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4) 동아시아 3국의 관계
  • (3) 조선의 일본통제정책

(3) 조선의 일본통제정책

 태조는 고려말부터 계획된 군비를 확장시키며 壹岐·對馬·肥前松浦 등에 특사를 파견하여 왜구의 진압을 요구하고, 때로는 무력행사를 기획한 일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회유정책에 중점을 두었다. 왜구의 두목들에게 투항을 권고하고 투항해온 일본인들에게 田地와 家財를 내려주어 안주할 수 있게 한 것도 회유정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태조말부터 생활고 때문에 귀화하는「降倭」라는 일본의 邊民들이 속출하였다. 投化倭 또는 向化倭로도 불리던 이들 가운데 특수한 기능을 가지거나 공로가 있는 자는 관직까지 부여받고 우대되었다. 이와 같은 授職제도는 여진인에 대한 회유정책과 근본적으로 궤도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원래 왜구의 활동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약탈적인 수단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나, 조선이 연해지방에 浦所를 두어 근해어로와 교역을 허락하며 식량마저 때때로 급여하는 등 우대정책을 펴자 왜구의 활동은 진정되었다. 조선에서는 일기도·대마도인을 島倭로, 기타 지방의 일본인을 諸鎭倭人·深遠處倭人으로 불렀다. 使者로서 도항해오는 일본인을 客倭 또는 使送倭人으로, 교역을 위해 오는 자를 商倭·販賣倭人·興利倭人 등으로 구별하여 불렀다. 그러나 대부분이 원래 왜구로서 활동하던 자들이었으므로, 태조의 회유정책은 바로 왜구를 객왜 또는 상왜로 변모시키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회유정책이 성공을 거둘수록 왜구의 활동은 현저히 감소되어 갔으나, 경상도지방의 향화왜인만도 2천 명에 달하는 등 조선의 부담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태종은 왜선이 정박할 수 있는 포소를 富山浦와 薺浦로 한정하고 興利船에게는 도항증명서인 文引을 지참하도록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使送船도 室町幕席·九州探題·대마도·大內氏 등 10개 처 이외에는 통교정지를 요구하기로 하고, 이를 대마도주 宗貞茂에게 알려 일본 각지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는 조선이 대마도의 특수한 지위에 주목하여 일본과의 교류통제에 이용한 것으로서, 이후 19세기 중기까지 대마도주 종씨가 일본과의 교섭에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간의 교통의 요충으로서, 흥리선의 行狀을 다수 발급하고 있었던 島主 종정무에 대한 조선의 기대와 신뢰가 상당히 컸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대마도의 종정무가 죽고 어린 아들 宗貞盛이 계위하자 도내의 실권을 왜구의 두목인 左衛門太郎 등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에서도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上王으로서 군사적 실권만은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마침 대마도에서는 기근때문에 도민들이 다시 왜구활동에 나서 대거 명으로 향하는 도중에 먼저 조선의 연해지방을 약탈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태종은 왜구가 출동한 허를 찔러 대마도를 습격하고, 나아가 왜구의 귀로를 차단하여 전멸시킬 계획을 세웠다. 세종은 병선의 준비부족 등을 이유로 육지에서의 방어를 주장하며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는데 우의정 李原, 예조판서 許稠가 동조하였다. 그러나 좌의정 朴訔과 병조판서 趙末生 등이 상왕의 의견에 찬동하여 원정이 단행되었다.

 세종 원년(1419)에 단행된 대마도정벌을, 조선에서는「己亥東征」으로 불렀으나 일본에서는「應永의 外寇」로 일컬어졌다. 3道都統使 柳廷顯과 3軍都體察使 李從茂가 병선 227척에 1만 7천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豆地浦에 상륙하여 가옥을 불사르고 도민을 살륙하는 등 소탕작전을 벌이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자를 내기도 하였다. 조선군이 거제도로 철수한 다음 명으로부터 돌아오던 왜구들이 조선의 서해안에 다시 출몰하였으므로 대마도 재정벌의 논의가 일어났으나, 왜구의 주력이 이미 金州衛의 望海堝에서 명에 대파되었다는 정보를 듣고서야 그만두게 되었다.511)中村榮孝,<朝鮮世宗己亥の對馬征伐>(≪日鮮關係史の硏究≫上, 吉川弘文館, 1965), 243∼265쪽.

 조선은 대마도 재정벌계획을 중지하고 화평교섭을 시도하던 중 몇 년만에 실정막부 장군 족리의지가 직접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의 정사인 僧 亮倪는 구주탐제의 사자를 거느리고 대마도의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며 대마도정벌의 진상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양예가 귀국하는 편에 回禮使 宋希璟을 파견하며 대장경을 보내주는 한편, 일본에 있는 조선표류민과 왜구에 약탈되어간 被虜人들을 송환시켜 주도록 요구하였다. 송희경은 대마도로 건너가 바다를 거쳐 경도에 도착하였고 귀로에도 같은 경로로 돌아오면서 일본국정의 복잡함에 놀라고, 대마도의 종씨와 구주탐제, 그리고 막부장군과의 상호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는 대마도정벌의 논의가 일어날 때부터 예조판서 허주와 우의정 이원이 온건론을 펼쳐왔으며, 세종도 일본인의 접대와 의례에 개혁할 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대마도 정벌 자체에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상왕의 강경론에 밀려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상왕인 태종의 죽음으로 대일정책을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세종은 대마도 정벌을 통해 알게 된 일본국정을 검토하여 착실한 방어태세를 갖추는 한편, 평화적인 우호관계를 확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일본으로부터의 渡來者에게는 여러 가지 우대정책을 펴면서도 제한을 가하는 규정을 차례로 만들어 통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왜구의 침략은 사라지고 무역질서가 바로잡혀 교린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세종대에 많은 규정이 만들어졌고, 세조대에 종래의 규정이 한층 정비되어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세조의 신임을 받으며 오랜 기간 외교를 담당해오던 申叔舟는 오랜 경험에 입각하여 성종대에 대일관계의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보완하여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였다. 또한 신숙주는≪海東諸國紀≫를 편찬하여 대일관계의 연혁과 현행의 규정을 계통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세종대부터 시작된 일본통제정책을 완성시켰다. 銅印授給, 書契發行權, 對馬島主文引, 歲遣船約定, 通信符制 등을 통해 도래자의 통제를 가하며, 浦所의 한정, 上京道路의 지정, 諸使應接의 定例를 통해 기강을 확립시켰던 것이다.

 조선은 태조 이래 고려시대의 예에 따라 九州探題나 大內氏 등 일본 변경의 유력자에 대해 사신을 보내 왜구의 금압과 피로인의 송환을 요구하여 왔다. 이러한 경향은 실정막부와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명은 足利將軍 외에는 일체 통교를 금지시켰으나, 조선은 장군 외에도 管領·구주탐제·대내씨·島津氏·宗氏 등 중앙과 지방의 유력자뿐 아니라 박다상인에 이르기까지 통상하고 왕래할 수 있도록 인정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대일관계는 명의 대일관계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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