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 명과의 관계
  • 4) 중요한 현안문제
  • (3) 고명·인신문제와 명의「정난의 역」

(3) 고명·인신문제와 명의「정난의 역」

 조선은 명으로부터 誥命과 印信을 받음으로써, 역성혁명에 의한 조선왕조의 수립에 정통성을 확인받고 동시에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4년(1395)에 정총을 파견하여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였으나, 도리어 그 주청문 때문에 2차 표전문제를 일으키고 말았으며 요청은 간단히 거절당하였다. 표전문제와 요동정벌계획으로 인한 양국의 갈등이 사라진 다음, 조선은 고명과 인신을 받기 위한 노력을 재개하게 되었다.

 당시 명에서는 명 태조가 명제국의 창건자로서 절대적인 황제권력을 쌓아오고 행사하던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권력 구조를 형성하기 위한 개편과 조정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명 혜제는 자신의 정권을 확립시키기 위해서 우선 이미 군사력이 너무 비대해져 중앙집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諸王세력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명 혜제는 齊泰·黃子澄의 주장에 따라 과감하게 ‘削藩’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머지않아 자신에게 닥쳐올「삭번」을 눈앞에 둔 北平의 燕王은 드디어 태조 7년에 반란을 일으켜 명 혜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명은 3년간에 걸친「靖難의 役」이라는 내전에 휩쓸리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정종 2년(1400) 또 한 차례의「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李芳幹이 숙청되고 이방원이 왕세자가 됨으로써 왕위획득에 또 한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조선은 조선 나름대로 정국이 유동적인 가운데서도 명의 내전의 향배에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禹仁烈을 하정사로 보낼 때 다시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였다. 그 무렵 명의 定遼衛人 12명이 조선으로 도망와서 황실이 크게 어지러우며 연왕이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이 정보로써 조선은 명의 내전이 아주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정치권력의 실력자였던 이방원은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여 태종이 되었으며 곧 李詹과 朴子安을 奏聞使로 명에 파견하여 정종의 양위와 자신의 습위사실을 보고하였다.

 한편 眞定과 白溝河에서 연왕군으로부터 두 차례의 패배를 당한 명 혜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하며 조선에 대해서도 회유의 자세를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명사 陸顒과 林士英을 보내 조선에 전달한 조서 속에서 명 혜제는 사악함에 현혹되지 말고 거짓에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정사 禹仁烈을 접견한 명 혜제는 명 태조가 조선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끝까지 틀어쥐고 있던 고명과 인신을 선선히 허락하였다. 그러나 고명과 인신을 지닌 명사가 남경을 떠난 지 며칠 후 정종이 갑자기 풍질로서 시력과 청력에 장애를 일으켜 이미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의 정세와 동향에 대해 크게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은 당시 조선에 체류 중이던 명사 육옹과 임사영이 귀환하기를 기다려 조선의 정세를 확인한 다음 고명과 인신을 수여하기 위해 얼마 전에 조선으로 출발한 사신을 도로 불러들이었다.

 명사 육옹과 임사영은 귀국할 때 조선의 사은사 일행과 함께 동행하였는데, 사은사는 이 때 또 한 번 고명과 인신을 내려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명사 육옹과 임사영이 돌아와 명 혜제에게 조선의 사정을 보고하기 전에 이미 명 혜제는 왕위계승의 당부를 애써 가리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다음날 주문사 이첨과 박자안이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예부 문서 속에서 명 혜제가 태종의 습위에 대해 천리와 인륜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조선이 하는 대로 맡기라고 말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명 혜제는 중국이 내전의 와중에 빠져있는 지금 조선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조금도 현명한 처사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조선을 회유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첨과 박자안이 가지고 온 예부자문을 받고 태종은 곧 判三司事 우인열을 명에 보내 사은하였다. 이어서 명 혜제가 보낸 명사 章謹과 端木禮가 조선에 도착하여 조선 국왕의 고명과 인신을 전달하였다.545)朴元熇,<明「靖難의 役」時期의 朝鮮에 對한 政策>(≪釜山史學≫4, 1980).

 「정난의 역」에서 패색이 짙어져 감에 따라 명 혜제는 조선에 대해서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 1만 필의 교역을 부탁하며, 이례적으로 조선 국왕과 태상왕 및 상왕을 비롯하여 陪臣 24명에게도 文綺絹 등의 후한 하사품을 보내왔다. 교역으로 보낸 마필들은 주로 요동의 관군에게 지급되어 연왕군과의 전투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조선이 명 혜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명과 고려·조선과의 마필교역은 홍무연간에도 명의 요청에 따라 수시로 이루어져 왔다. 조선은 항상 중국의 현존하는 정통적 정권과의 조공관계를 중시하여 그 요청을 존중하였던 것이지「정난의 역」이라는 내전에서 어느 일방이 승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외교적 모험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은「정난의 역」의 결과 建文政權이 무너지고 永樂政權이 수립되고 나서 명 성조가 역시 마필교역을 요청하였을 때도 조선이 이에 부응하여 상당한 기간동안 교역이 진행된 사실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정난의 역」의 확대에 따라 요동까지도 명 혜제군과 연왕군이 격돌하는 전장으로 바뀌자 피난민과 패잔병들이 전란을 피하여 조선으로 밀려드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였다. 조선으로 나온 이들 漫散軍民들은 거의 대부분이 원래 조선출신으로서 그 동안 요양 등지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이었다. 조선조정에서는 만산군민을 송환시켜 달라는 요동 總兵官의 요구에 대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다가 결국 하륜 등의 의견을 좇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이 몇 차례에 걸친 명의 송환요구를 묵살하면서까지 자기 방침을 강행하게 되는 데는 패망 직전에 와 있는 건문정권의 권위하락이 그 배경에 깔려 있었다. 조선은 이미 태종 2년(1402) 3월에 의주로 도망 온 요동군 朱景 등이 제공한 “2월 11일에 征燕軍이 도망가거나 흩어진 수가 셀 수 없고 민가를 침입하므로 본토로 도망 나왔다”는 정보에 의해 명 혜제군이 궤멸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은 몰락이 임박한 건문정권의 송환요구를 묵살하고 2만에 가까운 만산군민을 받아들였다.

 「정난의 역」은 태종 2년 6월에 이르러 남경이 연왕군에 함락당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남경이 함락되어 명 혜제가 자살하고 연왕이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은 3개월이 지나서 비로소 조선에 알려졌다. 명의 새 황제인 명 성조가 보낸 사신 兪士吉과 汪泰 등이 조서를 지니고 입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태종은 즉각「건문」 연호의 사용을 정지시켰다. 이 때부터 조선은 내전의 결과 새로이 탄생된 영락정권에 대해 실로 기민하게 대처하기 시작하였는데, 명사가 아직 개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명 성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보낼 賀登極使로 하륜을 선정해 놓았다. 명사일행이 개경에 도착하여 조서를 宣讀한 다음날부터 조선은 다시「홍무」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하등극사 하륜을 하정사 趙璞 일행과 함께 즉각 남경으로 출발시켰다.

 명사가 도착한 다음날 바로 축하사절을 파견한 조선의 민첩한 대응은 명 성조로 하여금 기쁨에 넘친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하등극사 하륜은 하정사 조박과 현지에서 의논한 끝에 새로운 고명과 인신을 예부에 청구하였던 바, 명 성조는 그「識時通變」함을 가상히 여겨 조선사신일행을 더욱 후대하였다. 조선은「정난의 역」기간 건문정권과 가졌던 우호관계가 영락정권과의 새로운 관계수립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던 반면, 명 성조는 과거 조선과 건문정권과의 유대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불문에 부쳤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란에 의해 정권을 획득한 자신의 약점을 엄폐하기에 더욱 급급하였다.

 조선이 명의 영락정권과 대처해 나가는 과정에는「정난의 역」 때 받아들인 만산군민문제가 필연적으로 다시 대두되기 마련이었다. 만산군민을 송환하라는 左軍都督府의 자문을 정식으로 받은 조선은 태종 3년 1월 3,649명을 우선 송환하고, 3월에는 黃居正을 명에 보내 나머지 만산군민을 송환하며 다음과 같은 인원수를 회보하였다.

총 계 13,641명
송환중
도망중
병 사
10,920명
2,225명
496명

<표 5>

 태종은 만산군민문제로 영락정권과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조리 송환시키겠다고 몇 차례 다짐하면서도, 결코 적극적으로 송환에 협조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송환에서 누락된 만산군민에 대해 이후에도 명이 집요하게 추가송환을 요구함에 따라 조선은 상당한 기간동안 소규모의 송환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정난의 역」이 본질적으로는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명 혜제나 연왕의 어느 편에도 적극 협조하는 것을 삼가함으로써 후일 승리할 어느 일방으로부터 가해올지도 모를 보복을 회피하였다. 조선은「정난의 역」을 전후하여 현저하게 입장이 약화되어 회유정책으로 일관한 건문정권과 내전으로 탄생된 영락정권으로부터 몇 가지 외교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은 왕조가 창건된 이래 명 태조로부터 받지 못하고 있던 조선국왕의 고명과 인신을 건문정권으로부터 비로소 받게 되었다. 태종이 명으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는다는 사실은 당시의 조선으로서는 커다란 정치적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명의 황제가 부여하는 고명과 인신은 조선왕조 수립의 형식적 완결과 태종즉위의 합법성을 확인해주는 의미에서, 당시 조선의 불안한 정치상황 속에서는 왕권확립에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546)朴元熇,<明「靖難의 役」에 대한 朝鮮의 對應>(≪亞細亞硏究≫70, 1983).

 사실 오랫동안 명 태조의 고압정책에 시달려오던 조선에게는 명의「정난의 역」이 다소 불안한 요소이기는 했지만, 그 기간에 명 혜제의 회유정책으로 말미암아 가장 순탄한 대명관계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국의 그러한 밀월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영락정권이 탄생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여진귀속문제가 대두하게 되어, 홍무정권기 양국간에 갈등과 분규의 초점이었던 요동문제가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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