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5. 군비의 확충
  • 2) 군량미의 확보와 운송
  • (2) 양계지방의 군량미 확보

(2) 양계지방의 군량미 확보

 양계로 표현되는 함경도와 평안도는 전기한 바와 같이 국가의 방수지역인 동시에 중국과 접경하고 있어 국방과 군량 비축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이들 지역에서 소용되는 군량은 일단 이 지역에서 거둔 전세와 각 지역에 설치된 둔전의 수확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방수지역이라는 이유로 인하여 평상시에도 군수라는 항목으로 비축되었기 때문에 흉년이나 기타 유사시에는 軍餉이라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게 되었다.359) 金鎔坤, 앞의 글, 287쪽.

 따라서 이 지역의 비축곡이 적을 때에는 어느 곳보다도 먼저 군량비축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태종대에는 동북면의 所儲雜穀이 부족하다고 하여 강원도 군량을 이곳으로 수송하려고 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고, 태종 16년(1416)에는 동남면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開城留後司의 陳穀을 조 운하는 등의 조처가 취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종대에는 4군·6진이 개척됨으로써 국경지대인 의주의 군수를 충당하기 위하여 황해도·경기도 등지에 비축되어 있던 군자곡을 운송하기도 했다. 이러한 양계지방의 군수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세종대에는 각 도의 의창곡을 양계에 운송하여 국방에 대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360)≪世宗實錄≫권 92, 세종 23년 정월 무오.

 이러한 양계지방의 군량미 확보는 대개 각 도의 환자곡 미환수분이나 의창곡 등이 군자곡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태조 이래 군량미 확보로서 취해진 위의 미곡 回換의 방법은 세종 연간에 와서는 당시 환자곡으로 연명해 가고 있던 양계민들에게 생존 자체뿐만 아니라 양계 군량미 확보의 근거를 흔든다는 이유에서 금지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계지역에로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방법 역시 세종 당시의 실정으로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곡 회환의 방법은 쉽게 버려지지 않고 사용되었다.

 미곡 회환의 방법이란 한마디로 당해 지역의 군량미가 부족할 경우에, 첫째 그 지역민 중 富實者로 하여금 군량미를 그 지역의 관에 납부하고 대신 관으로부터 미곡이나 면포를 지급받는 경우와, 둘째 경중 상인이나 그 밖의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양계지역에 미곡을 납부토록 하고 그 대가를 중앙정부에서 받아가는 방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느 경우나 국가에 의한 조운의 폐단이 수정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미곡 회환의 방법 또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곡 회환의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미곡 회환을 주도한 이들이 상인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본래의 목적인 미곡을 납부하는 일 이외에 잡물들을 양계인들에 판매함으로써 양계지역의 군량 수급에 커다란 차질이 이따금 초래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곡 회환의 금지령이 수시로 발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의 판매금지령도 내려지곤 하였다.361) 金鎔坤, 앞의 글, 288∼289쪽.

 양계지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 가운데는 군량미 확보의 문제보다도 어느 면에서는 이의 보관문제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전쟁이 없는 경우에는 군자미가 賑貸化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성종 2년(1471) 8월에는 평안도의 강가를 끼고 있는 여러 읍의 군량저축으로 司贍寺 면포 10,000필을 평안도에 보내 이를 양곡과 바꿔 여러 읍의 군수 유무를 헤아려서 지급하도록 하였다.362)≪成宗實錄≫권 11, 성종 2년 8월 기사. 양계지역은 원래 면포가 귀하여 군량보충으로 면포가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고 상인들의 교역도 그들이 가지고 간 면포와 양계인의 미곡을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로는 군량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 보관을 위한 창고의 부족으로 노적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태는 평안도지방에서 특히 심하였는데 이러한 경우 창고를 조영한다든가 아니면 군자곡을 의창곡으로 바꾸어 전용함으로써 창고 부족을 메워 나갔다.363)≪成宗實錄≫권 48, 성종 5년 10월 기사·권 53, 성종 6년 3월 정묘·권 86, 성종 8년 11월 을해.

 성종대에는 양계지방에 자주 양전을 실시하여 실제적으로 2배 가량의 군자미를 얻을 수 있었다. 꾸준한 군량미 비축의 결과로 군량미의 진대화가 이루어져 군량미 감소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성종 이후에는 양계지방의 군자 보충방법으로 둔전 경작이 꾸준히 장려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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