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1. 관학
  • 1) 성균관
  • (1) 명칭과 시설

(1) 명칭과 시설

 성균관은 문과시험을 준비하는 조선왕조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 은 관학의 최고학부였기 때문에 유생들이 학습·기숙하는 모든 비용은 국가에서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이 점은 사학·종학·향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성균관의 명칭은 國學·太學·泮宮·賢關·芹官이라고도 하였다. 「成均」은 禮樂을 통하여 국가의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366)≪文獻通考≫권 40, 學校考 1, 太學. 「國學」은 ‘國의 學’이라는 뜻이요,367) 위와 같음. 「太學」은 「大學」과 같은 뜻으로 천자의 학을 의미하였으니368) 위와 같음. 「국학」이 제후의 학이라면 「태학」은 천자의 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는 혼동하여 쓰이기도 하였다. 뒤에 중앙의 관학을 國子學·太學·四門學으로 나누었으나 이 때의 태학은 입학생 등급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였다.

 고려 말 이후의 성균관은 두 가지 큰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지배사상인 주자학이념 보급의 근거지로서의 기능이요, 다른 하나는 국가의 관료를 양성하는 관료양성소로서의 기능이다.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와 신흥무장이 주축이 된 신귀족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사학에 근거를 둔 구귀족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주자학과 관학을 일으켰다. 충렬왕 30년(1304) 5월에 安珦이 국왕 이하 백관에게서 돈을 거두어 成均監에 장학재단인 贍學錢을 두고, 박사 金文鼎을 원에 보내어 공자 및 70제자의 상과 문묘제기·악기와 6경·제자·사서를 수입하여 오게 한 것이나,369)≪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스스로 노비 300구를 시납한 것이나,370)≪成宗實錄≫권 70, 성종 7년 8월 무신조에 의하면 文籍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安珦(조선 문종의 諱가 珦이라 避諱하여 裕로 고쳤음-필자)이 國學에 노비 300口를 施納한 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충숙왕 6년(l319) 6월에 博士 柳衍, 學諭 兪迪을 강남에 보내어 송의 秘閣圖書 10,800권을 사온 것이나, 원으로부터 다시 서적 4,071책을 받아온 것 등이 그 예이다.371)≪增補文獻備考≫권 202, 學校考 1, 太學 1 충숙왕 원년 6월. 權溥·李瑱·權漢功 등의 유학자들은 성균관에 모여 이러한 책들을 정리 연구하여 주자학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다.372) 위와 같음. 그리하여 공민왕 16년(1367) 12월에는 崇文館의 옛터에 불타버린 성균관을 중창하고 李穡을 兼大司成, 鄭夢周·朴尙衷·朴宜中·李崇仁 등을 兼敎官으로 삼아 성균관 교육을 강화하였다.373)≪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교과서는 주로≪四書集註≫가 채택되었으며,374)≪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 이미 이에 대한 倡註까지 나돌게 되었다.375)≪高麗史≫권 107, 列傳 20, 權㫜 附 溥. 이러한 주자학연구는 공양왕대에 구귀족의 불교를 배척하고 이성계 중심의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이론적인 바탕을 만들 수 있었다.376) 李相佰,<儒佛兩敎 交代의 機緣에 대한 硏究>(≪韓國文化史硏究論考≫, 乙酉文化社, 1941). 공양왕 3년(1391)에 성균관의 대사성 鄭道傳과 朴礎 등 급진적인 성균관 유생들이 사원을 혁파하여 이성계 세력의 인적·물적 기반을 강화시키고자 한 주장이 그것이었다.377)≪增補文獻備考≫권 202, 學校考 1, 太學 1.

 조선이 건국되고 유교가 국가의 지배사상이 되자 성균관은 ‘明人倫 成人才’378) 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學校.의 사명을 띠고 태조 7년(1399)에 국도 건설의 일부로 지금의 성균관대학교가 있는 崇敎坊에 明倫堂·文廟·東西齋·正錄廳·養賢庫·식당 등 96칸에 이르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379) 成均館은 漢陽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해인 태조 4년(1395)에 착공하여 3년 뒤인 태조 7년(1398) 7월에 완공되었다(≪太學志≫상, 권 1, 學舍·廟宇). 그러나 정종 2년(1400)에 문묘가 불타버려380)≪定宗實錄≫권 3, 정종 2년 2월 정유. 태종 7년(1407)에 중건되었으며381)≪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3월 기해. 동왕 9년에는 예문대재학 卞季良으로 하여금 문묘비를 지어서 세우도록 하였다.382)≪東文選≫권 121, 有明朝鮮國學新廟碑銘幷序. 그 후 성종 3년(1472) 가을에 문묘 옆에 문묘향사의 일을 담당하는 典祀廳을 지었으며,383)≪增補文獻備考≫권 203, 學校考 2, 太學 2. 성종 5년 윤6월에는 기존 泮水의 양안에 석축을 쌓고,384)≪成宗實錄≫권 44, 성종 5년 윤6월 신축. 성종 9년 7월에 반수를 갖추어 팠다.385)≪成宗實錄≫권 95, 성종 9년 7월 계미. 아울러 성종 6년 가을에는 명륜당 북쪽에 도서관인 尊經閣을 세우고 5경·4서 각 10책과 8도로부터 찍어올린 책 수만 권을 수장하고 司藝·學正 각 1인씩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386)≪增補文獻備考≫권 203, 學校考 2, 太學 9 성종 6년 가을. 그러나 연산군 때에 성균관이 왕의 宴樂 장소로 바뀌어 교육기능을 잃었다가 중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문묘를 중수하고 교육기능을 그 전처럼 복구시키고 명나라의 예에 따라 문묘묘정비를 세웠다.387)≪增補文獻備考≫권 203, 學校考 2, 太學 2 중종 원년·6년. 그 후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성균관이 불타버려 선조 34년에 문묘를, 선조 39년에 명륜당 등을 다시 세웠다.388)≪增補文獻備考≫권 203, 學校考 2. 太學 2 선조 34년·39년.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인조 4년(1626)에 李廷龜의 陰記를 더하여 변계량의 문묘비를 다시 세우고 효종 4년(1653)에는 香室을 다시 지었다.389)≪增補文獻備考≫권 203, 學校考 2, 太學 2인조 4년·효종 4년·현종 5년 추 9월. 또한 현종 4년(1663)에는 서울의 두 尼院을 헐어 北學을 세우려다가 명륜당 서쪽에 丕闡堂을 세워 명륜당의 별당학사로 사용하게 하였으며,390)≪太學志≫하, 권 9, 事實 紀蹟. 丕闡堂에 대해서는 宋時烈의<丕闡堂記>에서, 「丕闡」이란 말은 朱子가 말한 ‘丕闡大猷 抑邪與正’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丕闡堂은 조선 후기에 과거시험장으로도 쓰였다. 그 북쪽에 一兩齋, 남쪽에 闢入閣을 지었고,391)≪太學志≫하, 권 9, 事實 紀蹟 下. 「一兩」이란 이단인 불교의 사찰을 헐어 유학의 학사를 지었으니 ‘一擧而兩得’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朱子), 「闢入」이란 ‘關之而後 可以入道’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程子). 영조 19년(1743)에는 大射禮를 행하는 六一閣을 명륜당 동북쪽에 세웠다.392)≪增補文獻備考≫권 203, 學校考 2, 太學 2 영조 19년 5월. 「六一」이란 射가 六藝(禮·樂·射 御·書·數)의 하나라는 데서 따온 것이다. 한편 成均館의 각 건물의 위치를≪太學志≫상, 권 2, 建置泮宮圖에 의거하여 간단히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

확대보기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