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3. 여진과의 관계
  • 4) 향화야인과 피로인 송환문제
  • (2) 피로인 문제

(2) 피로인 문제

 被虜人이란 여진에 포로로 사로잡혀 노역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말한다. 조선초에 여진에 사로잡혀 사역을 당한 사람들은 주로 중국인이나 조선인 출신의 포로들이었다. 이미 14세기부터 피로인 노예는 여진사회에서 일반화되었다. 당시의 여진사회는 이러한 노예 노동력이 그 경제생산의 중요한 기초를 형성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명대 여진족은 요동지역에서 명의 요동 거주민을 약탈하는 한편, 조선의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거주하던 변방민을 약탈하였다. 피로인은 말할 것도 없이 농경기술을 가진 농민들이었다. 여진족이 변방을 침략하여 노략질해간 피로인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여진의 여러 종족이 끊임없이 침입하여 약탈한 사실이 일일이 역사기록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변방의 방어를 맡은 책임자들은 그 침략과 약탈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러한 사실들을 가능한 한 숨기고 조정에 보고하지 아니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피해상황은 사실보다 축소되어 보고되는 수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러한 내용이 어느 정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통하여 여진의 조선 침입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여진의 침입을 받은 횟수는 약 130여 회에 달하는데, 이러한 침입으로 인하여 변방지방의 수많은 건장한 남녀들이 여진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물론 여진이 약탈해 간 것은 이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마와 가재도구도 포함되었다. 여진사회에서 노예와 우마는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로인은 여진사회에서 예외없이 노예로서 轉賣되었다. 여진에게 사로잡혀 가서 피로인 노예로서 사역당하던 피로인들이 그 고역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쳐 오는 수가 많았다. 도망을 해오는 노예 가운데 명나라 출신 중국인은 모두 요동으로 송환되었다.≪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은 태조대부터 성종대까지 268회에 걸쳐 도합 37,908인을 중국으로 송환하였다.640)金九鎭,≪女眞族의 社會構造≫(신서원, 1995), 204∼216쪽.

 그런데 성종대를 마지막으로 도망노비가 없어진 것은 매우 흥미있는 현상이다. 이는 16세기에 들어가면서 여진사회 자체내에서 계급분화가 일어나 여진족 노비가 생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여진인들도 농경기술을 터득하여 더 이상 외래 농경노예가 필요하지 않았으리라고 믿어진다.

<金九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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