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4. 군령·군정기관의 정비
  • 1) 군령기관의 정비
  • (3) 군령권의 정비

(3) 군령권의 정비

 군령체계는 태종 9년 8월 三軍鎭撫所가 설치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이 때에 태종은 병조가 군사관계에 전단적 권리가 있는데 대해 “병조는 모두 유신으로 充選되어 있으므로 군사를 指劃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여 삼군진무소를 설치하고 都鎭撫·上鎭撫·別鎭撫 각 1인과 鎭撫 27인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문관 중심의 병조에 치우쳐 있는 병권에 대한 배려에서 취해진 것이었다.306)≪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8월 경술.

 영삼군사처의 후신인 삼군진무소는 곧 의흥부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의 병조와 의흥부의 사이에는 관장사항이 구분되어 있었다. 즉 군령에 관한 사항은 의흥부가 장악하고 병조는 군정업무를 분장하도록 한 것이다.307)≪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8월 정묘.

 당시 병조와 의흥부와 군사관계 업무분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兵 曹:銓選·儀仗·差備·禀命移文等事

義興府:考察軍士省記·監申巡牌出納·禀命出令等事

 이로 보면 인사·의식 등의 군정은 병조가 장악하고 군령사항은 의흥부가 장악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의흥부에는 兼判事(2품)·知事(2품)·同知事(2품)가 각 1인씩, 그리고 3품 이하의 진무를 두었는데 2품의 고위직은 갑절로 늘었다. 의흥부가 군령기관으로 설립되어 있는 동안 삼군도총제부는 그 예하에 있으면서 군령체계는 의흥부·삼군도총제부·10사의 선을 따라 세워지고 있었으며 군정을 장악하는 병조가 의흥부와의 협조관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태종 12년(1412) 7월에 이르러 의흥부는 혁파되고 군사관계는 다시 병조에서 총령하게 되었다.308)≪太宗實錄≫권 24, 태종 12년 7월 무신. 이로써 모든 군령은 병조가 王旨를 받들어 각 군에 行移하고 각 사는 다시금 10사에 전명하게 하는 병조에 의한 단일적 군령체계가 복구된 것이다.

 태종 14년을 전후하여 삼군진무소가 복설되어 병조와 삼군진무소는 다시 양립된 채 군령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309) 閔賢九, 앞의 책, 279∼280쪽. 그러다가 태종 18년에 이르러 태종이 세종에게 전위하면서 병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하여 몇 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전에 義勇衛를 설치하여 세자가 군사지휘를 분령하도록 했던 것인데 전위함에 이르러서는 종래의 삼군진문소를 새로이 義建府 鎭撫所로 하고 의용위진무소를 삼군진무소로 했던 것이다.310)≪太宗實錄≫권 36, 태종 18년 8월 정해. 그러나 의건부는 곧 폐지되어 삼군부(삼군도총부)에 합속되는데 이는 적극적으로 병무를 전단하기로 한 태종이 형식상의 병권 양분상태를 불필요하게 여긴 때문이다.

 이로써 군령계통은 병조와 三軍都鎭撫所가 양립된 채 삼군도총제부·10사의 상위에서 지휘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사망하고 동 14년 3월에 삼군도총부는 혁파되고 중추원이 복설되어 숙위와 경비 등의 임무를 맡게 되었지만 군령상의 기능은 형식적인 것으로 되어 마침내 職掌이 없는 관서로 되어버린다.311)≪太宗實錄≫권 55, 세종 14년 3월 을해·권 56, 세종 14년 5월 신유.
≪世祖實錄≫권 29, 세조 7년 정월 무신.

 따라서 군령계통상으로는 병조와 전무소가 양립된 채 가장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세종대 전반 및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두 기관은 병치되어 군령을 장악하였다. 이같은 군령기관의 양립을 이해하기 위하여 군령계통상의 병조와 삼군진무소의 상호관계 및 군령체계의 실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병조와 삼군진무소의 상호관계는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다. 당시는 이미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두 기관의 관계 조정은 문무의 지위 및 정치권력의 편성 형식과 연결되었을 뿐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영향받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병조와 삼군진무소는 군령을 같이 장악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성격을·달리하는 두 기관은 서로 군령계통상 열세에 서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세종 14년 9월을 전후한 일련의 논의를 통하여 당시 군사 지휘체제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

 군령체계상 같은 지위에 있는 두 기관은 태종 때에는 군령의 移受는 큰일일 경우 병조 당상과 도진무가 함께 나아가 왕으로부터 승명하고, 큰일이 아닐 경우 병조 낭청과 삼군진무소의 진무가 함께 승정원에 나아가 승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종이 즉위하면서 병권은 상왕인 태종이 전단 처리 하였다. 그러나 상왕을 위해 별도로 代言(承旨)을 임명하지 않고 병조가 대행하게 되자 진무가 병조에 나아가 명을 받도록 하였다. 따라서 태종이 사망한 뒤에도 소규모의 군령관계의 천명이 있으면 병조 낭청이 승정원에 나아가 승명하고 진무소 진무가 다시 병조애 가서 숭명하몄고 군령상 移文의 권리를 갖는 병조가 3군에 직접 이문하면서 삼군진무소에는 이문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에 대하여 세종 14년 9월 삼군진무소는 국초의 의흥삼군부와 계열이 같음을 상기시키고, 군령을 승명할 때 병조 낭청과 삼군진무소의 진무가 함께 승정원에 나아가도록 하고, 군무에 관련된 정령은 병조가 삼군진무소에 대하여 빠짐없이 이문하도록 하며 진무의 劾罪도 병조에서 멋대로 하지 않도록 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312)≪世宗實錄≫권 57, 세종 14년 9월 임신. 그러나 일에 대한 반응은 삼군진무소는 병조의 예하기관으로 되어야 한다는 詳定所 견해가 지배적이어 군령상 열세를 회복하려던 진무소의 노력은 실패했으나 병조에 예속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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