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1) 대명정책
  • (2) 태조 즉위의 승인과 국호개정

(2) 태조 즉위의 승인과 국호개정

 조선왕조가 수립되는 과정은 정치적으로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우왕 14년(1388) 위화도회군과 그에 따른 우왕의 폐위 및 최영의 축출이다. 둘째는 다음해「廢假立眞」을 이유로 한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이다. 셋째는 공양왕 4년(1392) 드디어 尹彛·李初誣告사건을 빌어 마지막 반대세력을 숙청한 다음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가 즉위한 것이다. 우왕의 폐위로부터 불과 4년만에 창왕과 공양왕을 거쳐 이성계의 즉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즉위한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라는 국호도 그대로 두고 儀章과 법제도 전과 같이 유지함으로써 민심의 격동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자 하였다.

 태조는 즉위한 다음날 都評議使司 및 대소신료와 閑良·耆老의 명의로 知密直司事 趙胖을 보내어 門下侍中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한 사유를 조심스럽게 명의 禮部에 먼저 알렸다. 그리고 다음달에는 대동소이한 내용을 정식의 表文으로 작성하여, 權知高麗國事 이성계의 명의로 前 密直使 趙琳을 명 태조에게 보내어 즉위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명의 즉위승인을 받는 일은 국제적으로 명과의 우호관계를 도모하고 국내적으로는 왕권을 확립하며 신왕조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데 절대적으로 긴요하였다.

 먼저 조반이 가지고 간 문서를 받은 명 예부는 이를 즉시 명 태조에게 보고하였다. 명 태조는 이성계가 일을 꾸민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확연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던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선의 우려와는 달리 왕조교체를 다음과 같이 선선히 기정사실로 인정하여 주었다.

삼한의 신민이 이미 이씨를 높였는데 백성들에게는 兵禍가 일어나지 않으며 사람들마다 하늘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곧 帝命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封疆을 조심하여 지키도록 하고 거짓을 일삼지 않는다면 복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0월 경오).

 명 태조로부터 즉위승인을 받은 조선 태조가 時坐所로 돌아와 백관의 축하를 받았음은 물론이며, 태조는 곧 바로 門下侍郎贊成事 鄭道傳을 謝恩使로 명의 남경에 파견하였다.

 한편 조반보다 한 달 늦게 권지고려국사 이성계 명의의 표문을 가지고 명에 갔던 조림에게, 명 태조는 심상치 않게 잦은 왕위교체의 이유를 짐작하지만 이에 간여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조림이 가지고 온 명 예부의 咨文에서 명 태조는 조선의「聲敎自由」를 다시 한번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 바꿀 국호가 무엇인지 조속히 알려달라고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고려는 산이 경계를 이루고 바다가 가로막아 하늘이 만들어준 東夷이므로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는 아니다. 너희 예부에서는 회답하는 문서에 聲敎를 자유로이 할 것이며 과연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의 마음에 맞추어 동이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변방에서 釁端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使節이 서로 왕래하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그 나라의 복이 될 것이다.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국호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빨리 보고하도록 하라(≪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1월 갑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로운 양국관계의 출발에 크게 고무된 조선 태조는 그대로 두었던「고려」라는 국호를 고치기로 결심하고 기로와 백관을 도당에 모아 새로운 국호를 의논하였다. 그 결과「朝鮮」과 태조가 출생한 永興의 옛이름인「和寧」의 두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藝文館學士 韓尙質을 보내어 명 태조에게 두 국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주기를 요청함으로써 더욱 겸양의 태도를 나타내었다. 명 태조는 “동이의 국호에 조선이란 이름이 아름답고 또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그 이름을 이어받고,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고「조선」이란 국호를 지정하여 주었다. 조선에서 국호의 선택까지 명에 의뢰한 것은 지나친 사대외교이며 자주성의 상실이라는 비난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공민왕이 죽은 이후 험악해진 양국관계나 왕조교체에 따른 난제를 풀어가기 위하여 우선 명과의 외교적 마찰을 최대한으로 회피할 필요성이 절실하였으므로 실리를 위한 명분의 양보를 보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517)신석호,<조선왕조 개국 당시의 대명관계>(≪국사상의 제문제≫1, 국사편찬위원회, 1959), 104쪽.

 조선은 門下侍郎贊成事 崔永址를 명에 보내어 사은하게 하는 동시에 政堂文學 李恬으로 하여금 명이 수립된 직후 공민왕이 명 태조로부터 받았던 金印을 반환하게 하였다. 그러나 최영지가 安州에 이르렀을 무렵 사은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 도중에 있던 정도전 일행과 만나게 되었다. 정도전은 최영지가 사신으로 명에 파견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고 잠시 머물러 있게 한 다음 개경으로 돌아와, 태조에게 최영지가 서북면에서 오랫동안 군사를 거느려 중국에 잘 알려져 있으므로 가벼이 보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건의하였다. 태조는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영지를 도중에 소환하고 이염에게 사은사의 임무를 겸하게 하였다.

 최영지가 서북면에서 오랫동안 군사를 거느렸던 사실이 왜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조건이라고 정도전은 판단하였을까. 이는 최영지가 고려말 이래 서북면 일대에서 벌인 군사활동의 범위가 어쩌면 압록강을 넘어 비록 소규모일지라도 명군과도 몇 차례 충돌한 사실이 있거나, 적어도 명 태조가 극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여진유인에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따라서 정도전은 최영지의 이러한 과거의 군사활동을 염두에 두고, 자칫하면 명에 사신으로 잘못 갔다가 희생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 使行의 귀로에서 처음으로 요동정벌의 가능성을 토로함으로써 명 태조로부터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기 시작하였으며, 귀국하자마자 바로 判三司事에 임명되고 義興三軍府事를 겸임하여 군제개혁과 군비강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조선이 우호적인 양국관계의 정립을 위해 국호조차도 명 태조에게 선택하여 주기를 요청하는 사대외교의 뒷면에, 자주적으로 조선의 국운을 개척하려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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