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3) 통교체제의 확립
  • (3) 조일통교체제의 구조와 성격

(3) 조일통교체제의 구조와 성격

 국초 이래 많은 과정을 거쳐 성종대 초기 확립된 대일통교체제의 구조와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초기 조일교섭은 명과 관계없이 양국간에 독자적으로 전개되었지만 태종대부터는 명나라 중심의 책봉체제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 공통적으로 편입되면서 교린국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국왕과 일본 실정막부의 장군은 대등한 자격으로 수호하고 사절을 교환하였는데 이를「敵禮關係交隣」이라고 한다.

 둘째, 조선정부는 실정막부와의 일원적인 통교만이 아니라 관령·유력수호대명·서국지역의 호족·대마도주·수직인·수도서인 등 다양한 세력들과도 독자적인 통교관계를 가졌다. 이른바「다원적인 통교체제」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들과의 통교형태는 조공무역이었다. 이를「羈縻關係交隣」이라고 한다. 일본측 통교자들의 목적은 교역을 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정부는 모두 기미질서 속에서의 외교의례와 조공무역의 형식을 취하도록 하였다.≪해동제국기≫朝聘應接紀에 의하면 일본국왕사 이외의 모든 통교자들은 사송선의 형식을 갖추어야했다. 그들은 圖書가 찍힌 서계와 대마도주의 文引을 지참하여야 했고, 포소에 도착한 후에는 조선국왕에 肅拜를 하도록 하였다. 서울까지 올라오는 거추사의 경우 지정된 도로를 통해 상경하여 국왕에게 숙배하고 토산품을 진상하는 조빙의례를 행한 후 회사품을 받아가는 의식을 하도록 하였다. 조선정부는 그 대신 후한 하사품을 줌으로써 평화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중국의 조빙사대와 같은 방식이었다.

 셋째, 조선정부는 대마도를 매개로 하여 제통교자들을 통제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대마도의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통교체제의 일원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마도 정벌 이후 일본측의 정세를 파악한 세종은 조선측에 순응하는 대마도주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해 주면서 渡航倭人에 대한 관리자로서의 위치를 세워주었다. 세종 2년(1419)의 서계에 관한 약조 체결, 세종 20년의 문인제도 정약, 세종 23년의 孤草島釣魚禁約, 세종 25년에 체결된 계해약조 등을 통해 대마도주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여 대일 외교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조선정부의 의도에 따라 대마도주 宗氏는 도내의 통치권을 확립하였고 조일외교상의 중심적인 위치를 확보하였다.

 넷째, 이러한 조선정부의 노력에 의해 조일통교체제는 고려말 이래의 다원적인 관계에서 중앙정부끼리의 적례관계교린과 대마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타 세력과의 기미관계교린이라는 중층적 관계로 정비되어 갔다. 계해약조 이후 조선의 대일교린정책은 실정막부와의 적례교린과 대마도주와의 기미교린이라는 이원체제로 통합·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측의 의도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계속 다양한 세력들이 사절을 파견해왔기 때문에 다원적인 통교형태가 유지되었다.

 이상 조일통교체제의 구조를 정리해 보았는데, 그 개념과 성격에 대해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다원적 통교체제론」의 문제이다. 고려말 이래 조선 전기까지의 조일통교체제는 중앙정부간의 일원적인 관계만이 아니고 일본내의 다양한 세력들과도 통교하는「다원적 통교체제」였다. 국제관계의 상례에도 벗어나고, 조일양국의 역사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기묘한 외교형태가 전개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를 통제할 수 없었던 실정막부의 권력구조에 기인한 것이었다. 실정막부는 서국지역 호족들의 독자적인 통교를 제한할 실력이 없었으며, 적극적으로 제어하지도 않았다. 이와 함께 여기에는 조선의 대일인식도 관련되어 있다. 세종대 초기의 대일사행원들은 공통적으로 실정막부의 취약성을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는 왜구 통제와 통교무역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서국지역 호족들과 별도의 통교를 하는 체제를 용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측은 통교체제의 정비과정에서 諸酋使의 일원화를 도모하였다. 즉 조선정부는 문인제도를 만들어 막부장군 이외의 사절은 모든 대마도주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고, 계해약조 이후로는 막부장군과 대마도주 외에는 일체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조선정부는 막부와 대마도주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하는 이원적 내지 중층적 통교체제를 지향하였던 것이다.672)이 점에서 볼 때 조선의 대일외교체제와 자세는 조선 전기와 후기에 변화가 없었다. 일본에서는 이 시기 室町幕府에서 德川幕府로 정권이 바뀌었고, 시대도 중세와 근세로 구분될 정도로서 외교체제에도 큰 변동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측의 입장에서는 일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1635년경 확립되는 조선 후기의 조일외교체제도 실은 조선 전기부터 조선정부가 지향하고 있었던 형태였다. 그러나 조선측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일본에서는 이후에도 관령과 유력수호대명·지방호족 등이 별도로 사송선을 보내왔다. 실정막부의 약체화가 진전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 강해졌다. 조선측으로서는 통교일원화를 지향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그것이 일본측의 권력구조에서 파생된 문제인 만큼 불가피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하면, 조선 전기 대일외교체제는 형태적으로는 다원적이고, 성격면에서는 적례관계교린과 기미관계교린의 중층적 체제였다. 이를 단순히「다원적 통교체제」라고 하는 것은 형태만을 본 것으로 성격의 본질을 놓칠 우려가 있다.

 다음으로 적례관계교린의 성격문제이다. 교린의 외교의례적 개념은「敵國抗禮」이다. 교린국이란 서로 필적하는 나라로서 대등한 외교의례를 나누는 국가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책봉체제 안에서 중국에 대해 같은 제후국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실정막부의 장군을 일본국왕으로 인정하여 조선국왕과 대등한 입장에서 사절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영면에서 보면 책봉체제라는 틀에 완전히 구속당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측면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초기 교린의 대상으로는 일본·琉球·여진·南蠻이 있었다. 이 중에서 책봉체제에 편입되어 敵禮의 대상이 된 것은 일본의 실정막부 장군과 유구국왕이었다. 그런데 적례관계를 바로 대등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타당하지 않다.673)孫承喆,<朝鮮의 事大交隣政策과 敵禮關係>(≪新實學의 탐구≫, 열린 책들, 1993).
閔德基,<朝鮮朝前期の日本國王觀-‘敵禮’的 觀點より>(≪朝鮮學報≫132, 1987).
실제 조선 전기 실정막부에 대한 인식과 행례의식을 보면 대등관계라고 볼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조선정부는 일본·유구뿐만 아니라 여진·남만도 교린의 대상으로서 모두광의의 기미정책으로 다루었다. 우선 인식면에서 보면 막부장군에 대해 적례를 행해야 하는 상대자로서 대등하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華夷觀에 입각하여 야만시하는 경향도 강하였다.674)室町幕府 將軍을 ‘倭奴’·‘倭王’이라고 칭한 예도 있었다(≪太宗實錄≫권 14, 태종 7년 정월 갑술 및≪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5월 경인). 일본국왕사에 대한 조선측의 접대의식도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정부는 일본국왕사를 항상 조정의 朝賀儀式에 참가시켰으며, 세종대까지는 조회시 受職人인 여진인 추장의 사절과 같이 3品班次에 배열하였다.675)≪世宗實錄≫권 54, 세종 13년 11월 경오. 또 일본국왕사와 거추사가 같이 조회에 참여하는가 하면 연회에도 동석하였다. 일본국왕사를 조하나 조회에 참석시키는 것은「적례」가 아니고「군신의 예」이다.676)閔德基, 앞의 글, 121쪽. 조선측이 이러한「비적례적」 대우를 한 이유는 실정막부 장군이 일본을 완전히 통괄하지 못하는 ‘여러 통교자 중의 하나’로서 인식된 결과이다. 그 밖에 실정막부의 왜구금지 능력의 부족, 무례한 외교자세, 일본국왕사가 사행시 이익을 구하는 태도, 경제적 지원을 청할 때의 저자세 등도 멸시관을 초래한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조선의 대일교린체제는 책봉체제 안에서의 교린국가로서 적례관계를 유지하기는 하였지만 완전한 대등외교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조선 초기 대일정책을 분석해 보면 漢代의 대외정책이 모범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한대에 개발된 외교정책론은 화친론·기미론·정벌론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기미론은 특히 後漢의 주된 외교정책으로 채택되었다.「기미」란 ‘말의 굴레와 소의 고삐’를 가리키는 것으로 견제 조정한다는 의미이다. 기미론의 핵심은 ‘견제하면서 단절하지 않을 따름이다’에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단절하지 않을’이란 국교를 유지하면서 사절을 교환한다는 뜻이고, ‘따름이다’라는 것은 정복이나 지배와 같은 더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677)金翰奎,<漢代의 天下思想과 羈縻之義>(≪中國의 天下思想≫, 民音社, 1988), 86∼99쪽. 그런데 조선 초기나 임진왜란 후 국교재개기 조정에서의 논의를 보면, 한대의 대흉노정책을 주로 인용하며 기미론을 주장하거나 정당화하고 있다.678)조선 후기 덕천막부와 국교를 재개하여 통신사행을 파견한 것도 기미책의 일환이라고 보았다(≪增正交隣志≫권 5, 通信使行). 조선정부는 막부장군을 일본국왕으로 인정하여 대등한 의례를 거행하였지만 한대의 外夷기미책을 적용하는 넓은 의미에서 기미교린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679)조선정부의 대일정책이 宋의 對遼·對金政策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閔德基, 앞의 글, 137쪽). 15세기 후반기에 편찬된≪해동제국기≫와≪西北諸蕃記≫에서 보이는 국제인식에는「조선중심의 국제질서」라는 구상 속에서 일본·유구·여진이 기미교린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680)河宇鳳,<朝鮮初期 對日使行員의 日本認識>(≪國史館論叢≫14, 國史編纂委員會, 1990), 99쪽. 그런데 이 차원에서의 기미론은 이념적으로는 華夷分別論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상호 독립과 적례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평화적인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정리하면, 조선국왕은 실정막부 장군과 명 중심의 책봉체제 속에 같이 편입되어 적례의 외교의례를 행하였다. 그러나 인식상으로 보면 조선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광의의 기미교린의 대상으로 파악하였으며, 외교의례상으로도 완전히 대등하게 접대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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