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5. 지방자치적 기구
  • 2) 면리임과 5가작통제

2) 면리임과 5가작통제

 군현의 하부 행정구획으로서의 面里편성과 면리임의 행정체계는 15세기 후반에 반포된≪경국대전≫에 비로소 규정되었으나 그것이 실제 향촌사회에까지 정착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국초 이래 수령의 하부 행 정체계로 直村과 任內가 병렬해 있었으면서 그 행정의 실제는 수령→향리→면리임→면리주민, 또는 수령→유향소→면리임→면리주민으로 연결되었는가 하면 15세기 말 유향소가 복설, 재정비되면서 수령→향리의 체계에서 향리를 제치고 수령→유향소→면리임으로 계통화한 군현이 있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16세기부터는 수령→향리 또는 향청→면리임으로 연결되어 결국 면리임은 수령의 지휘·감독 하에서 향리와 향청의 중간단계를 거쳐 면리행정을 수행해 갔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면리체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상태 하에 놓여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즉 임내의 직촌화는 지방행정제도의 발전이란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향촌사회 세력이 토성이족에서 재지사족으로 교체되었다는 데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향촌지배세력의 교체도 일시에 성취되지 않고 15·16세기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선후의 차이가 있었다. 留鄕所와 司馬所 같은 재지사족의 집합체가 일찍이 형성된 대읍·반향에서는 그 교체시기가 빨랐으며, 사족이 아직 집단적으로 형성되지 못했던 소현이나 벽읍은 훨씬 늦었던 것이다. 사마소를 구성할 생원·진사 출신 인사가 확보된 군현부터 그것이 설치될 수 있는 것처럼, 유향소도 재지사족이 확보된 뒤에야 설치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임내의 직촌화에 따라 종래의 임내리가 권농관·감고 등으로 대치되고 촌장·촌정이 이장·이정으로 교체되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유불교체라는 시대적 추세에 편승하여 불교적이고 이른바 淫祀, 香徒的인 토성이족 중심의 향읍질서가 里社와 社倉의 설치, 향규, 향사·향음주례, 향약·동약 등을 제정 또는 시행하는 사족 중심의 유교사회로 발전하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적·사회적인 추세에도 불구하고 토성이족이 온존하던 군 현에는 여전히 향리들이 수령의 통제하에 촌락을 지배하고 권농관·이정을 지휘 감독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6세기 후반부터 사림세력의 성장과 함께 변모하여 면리의 행정체계는 점차 수령→향리, 또는 향청→면리임의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수령의 하부 행정체계 속에 있던 권농·方別監·감고·이정 등은 매월 5일마다(六衙日) 관아를 출입하면서 향촌행정을 수행하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이러한 면리임을 가급적 품관이나 유식층에서 선임하려 했지만 사족들은 관직을 선호한 나머지 그러한 향임이나 면리임을 기피하였고 그 대신 鄕品·庶類들이 임용되는가 하면, 심지어 사노들이 한 마을의 권농·이정·포도장을 모두 맡는 예도 있었다.

 재지사족이 향촌지배권을 장악한 16세기부터는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위하여 외관들은 호구성적·籍軍·양전과 징세·調役과 같은 업무에 학덕을 겸비한 향중 인사들을 활용하려 하였다. 이에 반해 학문과 벼슬을 선호했던 양반층은 행정실무와 향임 및 면리임을 천시하여 그러한 差任을 기피하였다.

 왕권을 대행하는 감사나 수령은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위하여 주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사림을 각종 차사원이나 향임 등에 임명함으로써 농민지배와 원활한 징세조역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향중 사람들은 관권 주도의 차임을 기피한 데서 관권으로부터 보복을 받아 鄕曲을 무단하는 토호로 지목되어 처벌되는 경우가 많았다. 재지사족들의 그러한 인식으로 인해 좌수·별감과 같은 향임을 제외한 각종 감고나 倉任, 면리임은 기피되어 그들의 예속 하에 있는 鄕品寒族이나 서얼들이 담당하였다.

 초기 실록에서는 면리임으로 권농·이정·이장·방별감·감고·색장 등의 용어가 나타나고 있다. 호구·군역파악, 권농·관개수리시설 감독, 유이민 단속, 포도, 진제 등의 업무수행에 있어서 이러한 면리임의 용례가 나오고 있지만 그러한 직임이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한편 향촌사회에서는 종래의 불교적·음사적인 향도계와 향도회가 마을마다 사람마다 참여하는 상황으로서 향규·향약이 보급되기 전에 리·동 단위로 우리의 전통적인 향촌조직체와 자체의 규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향촌사회가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새 왕조는 隣保正長法이나 五家作統法을 실시하여 여말 이래 동요된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호패법의 실시와 유이민 단속, 호구파악 및 효과적인 징세·조역을 기하기 위하여 군현제 정비와 함께 면리제도를 시행했던 것이다. 세종 10년(1428) 한성부의 坊里 편성을 보면 도성 내에는 방만 있고 리는 없으며 따라서 그 리를 맡은 이정도 없이 방의 管領이 바로 이정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성저 각 리는 관령이 권농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5가작통법은221) 申正熙,<五家作統法小考>(≪大丘史學≫12·13, 1977). 본래 태종 8년(1408) 成石璘의 건의에서 논의된 인보정장법에서 비롯하여 세종 때에 확립되었으며,≪경국대전≫호적조에 동리별로 家坐順에 따라 5가 1통으로 작통하도록 규정되기에 이르렀으나 실제 향촌사회에 정착된 시기는 후기였다.

 면에는 권농관, 리에는 이정, 통에는 統主를 둔다는 법제가 벌써≪경국대전≫에 규정되었으나 16세기 말까지는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그러한 면리임도 향촌사회의 성장과 함께 조선 후기로 오게 되면 면리의 새로운 지역적 편제의 진행과 함께 그 호칭이 변하고 직임 자체도 분화·다양화되며, 면임·이임간의 지휘체계도 잡혀가게 된다.

 面里任의 신분과 자격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수령의 치읍을 보좌하고 주민을 교화·감독하기 위해서는 유향품관이나 학덕과 신망이 있는 재지사족에게 면리임을 선임하려 했지만 실제 향촌의 유식자는 기피하였다. 면리임은 직임상 수령→향리와 연결되고 때로는 중인층인 향리의 지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평소 관아 출입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향리·관속들을 멸시했던 사족 출신이 면리임을 기피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추세라 하겠다. 이에 반해 양반이 아닌 계층은 면리임을 통한 對官民 관계에서 관권을 빙자하여 신분을 향상시키거나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선호하는 경향을 띠었다. 특히 조선 후기 향리·서얼층의 성장과 함께 비양반충은 면리임을 매개로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켜 갔던 것이다.222) 金俊亨,<朝鮮後期 面里制의 性格>(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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