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5. 유구와의 관계
  • 6) 임진왜란 이후의 대유구관계

6) 임진왜란 이후의 대유구관계

 선조 22년(1589)에 유구 표류인을 송환한 사실을 계기로 양국간의 통교는 간접적인 형태나마 상당히 우호적으로 지속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 유구는 병력과 군량을 조달하라는 豊臣秀吉의 명을 뿌리치고 오히려 명군에 합류하여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였고,736)李鉉淙,<壬辰倭亂時 琉球·東南亞人의 來援>(≪日本學報≫2, 韓國日本學會, 1974). 임란 이후에도 명을 통한 간접통교 방식은 그대로 이어졌다. 즉 자국에 경사가 있거나 긴급한 사정이 있으면 유구에서는 진공사편을 통해 국서와 예물을 보냈고, 조선은 이에 대해 回咨와 회례품을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교류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단절될 때까지 10여 회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조 32년 3월 유구는 진공사를 통해 조선의 동지사에게 풍신수길의 죽음을 알리고 축하한다는 내용을 담은 서계를 전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선조 34년 동지사를 보내 회답서계와 예물을 유구 진공사에게 전하면서 왜국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완급을 가리지 말고 바로 알려달라고 요청하였다.737)≪歷代寶案≫권 39, 萬曆 29년 8월 초 7일. 17세기에 와서도 광해군 원년(1609) 유구국왕 尙寧이 명의 책봉을 받은 사실을 조선에게 알리면서 ‘兄弟의 禮’로써 우호를 유지하자는 뜻의 국서를 보내왔고, 이에 대해 광해군도 자신의 즉위와 책봉받은 사실을 유구국왕에게 알렸다.738)小葉田淳,<琉球·朝鮮の關係について>(≪田山方南華甲紀念論文集≫, 1963), 246∼249쪽. 그런데 1609년 유구가 일본의 薩摩州에 의해 침략을 받아 정세가 일 변하였다. 그 후에도 유구는 명에 진공사를 계속 보냈지만「10년 1공」만 허락받았기 때문에 조선 사신과 만나기가 아주 어려워졌다. 그러나 광해군 13년 尙寧이 죽자 세자 尙豊의 명의로 진공사를 통해 조선에 알렸으며, 인조 원년(1623)에도 유구에서 국서를 보내왔다. 이 때의 유구국서는 조선에 전달되지 못하였으나 인조 3년 상풍이 책봉을 받으면서 다시 국서를 보냈고, 이 국서와 예물은 이듬해 聖節使 金尙憲이 받아 가져왔다. 이어 인조 9년 다시 유구에서 자문과 예물을 보내자, 조선에서는 인조 12년 回咨와 예물을 보냈다. 인조 14년에도 상풍이 국서를 보냈으나, 이 해 봄 조선은 병자호란을 당하여 유구국서가 제대로 수령되었는지 여부가 불확실하다. 병자호란 후 조선은 명에 사절을 파견하지 못하게 되었고, 명의 북경 회동관을 통해 이어져왔던 유구와의 통교는 이로써 단절되고 말았다.

<河宇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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