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3. 군현제의 정비
  • 4) 군현 명칭의 개정

4) 군현 명칭의 개정

 군현 명칭의 개정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고유명칭에서 중국식으로 개정되는 경우와 질박한 속명에서 한자로 雅化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같은 지명이라 하더라도 구획의 고하와 등급에 따라 개정의 시기에 선후의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지명 개정은 통일신라 이래 적극적인 漢化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군현의 명칭은 신라 이래 여말까지 누차 개정과정을 거쳐 아화되었으나 읍격에 따른 명실상부한 정비는 조선 초기에 와서 단행되었다. 이에 반해 향·소·부곡이나 촌·리·동명과 같은 군현의 하부 구역명은 종래의 속명 그대로 조선 초기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행정구역도 도·군현·면리제의 정비와 함께 개정되어 나갔듯이, 그러한 행정구획의 지명도 차례로 개정되어 갔던 것이며, 특히 면리 명칭은 15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개정되어 갔던 것이다.

 군현 명칭을 명실상부하게 개정해야 한다는 논의는 벌써 개국 초부터 활발히 제기되었다. 태종 3년(1403) 左司諫 安魯生 등은 이 문제에 대하여 고려 전기에 정비된 군현제가 후기에 와서 權奸이 擅政하자 權臣·入元宦寺·王師·國師들의 간청으로 군현과 향·소·부곡의 등급과 명칭이 혼잡하여, 일정한 기준없이 함부로 승격되었으니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한 다음, 전국의 군현 등급을 명실상부하게 재편성할 시안을 제시한 바 있다.190)≪太宗實錄≫권 6, 태종 3년 윤 11월 임술.

 이러한 사간원의 상소는 사헌부로부터 越職 論事했다 하여 탄핵을 받았지만, 군현제의 기본적인 문제를 거론한 과감한 개혁안이었다. 태종 초기관제의 개혁과 함께 고려의 유제를 청산하고 전국의 행정구역을 합리적으로 개편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정부는 며칠 후에 면적의 광협과 인구 다소를 참작하여 주·부·군·현의 등급과 명칭 개정을 건의한 바 있다.

 군현 명칭의 개정에는, 첫째 고려 후기 이래 무질서하게 승격되었던 읍격을 호구와 전결수에 따라 재조정하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부사 이하의 군현에 「州」字가 붙은 고을 이름을 다른 자로 대체하고 발음상 비슷한 것은 서로 혼동되지 않게 개정하는 문제였다. 정부의 건의에 이어 이조도 태종 6년 7월에 군현 등급과 명칭 개정을 주청하자 태종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곧 실천에 옳기지 못하다가 동 13년(1413)에 가서 실시하게 되었다. 즉 부윤·대도호부사·목사 외에 「주」자를 띤 도호부(單府) 이하의 군현명을 모두 山·川 두 글자 중 어느 한 자로 개정하였는데191)≪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10월 신유. 이 때에 개정된 군현이 다음<표 4>와 같이 59읍에 달하였다.

구분\도별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 평안 영길 합계
川 字
山 字
합 계
5
-
5
7
5
12
5
3
8
-
3
3
2
-
2
3
2
5
11
9
20
3
1
4
36
23
59

<표 4>태종 13년 州字邑名의 개정표

 州는 본래 대읍의 호칭이었는데 이것이 고려 태조 23년(940) 군현의 명칭 개정 때 중소 군현에까지 적용됨으로써 읍명이 부합되지 않았던 것이며, 특히 양계의 신설 주진에 많았다. 이처럼 사실과 괴리된 읍명은 태종 13년 개정에서 비로소 정리되었다. 이에 앞서 충선왕 2년(1310) 군현의 명칭 개정 때 金州가 金海로, 禮州가 寧海로, 淮州가 淮陽으로, 吉州가 富平으로 각각 바뀌는 등 일부 府·牧의 명칭이 변경된 바도 있었다. 위<표 4>와 같이 「산」 또는 「천」자로 바뀌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때로는 「주」자 대신에 「陽」·「城」으로 대치되었는데, 강원도의 襄州가 襄陽으로, 평안도의 龜州가 龜城으로 바뀐 것이 그 예이다. 이에 이어 태종 16년에는 영길도의 靑州를 北靑, 충청도의 寧山을 天安, 報令을 報恩, 강원도의 橫川을 橫城, 경상도의 甫城을 眞寶, 甫川을 醴泉으로 각각 개정하였다. 북청·천안·보은·진보 등으로 개정되기 전의 군현명은 바로 당시의 기존 읍명인 淸州·靈山·保寧·寶城과 발음이 같았기 때문이다.192)≪太宗實錄≫권 32, 태종 16년 8월 기사.

 한편 고려 이래 특수한 경우, 부분적인 읍명의 변경이 있었다. 왕명을 피하여 章山과 章德을 慶山과 興德으로, 대신의 이름을 피하여 復興을 白州로, 궁전명을 피하여 永寧을 永柔로 변경하였고, 태조 2년(1393)에는 동북면의 和寧府가 永興府로 바뀌자 경기도의 永興縣이 永平으로 고쳐졌으며, 태종 13년 7월에는 동북면의 定州가 서북면의 정주와 같음을 피하여 定平으로 고쳐졌다.

 이상과 같은 군현 명칭의 개정은 별로 큰 구애가 없었으나, 군현을 병합할 때 새로 정해지는 읍명에 대해서는 문제가 복잡하였다. 군현과 향·소·부곡이 등급의 고하가 있는 것이 서로 병합될 때 정해지는 명칭은 으레 상위의 읍명이 하위의 것에 우선되겠지만, 같은 읍격의 것이 서로 합쳐질 때는 쌍방이 모두 자기 고을의 명칭이 새로 정해지는 읍명의 첫자에 배치되기를 희망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이며, 그 지방세력의 강약에 따라 읍명의 配字 선후가 결정되었다. 德恩과 市津 두 현을 합친 새 현의 명칭이 德恩으로 정해지자 시진 현민이 항의하여 恩津으로 개정되었고, 比屋과 安貞 두 현이 병합될 때 처음에는 安比로 했다가 나중에 비옥 현민의 요청으로 다시 比安縣이 되었다.193)≪太宗實錄≫권 36, 태종 18년 7월 병진.
≪世宗實錄≫권 20, 세종 5년 5월 을사.
군현 병합에서 새로 정해지는 읍명은 반드시 병합되는 두 현의 명칭 중 한자씩 따서 정하도록 관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병합당하는 쌍방에 모두 불평이 없게 균등한 대우를 해주기 위한 조치였다.

 주현과 속현이 병합될 때는 원칙상 주읍의 명칭이 앞에 배치되며 군현과 향·소·부곡이 병합될 때는 의당 전자의 읍호를 앞에 두게 된다. 당시 군현 명칭의 개정에 대한 각 읍 주민의 반응을 보면, 해당 군현의 품관·이민들은 자기 고을이 비록 병합은 되더라도 옛부터 내려오는 명칭만이라도 존속시키기 위하여, 또는 병합된 경우 자기 읍명을 새로 정해지는 군현명의 앞자에 배치시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군현 명칭은 본래 인구 다과를 기준하여 정해야 한다는 말과 같이, 군현의 등급과 명칭을 결정하는 요인 가운데 일차적인 요건이 호구수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나 상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일차적인 기준을 무시한 채 갖가지 불합리한 요인에 의하여 군현 등급의 승강이 빈번했던 것이다. 戶口·田丁을 기준하여 읍격과 읍호를 정해야 하겠다는 국가적 노력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본격적인 추진은 15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태종 15년에는 주민이 1,000호가 넘는다 하여 原平·密陽·善山·平山·春川·肅川 등 7군이 도호부로 승격하였고, 세종 원년(14l9)에는 1,300호가 된 大丘縣을 군으로 승격시킨 바 있다. 한편 세종로에는 지방 교관인 敎導와 訓導를 각 읍에 파견할 때도 호수가 기준이 되었다. 즉 세종 12년에는 500호가 넘는 靈山·彦陽·蔚珍縣에 교도를 설치하였고, 강원도 횡성현은 주민이 유망하여 500호가 되지 않는다 하여 기존 교도를 훈도로 대치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도 고려의 유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방식에 의한 군현 명칭의 승격과 강등이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올수록 명분과 강상을 중시한 나머지 반역, 모역사건이나 弑父·弑主와 같은 강상죄인의 태생지·거주읍에 대해서는 10년 한정으로 읍격과 읍명을 격하, 변경시키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읍이 그 도명을 구성한 계수관일 때는 도명까지 변경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읍명과 도명의 변경문제를 두고 조정에서는 합리론과 명분론이 맞섰지만 결국 명분론에 입각하여 읍명을 변경시켰던 것이다.194) 李樹健, 앞의 책(1989), 73∼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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