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6. 동남아시아국가와의 관계
  • 1) 통교관계의 성립과 전개
  • (2) 조선 초기의 통교

(2) 조선 초기의 통교

 고려말 이래 시작된 동남아시아국가들의 통교요청은 조선 초기에 와서도 이어졌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전반적으로 볼 때 동남아시아국가와 활발한 정치적 관계나 교역·문화적 교류를 갖지는 않았다.≪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서에도 동남아국가와의 교류기사는 아주 소략하다. 조선 초기 조선에 내빙한 동남아국가는 暹羅斛國·爪蛙國·久邊國 등 세 나라였다.

 조선 초기 제일 먼저 사신을 보낸 나라는 지금의 태국인 섬라곡국이었다. 태조 2년(1393) 6월 섬라곡국의 사신 張思道 일행 20인이 와서 蘇木 1,000근, 束香 1,000근과 土人 두 사람을 진헌하였다. 조선정부는 이들 일행이 머무르는 동안 후한 접대를 하였으며, 장사도에게는 禮賓卿, 동행한 爪蛙國人 陳彦祥에게는 書雲副正 등 종3품에 해당하는 관직을 授職하였다.743)≪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갑술. 동남아에서 온 이 최초의 손님에 대해 조선에서는 回禮使로 禮賓小卿 裵厚와 通事 李子瑛을 보냈다. 섬라곡국에서는 태조 5년 조선의 회례사를 환송하면서 다시 사신 林得章을 함께 파견하였다. 배후와 임득장 일행은 귀국하던 중 전라도 나주 앞바다에서 왜구를 만나 습격당하였고, 통사 이자영은 일본에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744)≪太祖實錄≫권 10, 태조 5년 7월 병인. 태조 6년 4월에는 조선에서 돌아가던 섬라곡국 사신 임득장 일행이 다시 왜구에게 피습당하였다. 예물을 약탈당하고 일행 중 6명만이 살아 돌아오게 되자 조선에서는 의복 등을 주면서 위로하였다고 한다.745)≪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4월 을사. 당시 태국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는 직항로보다 주로 일본을 경유하였던 것 같은데 왜구의 약탈이 심했던 탓인지 이 두 번의 사절 이후에는 내빙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태종대에는 지금의 쟈바인 爪蛙國의 사절이 내빙하였다. 당시의 쟈바는 마자바히트왕조시대로 국세가 융성하던 때이며 해외무역도 활발하였다. 무역의중심지는 수마트라섬 동남부에 있는 팔렘방(Palembang;三佛齊)이었는데 동서교통의 요충지로 유명하였다.

 태종 6년(1406) 8월 조와국 사신 陳彦祥 일행이 왔다. 그런데 그들은 조선으로 오던 도중 군산부근의 해안에서 왜구의 습격으로 가지고 오던 예물인 타조[火鷄]·공작·앵무새·잉꼬[鸚哥]·沈香·龍臘·호초·소목·향 등 약재와 蕃布 등을 약탈당하였으며, 일행 중 21인이 전사하고 60여 명이 사로잡힌 채 남녀 40인만 전라도 군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에 대해 조선에서는 17명은 상경시켜서 접대하고 배 위에 남아있는 자들에게는 의복 등을 지급하면서 보호해 주었다. 이들이 가지고 온 국서를 보면 본국의 왕을 ‘蒙國王’, 스스로를 ‘蕃人’으로 자칭하며 통교를 요청하였다. 진언상은 태조 3년에는 태국사신과 동행하여 수직했던 인물인데, 그의 행적으로 보아 조와국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을 경유하여 중개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국제무역상일 가능성도 있다.746)李鉉淙,<南洋諸國人의 往來貿易에 對하여>(≪史學硏究≫18, 韓國史學會, 1964), 266쪽. 이들 일행이 귀환할 때 태종은 의복과 양식을 지급하는 등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747)≪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9월 임신. 조와국은 이 때의 약속대로 6년 후인 태종 12년 다시 사신을 파견해 국서와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이들이 돌아갈 때 일본의 宇多殿 사절과 동행하게 되자 일본인들에게 다시 약탈당할 것을 두려워해 조선에 병선으로 호위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조와국의 경우도 조선과의 통교에 적극적이었지만 계속 왜구에게 침탈당하자 이후에는 사절파견을 중단하였던 것 같다.

 성종대에는 유구보다 더 아래쪽에 있다는 久邊國의 사신이 내빙하였다. 성종 9년(1478) 9월 久邊國主 李獲이 사신 閔富를 파견하여 국서와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이 국서에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경위와 구변국에 대한 소개가 기술되어 있는데, 구변국은 유구의 아래쪽에 위치한 남해의 벽지로 일찍부터 명에 조공하였으며 유구·남만과 통교하고 있어 남방물산을 쉽게 구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또 佛寺를 창건하는 데 필요하다며 대장경의 사여를 요청하면서 호초·유황·단목을 각각 5근씩 진헌하였다. 이들은 이전에도 여러 번 내빙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자국에 살고 있는 薩摩州人을 통해 뱃길을 알게 되고 그를 길잡이 삼아 올 수 있었다고 하였다.748)≪成宗實錄≫권 98, 성종 9년 11월 경신. 조정에서는 구변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어서 그 國主의 가계와 국토·언어·사신의 복장 등에 대해 알아보게 한 후 접대하도록 결정하였다. 조선은 이들이 귀환할 때 예조명의의 회답서계와 함께 正布 7필, 면포 3필과 특별 하사품으로 白苧布 3필, 黑麻布 3필, 虎皮 1장을 보냈다. 대장경은 이미 일본의 諸酋들이 구해 가서 거의 없기 때문에 요청에 응할 수 없다고 하였다.749)≪成宗實錄≫권 99, 성종 9년 12월 무자. 성종 13년 2월에도 구변국주가 보냈다는 中務衛 일행이 왔으나, 僞使 여부에 대한 의구심이 있어 조정에서는 접대를 하지 않았다.750)≪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병오. 같은 해 8월 다시 구변국의 사신이 와서 지난번에 보낸 조선의 회사물에 대해 감사를 표시한 다음 대장경의 하사를 또 한번 간절히 요청하였다.751)≪成宗實錄≫권 145, 성종 13년 윤 8월 경진. 조선정부는 구변국에 대해서 ‘오랑캐가 義를 사모하여 來朝하는데 물리치고 받지 않으면 大國이 아니다’라는 명분에 입각하여 접대하기는 하였지만 일본 살마주의 작용과 가짜사절 여부에 대한 의구심도 있어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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