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3. 진관체제의 확립과 지방군제
  • 3) 진관체제의 변화와 제승방략

3) 진관체제의 변화와 제승방략

 세조 3년(1457)에 시작하여 12년에 지휘관의 명칭이 개편되면서 완성되던 진관체제는≪경국대전≫반포 이후 서서히 변화를 가져왔다. 즉 전국을 군사지대화하고 방위망화했던 진관체제는 성립기반이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으로 실제 유사시에는 오히려 무력함을 드러내고 그 기능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무력함은 중앙에 있어서 갑사 등 기간병이 군사로서의 능력을 갖추게 되고 국가의 경제기반 등이 허약했다는 점과 지방의 행정관인 문관 수령이 군사지휘권을 겸하게 됨으로써 군사를 잘 알지 못하여 국방에 무관심하게 되는 등이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진관체제 아래의 정병과 수군 등은 정해진 기한의 복무를 마치면 농민으로 돌아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으나 또한 徭役을 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들에게 保人이 설정되기는 했으나 단위 보인의 수가 감소되고 있었으며 종래까지의 자연호 단위의 경제권을 위협하는 요소까지 있어 군사의 부담 능력을 더욱 가중시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때 放軍收布를 기도하기도 했다. 방군수포는 장정들에게서 布를 거두어 이것을 재원으로 하여 군대를 양성한다는 것이고 일반 양인인 농민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어 서로가 편리한 조치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방군의 대가로 받은 포가 군사적인 목적에 쓰여지지 못하고 오히려 지방 수령들의 사사로운 이익에 쓰여지면서 그 실효성 이 없어졌으며 일반 농민들은 전세·공물·진상물·요역 등에 동원됨으로써 그 생활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결과는 관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었으나≪경국대전≫이 성립될 때부터 공공연히 행해졌고 이것이 중 종 때에는 일시적으로 장려되기도 했다. 진관체제의 기본 골격은 戶·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번상이나 유방 정병에 주어졌던 보인의 도망·유리 등의 현상은 정병이 보인의 부담까지 져야 했고 또한 정병을 기피하는 자를 위한 代立의 폐단이 나타나 진관체제 유지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수군은 그 폐단이 육수군보다 더 심한 편이었다. 그들의 역이 여러 병종 가운데 가장 고된 중역이었을 뿐 아니라 세습적인 요소가 많았다. 게다가 연해의 각 浦는 행정구역과 관계없이 근처 연해민이 아닌 자로 충당하는 등의 모순으로 사실상 진관체제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의 전국적인 방위망인 진관체제는 정규의 군사가 남아 있지 않았던가 또는 남아 있다 하더라도 군사적 기능을 거의 갖추고 있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일단 유사시에는 군사가 아닌 계층까지 총동원하여 대처하는 이른바 「制勝方略」의 응급적 分軍法으로 대신하게 된 것이다. 즉 제승방략적 분군법은 각 진관별로 자전자수하는 것과는 달리 유사시에 각 읍의 수령이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인 信地로 가서 공동 대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제승방략은 가까이 있는 각 읍의 군사가 하나의 방어진지로 모여 대처하기 때문에, 후방지역에는 군사가 없어 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뒤에 방어할 수 있는 군사력이 없어 2차로 방어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우려를 크게 내포한 전법이다.

 제승방략은 중종 때의 남방에서의 三浦倭亂, 명종 때의 乙卯倭亂 등을 겪는 동안에 시도된 전략이며 이는 진관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데 대한 하나의 보완책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제승방략의 특색은 각 지방의 군사를 제도상으로 겸찰하던 소관 수령이 인솔하여 미리 할당된 방어진지에 가서 대기하면 都元帥·巡邊使·防禦使·助防將 등 중앙으로부터 임시로 파견되는 京將과 본도의 병·수사가 제각기 지휘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변사·방어사·조방장 등의 경장 파견은 삼포왜란 이래 계속되던 제도였으며 제승방략은 비전투원까지 동원하기 위한 거국적인 군사체제였으나 임진왜란에서 李鎰의 패배 등으로 보아 이것도 역시 거의 제구실을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북방 특히 양계지방 등에서도 제승방략에 의한 분군법이 행하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북방에서는 남방과는 달리 경장의 파견은 제한되고 있었다. 설사 경장이 파견된다 하더라도 경장 중심의 지휘계통으로 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의 절도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휘계통을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 지 않았다. 이 점은 원래 북방의 지방관 편제가 대개 무인 중심으로 이루어 진 데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 21년(1588) 3월 3일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이 상주한 「請行制勝方略狀」은 남방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이에 의하면 함경복도에 賊變이 일어났을 경우 이를 물리치기 위한 방략으로 6진(온성·종성·회령·부령·경원·경흥)의 大分軍과 3읍(명천·길주·부령)의 分軍에 의하여 도내의 전시 편제를 새로이 편성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는 유사시에 북도병마절도사를 중심으로 한 도내의 전병력을 집중적으로 동원하려는 체제이다. 그리고 이일은 위의 請行狀에서 남도의 군사를 북도의 유사시에 동원하여 남도의 각 읍의 수령을 繼援將·遊擊將·助防將 등으로 차정하고 각 위에 분속 분군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북도의 제승방략도 근본적으로는 남방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으나 다만 남방의 경장 중심체제와 북방의 병마절도사 중심체제의 차이가 보여진다.

 따라서 제승방략은 제승할 수 있는 방략이라는 의미로 그 역사적 의의는 종래 방어체제인 진관체제가 군사의 피폐와 지방관의 무성의 등으로 그 기능이 상실되자 남아 있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집중적으로 적을 막는 방책으로서 남방에서는 경장의 파견이 잦아 새로운 분군법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북방에서는 경장의 응원이 없는 형태로 나타났으나 진관체제를 대 신하는 전법이라는 점에서는 사실상 양자가 궤를 같이 한다. 북도에서 제승방략을 체제화하는 데는 선조 21년 이일의 「청행제승방략장」에서 언급되었으나 이 때는 이미 선조 16년에 野人 尼蕩介의 亂 등 큰 전란을 겪고 이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이 전란은 북방에서 일어난 전란 중 가장 대규모적인 것으로 이 때까지 없었던 都巡邊使 이하 방어사·조방장 등이 경군을 이끌고 이곳에 처음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것은 그 동안 이 지방의 진관체제적인 방어태세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이러한 국난을 당하자 그 허구성이 여지없이 드러났음을 볼 수 있다.

 이 난이 있은 뒤 당시의 장수 이일이 이곳의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새로운 방어체제로서 을묘왜란 이후 시행되기 시작하였던 남방의 제승방략적 분군법을 도입하여 방어를 강화하였고 이듬해에는 정비를 마친 다음 야인 소탕전을 감행하여 전과를 올리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승방략이 지방군제로서 어느 정도 실용성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즉 진관체제의 자전자수하는 전술에서 제승방략적인 전술로의 이행이 임진왜란과 같은 큰 위난을 맞았을 때는 거의 그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따라서 왜란 중에 柳成龍 등이 진관체계의 재정비를 주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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