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4. 일본과의 관계
  • 4) 대일관계의 변천
  • (2) 사량진왜변과 정미약조

(2) 사량진왜변과 정미약조

 임신약조 이후 세견선 파견수를 보면 삼포왜란 이전의 210척에서 60척으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통제가 엄격해지고 교역규모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마도주는 세견선을 늘려줄 것을 계속 요청하였으나 조선정부는 5척을 증가시켜 30척으로 해주었을 뿐 나머지 요구는 임신약조에 의거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종 39년(1544) 왜선단 20여 척에 200여 명의 대마도인이 蛇梁津(현 경남 통영군 사량면)을 침략 약탈해 간 사건이 일어났다.683)≪中宗實錄≫권 102, 중종 39년 4월 기유. 이것을 蛇梁津倭變이라고 하는데 삼포왜란과는 달리 조직적인 성격이 적은 왜구의 일종이었다. 왜변이 일어난 후 조선정부는 실정막부와 大內·小貳殿을 제외하고 대마도에 대해서는 일체의 통교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막부와 소이전의 거듭된 통교재개 요청과 대마도주의 간청에 의해 3년 후인 명종 2년(1547) 丁未約條를 체결하고 교역 재개를 허락하였다.

 정미약조의 내용은 ① 세견선의 크기와 船夫數 규제 ②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25척으로 줄이고 船上什物 지급제 일체 폐지 ③ 加德島 서쪽으로 접근하는 자는 적왜로 간주 처단 ④ 50년이 경과된 수도서·수직인 접대 폐지 ⑤ 潛商을 금지하고 지정범위 이외에서 행동하는 자는 영구히 접대치 않음 ⑥ 모든 약조는 鎭將의 명령에 복종할 것 등의 6개 조로 되어 있다. 임신약조의 내용보다 더 가혹하게 대마도주의 무역량을 제한하고 수직인·수도서인을 정리하였으며, 위반할 경우 벌칙까지 명시하였다. 정미약조의 체결로 가까스로 교역은 재개되었으나 이전과 같은 평화로운 통교관계는 더 어려워졌다.

 이 시기 일본은 戰國時代(1467∼1568)의 혼란하에 왜구가 다시 성행하고 있었다. 후기왜구로도 불리는 이들은 주로 명의 연안을 노략질하였지만 조선에도 출몰하였다. 사량진왜변 이후 명종 말년까지 대소 30여 회의 왜구침략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명종 10년의 乙卯倭變이다. 이 왜변은 왜선 70여 척이 동원되어 達梁浦(현 전남 해남군 북평면)에 들어와 전라병사와 장흥부사를 살해하고 영암까지 침입한 사건이었다.684)≪明宗實錄≫권 19, 명종 10년 5월 기유. 을묘왜변 이후 조선에서는 備邊司를 설치하여 대일경계를 강화하였다. 사송왜인들의 접대비 지급에 있어서도 비용을 감축하였고, 왜구에 대비하면서 생포된 왜인들도 기술자를 제외하고는 처단하는 강경조치를 취하였다.685)≪明宗實錄≫권 25, 명종 16년 6월 갑자 및 권 29, 명종 18년 8월 갑인. 그리하여 명종대 말기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교역과 왜구가 동시에 진행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 동아시아의 통상권은 기존의 체제와 관계없이 해상에서의 활발한 무역활동에 의해 크게 변모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일간의 교린체제는 이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의 저항과 조선정부의 더욱 엄격한 통제라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다. 비록 대마도가 대조선무역권을 유지하기 위해 충실한 체제수호자의 역할을 하여 그 자체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조일통교체제는 쇠퇴해가고 있었다. 을묘왜변 이후에도 일본국왕사가 파견되어 오기는 하였지만 대마도주에 의한 僞使가 대부분이었다. 실정막부는 16세기 전반기 대명무역을 大內殿에게 넘겨주었고, 1549년 이후에는 후기왜구를 둘러싼 문제로 명과도 사실상 국교를 단절하였다.686)田中健夫, 앞의 잭(1987), 30쪽. 이 때는 실정막부가 이미 대외교섭능력과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와 같이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통교관계의 명맥만 유지될 뿐 밀무역과 왜구가 성행하였고, 중앙정부간의 통상적인 외교관계는 단절되어 가는 상황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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