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4. 행정구역과 행정체계
  • 2) 지방 행정체계
  • (2) 군현직제와 행정체계

(2) 군현직제와 행정체계

 행정구역인 군현은 그 읍세의 규모에 따라 주·부·군·현으로 구획되었고 읍관인 수령은 거기에 대응하여 관계상 최고 종2품에서 최하 종6품에 걸쳐 있는 府尹·大都護府使·牧使·府使·郡守·縣令·縣監이 파견되었다. 이들 수령은 행정체계 상으로는 모두 병렬적으로 직속상관인 감사의 관할 하 에 있었으며, 다만 이들 수령이 겸대하는 군사직으로 말미암아 수령 간에 상하의 계통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령의 행정체계는 태종조에 정비되고, 세종조의 보완기를 거쳐 마침내≪경국대전≫에 그 구체적인 모습을 담게 되었다. 그러나 군현의 행정조직은 그 후 도제와 면리제의 발달에 따라 계속 수정·보완되었다. 즉 行營에서 留營체제로 발전함에 따라 위로는 감사 또는 감영과의 행정체계에 변화가 수반되었는가 하면, 아래로는 향촌사회의 지배권이 향리에서 재지사족으로 대체됨에 따라 「邑司」(州司·府司·郡司·縣司:호장층의 집무청)211) 李樹健,<高麗時代 ‘邑司’硏究>(≪國史館論叢≫3, 1989).의 지위 저하와 함께 유향소의 기능이 강화되어 갔으며, 면리제의 확립은 면·리임이 수령의 하부 행정체계에서 향리와 함께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감사·감영과의 관계, 유향소와 면·리임 및 향리와 연결된 군현의 행정체계는 조선 초기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천하였던 것이며, 같은 군현의 수령체제라 하더라도, 도에 따라 군현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각≪邑誌≫소재 邑事例를 통하여 그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도정이나 군정은 행정·사법·군사 등 전반을 취급하는 하나의 종합행정인데 여기에 道主 또는 城主로서의 감사와 수령이 단독 부임한다는 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물론 감사 밑에 도사 등 속료가 있고 대읍에는 부관인 판관이 설치되기도 했지만, 실제는 감사 또는 수령이 도정 또는 군정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경관직에 포함된 수도의 한성부, 옛 수도인 개성부, 토관이 설치된 양계의 읍 및 일반 군현에 따라 각기 행정체제가 상이하였다. 일반 군현도 크게 남부 6도 양계 및 제주도로 나눌 때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17세기 이후가 되면 전국이 일체화되어 갔다. 먼저≪경국대전≫과≪신증동국여지승람≫기타≪읍지≫에 의거, 조선시대 일반 행정구획 단위로서의 군현의 기본구조를 수적으로 정리하면 다음<표 8>과 같다.

      읍 격
   수 량
구 분

府 尹
종2품

大都護府使
牧使,정3품

都護府使
종3품

郡 守
종4품

縣 令
종5품

縣 監
종6품
留鄕所 座首 1  1  1  1  1  1 
別監 3  3  3  2  2  2 
邑 司
敎 官
鄕 校 留 學 生 徒
官 屯 田 結 數
州(府)司
敎 授
90 
20 
州(府)司
敎 授
90 
20 
府 司
敎 授
70 
16 
郡 司
訓 導
50 
16 
縣 司
訓 導
30 
12 
縣 司
訓 導
30 
12 
廩田 衙 祿 田
結 數
50  50  50  40  40  40 
公 須 田
結 數
15  15  15  15  15  15 
外衙前 書 員 34  30  26  22  18  18 
日 守 44  40  36  32  28  28 
官 奴 婢 數
鄕 校 奴 婢 數
600 
30 
450 
25 
300 
20 
150 
10 
100 
10 
100 
10 

<표 8>조선시대 읍격에 따른 기본구조표

 위 표와 같이 군현은 읍격과 수령의 관등에 따라 인적 구조와 물적 정액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정수는 법제상 정해진 것이며 실제는 邑勢의 융성과 쇠잔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우선 수령의 하부행정체계로서는 읍사를 중심한 향리조직, 유향소를 중심한 재지사족 및 면리행정을 담당한 면·리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또한 서울의 京邸와 京在所, 감영·병영 등의 영리·영저리와 계통화되어 있으며, 그 밑에 각종 천역을 담당하는 관노비가 있었다. 후기의≪읍지≫관직조에는 각 읍마다 수령 이하의 관원·吏隷가 정액되어 있다. 여기에는 향청의 임원인 座首와 別監, 軍官, 人吏(衙前·鄕吏·假吏), 知印, 使令, 官奴, 官婢, 妓生 등의 정원이 실려 있는데, 그 명칭과 정액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지방행정의 기본구획으로서의 군현은 일정한 구역에 일정한 주민, 그것을 통치하는 행정조직과 관아·창고 등의 시설을 가졌다. 당시 지방행정의 궁극적 지향점이란 왕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앙집권화와 농민의 효과적인 지배에 있었다. 그것은 군현행정을 책임진 「수령의 7사」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듯이 인구증가와 농업생산성 향상, 공정한 조세·공부의 부과, 주민교화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祀典」의 확립과정에서 중앙집권적인 지방의 통치체제가 왕권을 정점으로 지방의 행정체계는 물론 주민의 신앙체계까지도 관권 주도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조선왕조는 사전을 크게 大·中·小祀로 나누고 수도를 중심으로 관련 군현별로 정하였다. 그 결과 특정 사전을 제외하고는 모든 군현이 통일된 사전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즉 고을마다 「鎭山」이 지정되고 文廟(향교소재)·社稷壇·城隍祠·厲壇등 1묘·1사·2단이 설립되고 종래 잡다한 민간신앙은 비유교적인 淫祀로 규정하여 금단하였다.212) 金泰永,<朝鮮初期 祀典의 成立>(≪歷史學報≫58, 1973). 군현 단위의 사전은 군현행정의 수장인 수령이 주재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고을을 대표하였다. 또한 고을마다 국왕의 상징인 殿牌를 객사에 모시고 지방 관민이 여기에서 군신관계의 의식을 수행하였다.

 군현 관아의 소재지 읍치는 군현행정의 중심으로 대개 주위는 성곽(음성이 없는 고을도 많음)으로 둘러 있고 그 안에 수령관아를 비롯하여 각종 관청, 누정·창고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각종 관아시설의 규모는 대체로 읍격과 읍세에 비례하며, 조선 후기 지방도시의 성장추세에 따라 감영시설이 확충되어 나갔듯이 읍치의 규모 와 관아시설도 확충되어 다음과 같은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客舍(殿牌奉安) 衙舍(東軒·守令官衙) 鄕校(文廟) 鄕廳(座首·別監執務所) 軍官廳 將官廳(中軍·別將·把摠 등) 邑司(州·府·郡·縣司) 作(秩)廳 兵房廳 刑房廳 工房廳 田制廳 官廳 貢廳 小星廳 使令房 通印房 官奴廳 軍牢廳 書廳 養武廳 選武廳 武學堂 贊籌堂 敎練堂 都訓導房 藥房 敎坊(樂府) 刑獄 邑倉 大同庫 補民庫 賑恤庫 社倉 등

 지방통치를 직접 담당한 감사와 수령은 1도 또는 1읍의 군주와 같은 존재로서 일국의 통치를 맡은 왕의 분신이었다. 사실 역대의 선정 시기를 살펴보면 고려와 조선도 중국의 경우와 같이 예외없이 循良한 수령에 의한 치읍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지방통치가 근대국가처럼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지방주민의 고락과 휴척은 오로지 외관이 유능한가 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조선조의 역대 군주들은 수령 선임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태종·세종·세조·성종과 같은 군주들은 평소 經史를 열람하는 과정에서 군주의 선정은 결국 치민을 일선에서 담당하는 수령을 엄선하여 모두 循·良吏를 얻게 되면 정치는 자연히 잘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수령의 질과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수령의 品秩을 참상관 이상으로 올리고 무능한 胥吏로서 수령이 되는 것을 막고, 文吏와 덕망을 갖춘 士流를 수령에 임용하는 일련의 조치가 회군(1388) 이후부터 추진되었다. 수령을 牧民, 近民 또는 「親民之官」이라 하여 그들의 선임과 고과에 매우 신중을 기했던 것이며, 지금의 수령은 봉건시대의 제후와 같다고 하였다. 一邑之主인 수령은 그 인품이나 자질·능력 여하가 읍민들의 생활에 직결되기 때문에 국초부터 수령의 임면·권한·임기·전보·승진 등에 관한 활발한 논의와 법제적 수정·보완과정을 거쳐 마침내≪경국대전≫에서 구체적으로 규정되었다.

 초창기의 수령은 일반행정 뿐만 아니라 지방의 군사권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문무 겸비자를 선임해야만 했다. 세종 초에는 종래와 같이 양계와 각 도 연변의 수령은 필히 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변방의 군사적 요지는 上·中·下緊으로 구분, 적임자로 임용케 하였다. 국초에는 도평의 사사 6조·대간에게 수령에 임용할 인재를 천거토록 하여, 공평·청렴하며 재능이 있는 사람을 얻어 임무를 맡기되 만 30개월이 지난 후 현저한 치적을 보인 자를 경관으로 발탁 등용시키고 천거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면 擧主까지 논죄케 하였다. 한편 연변·연해의 수령은 문무를 겸비한 자로 임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선임과정은 이조와 병조가 협의했으며 그들의 고과에도 감사와 병사가 서로 협의하였다. 수령에 대한 선임의 신중은 署經에도 반영되었다. 사헌부·사간원의 관원이 회합하여 수령 후보자에 대한 서경을 철저히 행하고 그 결과를 참조하여 수령으로서의 적임 판정이 난 후에야 정식 제수하였다.

 수령의 임기가 태조·태종대에는 30개월, 세종에서 단종대에는 60개월(6期), 세조대에는 다시 30개월로 실시되다가≪경국대전≫에서는 1,800일로 규정되었으며 未率眷 수령은 900일이 지나면 이임이 가능하였다.

 이상과 같은 국초 이래 태종·세종대의 외관지위 강화책과 서임제·임기제는 세조·성종조를 거치면서 다소 수정을 가하여≪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그런데 수령은 군현 주민을 직접 다스리므로, 그들로부터 얼마나 徵稅調役을 원활히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주로 수령의 치정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수령은 직속상관인 감사 외에 중앙의 대간, 수시로 파견되는 행대와 경차관 및 그 읍의 경재소 등 여러 계통의 감시와 견제를 받고 있어서 치읍의 득실을 막론하고 그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조선시대 전국읍지 소재의≪各邑先生案≫에 의거, 역대 수령의 임기를 분석한 결과를 살펴보면 법전 규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213) 李源鈞,≪朝鮮時代 地方官의 交遞에 관한 硏究≫(東亞大 博士學位論文, 1987). 대체로 세종에서 성종조까지는 당초 세종의 의도대로 수령 엄선, 구임, 경외관 순환 근무제가 제대로 지켜졌다.

 한편 수령은 감사·병사 등 다른 외관들과 마찬가지로 부임에 앞서 의정부·6조·대간 및 그 도나 읍의 前官宅을 방문하여 그들로부터 교시와 조언을 청취하고 하직인사를 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이는 본래 국왕이 수령을 인견하는 취지와 같은 것으로 막중한 외임을 원만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덕망과 경륜 및 풍부한 경험을 갖춘 원로대신, 풍헌지관인 대간 및 그 읍과 유관한 재경관료들을 차례로 방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성종은 의정부·이조에 다음과 같이 傳旨한 바가 있었다.

≪大典≫안에 새로 제수된 경외 관직자와 出使者로 하여금 政府·銓曹를 參調케 한 것은 정부·전조를 중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내외 庶官을 두루 管攝토록 한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참알을 통해 新除者의 타당 여부와 인물의 선악 여부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간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부·전조의 낭청들이 참알할 때에 예물이란 명목으로 물자를 요구하니 앞으로는 그런 폐습을 혁파하라(≪成宗實錄≫권 186, 성종 16년 12월 정미).

 왕이 이렇게 지시한 것은, 수령이 부임에 앞서 정부·전조등을 참알할 때 賄賂와 徵索·청탁을 자행하였고, 부임 후에는 경중 각사 또는 재경관료들로부터 이른바 「折簡求索」이 빈번했던 세태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의 경·외 관서는 관리직인 양반출신의 관료와 행정실무 담당층인 중인계의 이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자는 본래 토성이란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나 15세기 이래 양반사회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사족과 이족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갔다. 그러니 조선시대에는 왕을 정점으로 경중의 각 사마다 사족인 官과 이족인 吏가 중앙정부를 구성했듯이, 지방행정도 전적으로 사족인 외관과 이족인 향리 및 재지사족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마치 중앙의 집권세력이 그 권세를 계속 유지하려면 고관 요직을 놓치지 않고 버티어 나가는 데서 가문의 영광을 지킬 수 있는 것과 같이, 각 고을의 이족들은 향리세계의 상층부인 호장층의 확보 여부가 그들 세력의 소멸과 성장에 직결되었다. 그래서 양반사회에서는 족세·가세에 따라 國班(1국을 대표한 양반), 道班(1도를 대표한 양반), 鄕班(고을을 대표한 토반)이란 양반의 등급이 있듯이 향리세계에도 각 읍의 이족을 대표한 명문이족이 있게 되었다.

 군현향리들은 그 읍의 수령은 물론 감영과 중앙정계에까지 연결되어 있어 비록 양반으로부터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실제 지방행정에 있어서는 그 형세가 대단하였다. 우선 군현의 각종 장부와 공문서가 그들의 손안에 있었으니 호적이나 신분관계 자료를 개변하는 데도 용이하였다. 그래서 본관을 모칭하거나 선대의 世系를 조작하여 현재는 자기들이 이역을 지고 있지만 본래는 사족이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향리세계는 일찍부터 신분 위계상으로나 직무 분장상으로나 상·중·하의 三壇과 三班이란 용어가 관용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는 향리 세계를 거론할 때마다 호장·기관·장교라는 구분이 있었고 이들을 통청할 때는 삼반 또는 삼반관속이라고 하였다.214) 李勛相,≪朝鮮後期의 鄕吏≫(一潮閣, 1990). 그러나 수령직의 강화와 향리지 위의 격하라는 시대적 추세에서 향리직제도 향청의 조직과 함께 수령의 하부 행정체계로 일원화되어 종전의 호장·기관 구분은 점차 무의미해졌고 그 대신 호장도 이방·호방·형방 등과 함께 6방체제에 흡수되고 말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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