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3. 여진과의 관계
  • 1) 대여진정책
  • (1) 회유정책

(1) 회유정책

 조선 초기의 대여진정책은 회유정책을 근본으로 삼았고 회유정책은 事大交隣의 원칙을 준용하였다. 조선은 明에 대하여 사대의 예를 행한 반면에, 북방 女眞族의 대소 추장들과 남방의 일본 室町幕府·領主들과는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전자는 1대 1의 국가관계였으나 후자는 1대 다수, 즉 국가와 다수개인과의 관계였다. 왜냐하면 당시 여진사회가 통일되지 아니하고 나누어져 대소 추장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으므로, 조선에서는 이러한 대소 추장들을 지역별로, 종족별로 나누어 그들의 상하 지배관계에 의하여 개별적으로 일일이 상대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형편도 이와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교린관계는 사대관계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웠다.

 조선의 사대교린정책은 15세기 전반기 세종대에 완전히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朝貢을 근간으로 하는 상하관계인데, 세종은 조선에서 중국의 天子에게 조공하는 사대의 예를 북방의 여진족과 남방의 일본·유구에 대하여 그대로 적용하려 하였다. 말하자면, 조선을 중심으로 이중적 상하관계를 수립하고, 그 외교적 주역을 조선이 담당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세종대에 중국·일본·만주를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조선이 주도하였다.551)中村榮孝,≪日鮮關孫史の硏究≫(上)(吉川弘文館, 1965), 265∼278쪽.

 조선의 대여진 회유정책은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에게 조선과 조공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에 대하여, “오면 막지 아니하고, 가면 붙잡지 아니한다”라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것은 조공관계가 처음의 정치적 의미보다 점차 경제적 이해를 중하게 여기는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세종대 사대교린정책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만주에 살던 여진족의 대소추장들을 招撫하여 조선에 복속시키려는 정치적 의미가 강하였으나, 명의 成祖(永樂帝)가 만주경략을 끝마치고 建州 3衛를 설치한 다음부터는 여진족 추장들이 조공하고 복속한다고 하더라도 조선에서 국토개척을 이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이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조공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반면, 조선에서는 여진족의 조공을 도리어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먼저 세종대 이전에 정치적 의미가 강하였던 대여진 회유정책의 조공관계를 살펴보면, 태조대와 태종대 사이에도 커다란 차이를 나타낸다. 태종 2년(1402) 趙思義亂을 계기로 태조대의 대여진 동화정책은 여진정벌과 복속정책으로 바뀌었다.

 태조 李成桂는 東北面 출신이었다. 이성계가 고려 말엽 창궐하던 왜구를 물리치고 무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동북면 출신의 私兵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출신지가 동북면 永興이었으나, 본관은 全州 李氏였다. 처음에 고조부 李安社(穆祖)가 전주에서 170호를 거느리고 삼척을 거쳐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서, 元의 開元路에 소속된 南京부근(오늘날의 延吉)의 斡東[오동]지역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안사는 고종 41년(1254) 원으로부터 남경 등지를 지배하던 5千戶所의 首千戶 겸 達魯花赤[다루가치]의 직위를 받았다.552)≪太祖實錄≫권 1, 總書. 그가 관할하던 지역은 오늘날 海蘭河·布爾合圖河 유역의 北間島 지역으로서 고려 때부터 東女眞의 斡朶里[오도리]족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오동에 거주하던 이안사는 5천호소의 여러 성을 왕래하면서 다루가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 李行里(翼祖)는 다른 여진 천호들과 불화하여 오동의 기반을 상실하고 남하하여, 충렬왕 16년(1290) 雙城總管府의 登州(오늘날의 安邊)로 이주하였다. 이 때 오동에 살던 많은 백성들이 뒤따라 남하하여 咸州(함흥)평야에 자리잡았다. 함주의 歸州·草古臺·王巨山·雲天·松豆等·都連浦·阿赤郎耳 등지에 오동의 백성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함주는 당시 ‘오동 逸彦’(ilgen)이라고 불렸다. ‘일언’이란 여진어로 백성을 뜻한다. 이리하여 이행리도 함주로 이주하여 이들을 관할하였는데, 충렬왕 26년 다시 원으로부터 장성 등지의 高麗軍民 다루가치에 임명되었다.

 그 뒤를 이은 李椿-李子春-이성계는 원의 천호 겸 다루가치의 지위를 세습하여 함주·등주·和州(영흥)의 고려인과 여진인의 ‘오동 일언’을 지배하였다. 고려 말엽에 이성계가 거느렸던 사병이 바로 이러한 오동 백성으로 구성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오동이란 지명은 오도리족과 관계가 있는데 이성계의 사병은 대다수 이러한 여진족으로 조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553)金九鎭,<吾音會의 斡朶里女眞에 대한 硏究>(≪史叢≫17·18, 高麗大, 1973), 98쪽.

 고려 말엽에 동북면지역은 이와 같이 여진인과 고려인이 뒤섞여 살고 있었는데, 오히려 여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씨 일가는 마천령 이남의 오늘날 함경남도 일대의 함주·등주·화주 등지를 그 세력기반으로 하는 동북면 대토호로 성장하여 쌍성총관부의 趙氏·卓氏 세력과 대립하였다. 이씨 일가는 공민왕 5년(1356) 고려의 군사를 불러들여 쌍성총관부를 함몰시키고, 조씨·탁씨 세력을 쫓아낸 다음에 마천령 이남의 모든 管下民戶를 차지하였다.

 한편 마천령 이북의 오늘날 함경북도 일대를 장악한 여진족 대추장은 參散(오늘날의 北靑) 千戶 李之蘭(董豆蘭帖木兒;퉁두란티무르)이었다. 북방의 대토호로서 마천령 이북의 여러 여진족들을 지배하던 이지란은 남방의 대토호 이성계의 집안과 세력다툼을 벌이다가, 마침내 이성계의 휘하로 들어왔다. 그 결과 이성계의 세력은 동북면 전체의 여진족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 군사도 동북면의 여러 여진족들의 추장과 그 관하 민호로 구성되었다.

 당시 동북면 토호들에게 예속된 관하 민호를 家別抄(加別赤;gabechi)라고 불렀다. 이들은 추장에게 군역과 조세를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잡역도 부담하였다. 가별초란 여진어로 활(gabe)을 쏘는 弓士를 의미한다. 이처럼 사병이 동북면의 가별초로 구성되었으므로, 이성계는 고려 말엽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여진의 궁술로써 커다란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씨 일가가 세전하던 동북면의 가별초 5백 호는 李芳蕃이 세습하였다가「왕자의 난」이후 李芳遠이 차지하였다. 이지란의 가별초는 그의 아들 李和英이 승계하였는데, 태종이 사병을 혁파할 때 이것을 모두 해체하여 국가의 編氓으로 편입시켰다.554)≪太宗實錄≫권 21, 태종 11년 6월 병오.

 이성계가 사병을 거느리고 동서로 다니며 정벌할 때 牧丹江·松花江이 합류하는 만주의 三姓[이란] 지방에 있던 오도리·火兒阿[할아]·托溫[타온]의 3萬戶府의 추장들은 활과 칼을 차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종군하였다고 한다.555)≪太祖實錄≫권 8, 태조 4년 12월 계묘. 이 때 이성계를 따라 종군한 여진족의 대추장들을 보면, 오도리 만호 童猛哥帖木兒[퉁멍거티무르]·할아 만호 阿哈出(於虛出;어허추)·타온 만호 卜兒閼[불어]·哈蘭[하란]·다루가치 阿朗哈[하란캐]·삼산 천호 이지란 등 두만강내외 지역에 살던 30여 명의 대추장들이었다.

 이들을 종족별로 보면, 토착여진·오도리족·兀良哈[오랑캐]족·嫌眞兀狄哈[우디캐]족·南突우디캐족·骨看우디캐족을 총망라하였다. 지역별로 보면 두만강 이남의 함흥에서 두만강 하류까지, 두만강 이북의 목단강·綏芬河·송화강까지 동부 만주의 광범위한 지역을 포함하였다. 상하 세력관계를 보면, 퉁멍거티무르는 建州左衛의 開祖로서 淸을 세운 누르하치의 직계 조상이며, 어허추는 建州本衛의 개조로서 李滿住의 조부이며, 여러 우디캐는 野人女眞 가운데 최강의 종족들이었다.

 종래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고≪太祖實錄≫을 편찬한 자들이 태조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고의적으로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동북면 세력기반을 면밀히 분석하면, 이러한 기사가 사실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성계의 세력이 강해지자, 동북면은 물론이고 만주 동북지역의 여러 여진족들도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와서 사병에 가담하였다. 당시 이성계의 사병은 만주 8旗兵과 같이 대소 추장과 그 관하 민호인 가별초로서 조직된 씨족 단위의 군대였다고 생각된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2년(1393) 태조 이성계의 사병은 대부분 義興三軍府로 통합되었으나, 직계의 가별초는 각각 그대로 소유하고 있다가 태종 11년(1411) 사병을 혁파할 때에 이르러 완전히 없어졌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이러한 대소 여진족의 추장들에게 만호와 천호의 직첩을 새로 주었다. 또 여진 출신의 개국공신 이지란을 동북면으로 보내어 여러 여진족들을 초무하여 미개한 예속을 바로잡고, 조선인과 여진족을 서로 혼인하게 하였으며, 服役과 납세의 의무를 부과하여 조선의 編戶와 다름 없게 하였다. 그 결과 여진족들은 그 추장에게 부역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모두 조선의 편호가 되기를 원하였다.556)위와 같음.
≪龍飛御天歌≫권 7, 제53장.
이처럼 태조대에는 동북면의 여진족들을 조선인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착실히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에서는 두만강 하류 孔州에서 상류 甲山에 이르기까지 邑과 鎭을 설치하여 민사를 다스리고 사졸을 훈련시킴으로써 동북면 1천 리의 땅을 모두 영토로 만들어 두만강을 경계로 삼게 되었다.557)위와 같음.

 이처럼 태조는 여진족 동화정책을 추진하여 조선과 여진의 관계가 매우 원만하였다. 그러나「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神德왕후 康氏의 세력이 몰락하고 李芳遠이 등극하자, 태종 2년(1402)에 安邊府使 趙思義가 강씨와 이방번의 원수를 갚는다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조사의란에 동북면 일대의 이씨 가별초558)이성계의 가별초는 처음에 韓氏 소생의 이방원이 차지하였다가 나중에 강씨소생의 이방번에게로 다시 넘어갔다. 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오도리족·오랑캐족 세력들이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조사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조선과 여진의 관계는 이를 계기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여진에 대한 회유정책을 추진하여 두만강 중류유역의 吾音會(오늘날의 會寧)에 자리잡고 있던 오도리족의 대추장 퉁멍거티무르를 회유·복속시켰다. 태종 4년 3월 오도리의 퉁멍거티무르가 입조하자, 조선에서는 段衣와 銀帶를 하사하여 원대의 오도리 萬戶府의 지위를 보장하여 주고 후하게 대접하였다.559)≪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3월 무신·정사. 두만강 내외지역에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오도리 만호부를 복속시킴으로써 이 지역의 여진족을 조선의 세력권 아래에 두려고 한 것이다. 퉁멍거티무르도 여진사회에서 그의 세력기반을 넓히기 위하여 조선의 배경을 필요로 하였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오도리 만호부를 중심으로 두만강 일대와 만주 내지의 여진족들의 대소 추장을 입조시켜 관직을 주고 회유·복속시켰다.

 그러나 태종 5년 9월에 오도리의 퉁멍거티무르가 명 성조의 초무를 받아들여 명에 입조하자560)≪太宗實錄≫권 10, 태종 5년 9월 임자.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慶源에 설치하였던 貿易所를 폐쇄하여 버렸다. 그 결과 생필품을 구입할 길이 막혀버린 여진족이 격분하여 조선의 변경을 침입·약탈하였다. 태종 10년 2월에 우디캐가 경원에 침입하여 兵馬使 韓興寶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에서는 그 다음달에 毛憐衛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 때 퉁멍거티무르는 조선의 원정군을 피하여 오도리족을 이끌고 어허추의 건주본위가 있던 압록강 북쪽 鳳州로 이주하였다. 그 뒤 퉁멍거티무르는 명에 입조하여 건주좌위를 개설받아, 원대의 ‘오도리 만호부’를 대신하게 되었다.

 태종이 죽은 뒤, 세종 5년(1423) 4월에 퉁멍거티무르는 조선의 허락을 받아 13년만에 정군 1천 명과 부인·아이 도합 1천여 호, 6,500여 명의 오도리족을 거느리고 옛날 근거지인 오음회로 되돌아왔다.561)≪世宗實錄≫권 20, 세종 5년 4월 기해. 이 때 조선에서는 여진족이 양식을 구걸하여 오면 邊將으로 하여금 양식과 鹽醬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또 여진족의 대소 추장이 입조하면 관직을 제수하고 賞賜物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세종은 다시 오도리족의 건주좌위를 통하여 두만강 내외지역의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세종 15년 윤 8월에 퉁멍거티무르 부자가 楊木答兀과 혐진우디캐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고, 나머지 오도리족이 흩어져서 건주본위로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562)≪世宗實錄≫권 61, 세종 15년 윤8월 임신. 그 후 세종은 종래의 소극적인 회유정책에서 벗어나 金宗瑞·李澄玉 등을 보내어 두만강 하류까지 국토를 개척하고 6鎭을 설치하게 하였다.

 결국 태종 이후에 추진한 대여진 회유정책은 정치적으로 여진을 복속·입조시켜 관직을 주고 조선의 세력 아래 두려 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여진 추장들의 進上에 대한 回賜物을 지급하고 변경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민간교역을 통하여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羈縻政策이고 여진의 침략을 막으려는 미봉책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태조대처럼 여진족을 동화시켜 국토를 확대하려는 정책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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