국 16만, 西軍인 산명지풍측이 20개국 11만이었다. 이 전쟁으로 경도는 황폐화되고, 상대방의 領國 교란작전으로 말미암아 전란이 지방까지 파급되었다. 조선 성종 8년(1477) 양군 사이에 화의가 일단 이루어져 경도의 전투는 종식되었으나 지방의 전란이 계속되어 그대로 군웅할거의 시대로 연결되었다.

 「응인의 난」을 계기로 낡은 권위와 전통이 실력에 의해 부정되고 하극상의 풍조가 급속하게 전파되었다. 수호들이 경도에서 전쟁에 전력을 쏟고 있는 동안 각 領國에서는 守護代나 호족이 國衆을 기반으로 모반하여 하극상을 일으키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미 도잇끼를 통해 무력함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던 실정막부는「응인의 난」을 통해 정치적 생명을 사실상 잃게 되었고, 足利義尙 이후 몇몇 장군도 모두 경도를 떠나 객사하였다. 公卿·승려 등도 황폐된 경도를 떠나 대명에게 의지하기 위해 지방으로 떠나갔다. 역사의 무대는 고대이래 전통적 수도였던 경도를 떠나 지방으로 옮겨가고, 이후 이들 대명들에 의한 전국시대가 약 1세기에 걸쳐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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