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1.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 5) 조선의 대외관

5) 조선의 대외관

 흔히 조선의 대외정책을 사대교린이란 말로 압축하여 표현한다. 사대교린이란≪孟子≫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齊宣王이 이웃 나라와의 교린의 도를 묻자 맹자가 “오직 仁者가 능히 大로써 小를 섬기니 이런 까닭에 湯이 葛을 섬겼고 文王이 昆夷를 섬겼습니다. 오직 智者만이 능히 小로써 大를 섬기니 太王이 獯鬻을 섬기고 句踐이 吳를 섬겼습니다. 大로써 小를 섬기는 자는 天을 樂하는 자이고 小로써 大를 섬기는 자는 天을 畏하는 자이니, 天을 樂하는 자는 천하를 보전할 수 있고 天을 畏하는 자는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다. 맹자는 원래 교린의 도를「仁者의 事小」와「智者의 事大」로 나누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誠으로써 사대외교를, 일본과 여진 등에 대하여는 信으로써 교린외교를 펴나간다는 것이 조선의 사대교린정책이다. 조선의 사대교린은 곧≪맹자≫에 나오는「지자의 사대」와「교린의 도」를 결합시킨 용어이며,「인자의 사소」라는 개념을 버리고 대신「교린」의 일반적인 의미를 축소시켜 일본·여진 등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종 16년(1485)에 반포된≪經國大典≫의 禮典에는「사대」의 항목 외에「교린」이란 항목은 없고, 다만「待使客」의 항목속에서 중국사신의 접대의례라든지, 일본·유구·여진에 대한 접대절차 등을 함께 간단히 규정해 놓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대교린정책의 실질적 내용은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다고 할지라도 법제화된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인 주권국가의 관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던 15세기의 동아시아세계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가 당시의 국제질서를 규정하고 있었다. 원나라를 구축하고 등장한 새로운 漢族왕조인 명이 조공제도의 범위 내에서만 교류를 인정하는 책봉체제를 통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강화시켜 나가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각국이 중국이 요구하는 조공관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조공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획득할 수 없음은 물론 선진문물을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자국의 안보를 보장받지 못하는 일도 현실적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중국과의 교류를 바라는 동아시아 각국에게 조공제도는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국제질서로서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게도 명제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정치·군사대국이었으며, 또한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한 경제대국으로서 가장 중요한 교역의 대상국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이던 유교의 종주국이며 또한 과학기술을 비롯한 문화적 선진국이기도 하였으므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계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커다란 저항감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 국제적인 대외교섭의 범위가 극히 한정되어 있던 조선에게 중국은 동아시아 밖의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중요한 정보창구였음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있으며 한중관계의 오랜 역사속에서 조공제도를 체험해 온 조선은 중국이 요구하는 조공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명분적으로는 다소 굴욕적인 점을 감수하더라도 실리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며 동시에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고려말 이래 명에 대한 조공을 통한 사대외교는 “小로써 大를 섬김은 保國의 道로서 우리 나라는 삼국통일 이후 大를 섬기기를 부지런히 힘써 왔다”513)≪太祖實錄≫권 1, 總書 신우 14년.는 유교적 가치로 정당화되고 합리화되었다.

 이러한 사대조공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에는 조선 중기 이후와는 달리 중국에 대해 조선의 자율성과 자존의식을 강조하는 주자학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이 중국대륙의 부속물이 아니고 자기완결성을 지닌 하나의 세계로서 파악하는 五福太一신앙이 존재하였다든지, 조선왕조의 역성혁명을 천자인 명 태조의 승인보다 먼저 天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려는 노력이라든지, 고려시대부터 존재해오던 郊祀의 존속을 주장하는 움직임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사상과 의식 자체가 모두 궁극적으로 중국문화의 소산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중국적 발상을 빌리더라도 일부 주자학자들에 의해 조선의 자율성과 자존의식을 높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조선 중기 이후와는 다른 경향이 아닐 수 없으며, 주자학이 반드시 후일의 사대주의를 조장하는 기능만을 수행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일면이 있다.514)山內弘一,<李朝初期に於ける對明自尊意識>(≪朝鮮學報≫92, 1979).

 조선의 사대외교를 펼치는 유일한 대상이 중국이었다고 한다면, 교린외교의 대상으로는 일본·유구·여진·南蠻 등이 있었다. 교린의 외교의례적 개념은「敵國抗禮」로서, 서로 필적할 만한 나라가 대등한 자격으로 교류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 안에서 동아시아 각 국이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체제를 제대로 갖추고 있으며 동시에 명의 책봉을 받고 있던 나라는 일본과 유구,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몇 나라이고, 여진은 명의 군정기관인 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衛所의 단위로 분할 관리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고려말 이래 조선과 일본과의 통교는 조선국왕과 일본국왕 즉 室町幕府 장군간의 관계뿐 아니라, 일본 내의 守護大名 등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과도 다원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는 점에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이는 실정막부의 장군이 무력한 천황을 제치고 외교권마저 장악하여 대외적으로는 일본 국왕으로 행세할 정도가 되었으나, 유력한 지방의 호족을 완벽하게 통어할 만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였다. 조선은 물론 이러한 다원적인 복잡한 관계를 바라지 않았으나,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고 난 다음부터는 현실에 입각한 통교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조선은 실정막부의 장군이 보낸 사절 이외에는 모두 대마도주 종씨의 통제를 받도록 조정하는 등 대일외교의 일원화를 끊임없이 추구하여 나갔다.

 그러나 조선이 완전히 대등한 관계로서 일본을 상대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증거도 적지 않다. 이는 실정막부가 완전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지 못하여 지방호족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 이외에도, 조선과의 교역을 통하여 경제적 욕구를 반드시 충족시켜야 되는 일본의 필요성, 그리고 조선의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볼 때 일본은 야만적인 풍속을 가진 나라로 인식되었다는 점 등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은 중국이 주변의 민족에게 그러했듯이 일본을 羈縻정책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가장 밀접한 관계를 지닌 대마도주 종씨를 비롯한 일본의 지방호족들은 사실상 조공무역의 형식을 빌어 조선과 교류하였다. 이러한 점은 유구왕국의 경우에도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조선 초기의 일본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숙주가 왕명을 받아 성종 2년(1471)에 편찬한≪해동제국기≫를 빠트릴 수 없다.≪해동제국기≫는 일본통제정책의 결과 약정된 세종 25년(1443)의 癸亥約條 이후 조금씩 이완되어 간 통제를 다시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편찬된 것이다. 일본의 지리·국정·풍속 외에도 交聘의 연혁이나 통상에 관한 규정을 모아 놓아, 조선 초기의 대일본인식을 정리하였으며 앞으로의 대일외교의 준칙을 마련한 셈이었다.

 조선에 의해 일본인이 왜인으로 불린 것처럼 보통 野人으로 불리던 여진인들은 15세기에는 아직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부족단위로 수렵과 어로 또는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다. 조선은 여진의 부족장들을 지역과 종족에 따라 부족단위로 일일이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비록 같은 교린관계라고 하더라도 조선과 여진의 관계가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처럼 전개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여진은 조선으로부터 회유와 정벌을 함께 받는 존재였으며, 조선 초기는 바로 회유로부터 정벌로 정책이 차츰 전환되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과 가장 깊은 관계를 지녔던 여진은 오도리와 오랑캐가 중심이 된 建州女眞이었다.

 식량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이 결핍된 여진은 進上肅拜라는 사실상의 조공을 통하여 조선의 후한 回賜品을 받거나, 무역소를 이용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 그러나 자연재해로 기근이 발생하거나 전란 등으로 절박한 경제적 위기가 일어나는 경우, 여진은 돌연 조선의 변경을 침입하여 牛馬나 사람을 약탈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은 이러한 여진인의 성품을 으레「人面獸心」으로 요약하였다. “野人의 성품은 仁義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仁으로 어루만져도 은혜로 생각치 않고 도리어 豹狼의 마음을 품는다”라는 표현이 조선의 대표적인 여진관이라고 할 것이다.515)≪世宗實錄≫권 77, 세종 19년 4월 기사.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의 여진을 조선에 점진적으로 동화시켜 나가려던 태조의 회유정책은「왕자의 난」 및「趙思義亂」과 오도리의 명나라 복속이라는 국내외적인 계기로 말미암아 태종 때부터 바뀌기 시작하여, 응징의 필요성이 있거나 적절한 기회가 있으면 조선은 무력행사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부터 ‘恩威並用’의 대여진정책이 구사되기 시작하였는데, 세종 때 6진을 개척한 咸吉道都節制使 金宗瑞의 다음과 같은 말은 여진에 대한 조선의 인식과 정책을 극명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儒者들이 한결같이 이르기를 夷狄을 상대하는 道란 오면 막지 아니하고 가면 붙들지 아니하여, 원한을 맺지 아니하고 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화친이 귀중하니 이를 이루는 자는 안전해지고, 이를 잃는 자는 위태해진다고 말합니다. 신도 역시 늘상 이와 같이 말할 따름입니다. 신이 북쪽 변방으로 나와 지키며 오랑캐들과 섞여 지내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그 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는 바, 胡人들은 천태만상으로서 어느 한 가지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恩이 없으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고, 威가 없으면 그들의 의지를 두렵게 만들 수 없습니다. 恩이 지나치게 되면 교만해지게 되고 威가 지나치게 되면 원한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원한으로 분란을 일으키려는 자라도 威가 두려워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수도 있고, 교만으로 골칫거리가 되는 자라도 가볍게 무시해버리면 독기를 내뿜는 수가 있으므로, 恩威는 어느 한 쪽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世宗實錄≫권 75, 세종 18년 11월 경자).

 조선 초기의 교린정책은 여진과 일본에게 공동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조선은 일본보다 오히려 여진을 상대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느꼈다. “우리 나라는 남으로 島倭와 이웃하고 북으로는 野人과 접해 있는데, 모두 방어에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그런데 남방은 왜구들로서 복종을 해오기 때문에 방어를 조금 늦출 수가 있으나, 북방은 야인들로서 형세는 마치 투항해오는 것 같으나 마음으로는 성심껏 복종하지 아니하니 방어가 제일 어렵다”는 말은, 일본과 같은 교린외교의 대상이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여진에 대한 조선의 인식과 평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516)≪世宗實錄≫권 64, 세종 16년 6월 병오.

<朴元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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