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1. 초기 군사제도의 정비
  • 3) 군역제도의 정비
  • (2) 보법의 성립

(2) 보법의 성립

 군역 부과의 대상자는 어떤 형식으로든지 직접 군복무를 하던가 아니면 현역을 도와주는 보조인이 되어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것은 현역병인 戶首와 이를 도와주는 奉足制로 나타난다.

 고려 말 이후 국방을 담당하였던 시위군이나 기선군은 대개 양인 농민이었지만 군역의 대가로 토지의 급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현역에 복무하는 호수는 무기를 스스로 마련하는 것은 물론 왕복에 드는 식량의 지참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 이외의 장정이 그 부담을 나누어지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이것이 봉족인 것이다.

 건국 초기인 태조 3년(1394)에 마병의 경우 5丁이 1군을 내고 보졸의 경우엔 3정이 1군을 내도록 하자는 건의가 나오고, 동 6년에는 다시 16세로부터 60세에 이르기까지의 人丁은 품관 마병의 경우 봉족 4명, 무직 마병의 경우 봉족 3명, 보병의 경우는 봉족 2명을 분급하며 봉족은 가능한 한 내외 족친으로 충당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반 군정으로 하며, 船軍도 3정이 병정 한 사람을 낸다는 규정이 강조되었다.260)≪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기사·권 11, 태조 6년 2월 갑오·권 15, 태조 7년 9월 갑신.

 그러나 초기의 혼란이 극복되고 차츰 제도가 완비되기 시작한 태종 때에 와서 국역 전반에 걸쳐 신분의 차등, 전결의 다소 등에 따라 봉족의 수급에 차등이 정해졌다. 즉 태종 4년(1407)에 이르러 국역부담자 전반을 대상으로 하여 봉족의 수가 公定되었다.261)≪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5월 계해. 물론 이러한 조치는 군역 부과자가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미 군역 자체에 상당한 병종별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의무군 역인 정군이었다. 따라서 군역을 직접 담당하는 정군은 경제적 여력이 있는 자로 충당한다는 원칙이 성립됨으로써 초기에는 토지의 다소에 따라 봉족호의 수급에도 차이가 났다. 그러나 군역의 대상자는 인정이기 때문에 戶보다 인정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들 인정은 대체로 자연호 및 혈연관계 등을 중심으로 하여 편성되었는데 3정 1호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이와 같은 자연호 중심의 3정 1호 문제는 각종 부작용을 수반하였다. 즉 10정이 넘는 富戶인 경우와 반대로 1정이나 2정밖에 없는 貧戶 등이 뒤섞여 있음으로써 立役 부담의 경감 내지는 과다 등의 현상이 일어나는 불합리가 발생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지와 입역의 路程 등도 문제가 되는 혼란이 야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각종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이 2정 1보를 단위로 하는 保法의 성립이었다. 즉 세조 때에 와서 5위와 진관체제가 완비되기 시작하여 모든 의무 군역자들이 거주지 단위로 파악됨으로써 군역도 일률적으로 확대시키면서 號牌法을 강화하고 人丁搜括을 적극적으로 펴는 동시에 세조 10년(1464)에는 보법을 마련하였다.

 세조 10년 10월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 軍籍使의 携行事目의 규정에 보면 “2정을 1보로 하고 田 5결을 1정에 준하도록 하되 奴子도 봉족수로 계산한다”262)≪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10월 을미.고 하였다. 따라서 과거 3정 1호의 자연호 단위에서 2정 1보와 인정 단위의 보법이 성립된 것이다. 이제는 과거 자연호의 단위에서 벗어나 인정수를 중심으로 하여 짜여짐에 따라 인정이 많으면 많은 보가 성립되고 單丁인 경우에는 다른 호와 아울러 보를 만들게 해서 作保에 공정성을 기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정군 가운데 토지의 다과 및 노자의 다과 등까지도 給保 내지는 군역부과의 기준으로 삼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역부담의 공정성을 기할 수 있었다.

 이같은 경제적 고려는 결국 토지나 노자가 많은 자에 대하여는 급보규정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경국대전≫에 기재된 보병은 세조 때의 보법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대토지 소유자인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하는 토지의 다과에 관한 것은 고려의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되고 있으며 노자의 경우도 准丁의 반수만을 保로 계산하여 경제적으로 유족한 자가 사실상 이득을 보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급보규정을 군역에 한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263)≪經國大典≫권 4, 兵典 給保.

無 保……親軍衛·別侍衛·族親衛·忠義衛·忠贊衛·忠順衛

1 保……步正兵·破敵衛·壯勇衛·隊 卒·彭 排·漕 軍

1保丁……騎正兵·水 軍

2 保……甲 士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보의 수급은 경제적인 면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다만 신분이나 기능면을 고려하여 분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보가 없는 경우에는 신분적으로 상층에 속하여 보가 없더라도 생활할 수 있고 또한 이들은 벼슬길이 열려 있었다. 正兵 등은 보도 적지만 의무군역이기 때문에 급료도 받지 못하였다. 이와 반대로 중앙군의 핵심인 갑사같은 경우는 그 신분과 기능이 인정되어 보의 수도 많지만 遞兒職264) 李載龒,<朝鮮前期 遞兒職에 대한 考察>(≪歷史學報≫35·36, 1967).이기는 하나 급료도 지급되는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戶·保제도는 성립 초기부터 각종 폐단을 수반하였으며 조 선조 중기 이후에는 보법의 문란을 가져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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