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1) 과전법체제의 확립
  • (2) 사전개혁의 이념

(2) 사전개혁의 이념

사전개혁의 발의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은 조준의 상소이다. 조준은 위화도회군 직후 이성계의 천거에 따라 知密直司事兼大司憲이 되어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자문하는 처지에 서게 되었는데,0008)≪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 이 때의 상소에서도 그는 사전개혁의 선봉에 서서 그 구체적 개혁의 요항까지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 개혁안의 요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0009)≪高麗史≫권 78, 志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이 내용에 대한 설명은 金泰永, 앞의 책, 44∼52쪽 참조.

C-1. 중외의 창고가 모두 비어 군국의 비용이 나올 곳이 없으며 변경의 우환은 예측할 수 없다. 지금 마침 量田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니, 규정에 따라 일정한 액수를 급전하기 이전에 모든 전지에 대하여 3년을 한정하여 임시로 公收토록 한다면 군국의 수용에 충당할 수가 있고 관리의 녹봉도 줄 수가 있다.0010)이 조항은 당시 개혁파 사류의 사전 개혁운동이 단순한 상소운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전국적 양전의 계획까지 세워 놓은 상태에서, 그리고 그 양전과 동시에 전국 공사전을 모두 公收한다는 치밀한 계획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전한다. 동시에 제시된 전법판서 조인옥의 상소에서도 “事機를 놓치지 말고 금년부터 임시로 공사전조를 공수하여 軍食을 갖춘 후에 조종의 分田之法을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공사전조의 일체 공수는 나중에 살피는 바와 같이 이 해부터 수년간 그대로 실현되어 갔다.

2. 녹과전시는 侍中으로부터 庶人在官者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절급하되, 그것을 당해 아문에 배속시켜 당직자가 체식토록 한다.

3. 구분전은 왕자 제군 및 1품으로부터 9품에 이르기까지 시·산을 막론하고 품계에 따라 지급하며 첨설직을 받은 자는 그의 실직에 따라 주는데, 모두 終身에 한한다. 그 처가 수절하는 경우도 조신에 한한다. 현임 외에 전항 및 첨설직으로 수전한 자는 모두 5군에 소속시키며, 그 재외자에게는 다만 군전을 주어 충역한다. 무릇 수전자로서 죄가 있으면 그 전지를 국가에 환납하고, 승급하면 거기에 따라 더하여 지급한다.

4. 군전은 그 재예를 시험하여 주는데 20세에 수전하고 60세에 반납한다.

5. 외역전은 군현의 향리, 진·향·소·부곡·장·처리 및 院·館直의 구분전으로서 전례대로 절급하는데 모두 그 종신에 한한다.

6. 城隍·鄕校·紙匠·墨尺·水汲·刀尺 등의 位田은 전례대로 절급한다.

7. 白丁代田은 백성으로 付籍되어 차역에 당하는 자에게 호당 1결씩으로 하고 그 納租를 불허하며, 공사천인으로서 차역에 당하는 자에게도 역시 절급하되 籍에 명백히 기록해 둔다.

8. 寺社田은 정리하여 祖聖 이래의 국가 裨補所로서 경성에 있는 것에는 廩食을 주고 외방에 있는 것에는 柴地를 주며, 密記 이외의 것은 삼국시대 이래 새로 지은 寺社에 이르기까지 주지 않는다.

9. 驛田으로서 馬位·口分田은 전례대로 절급하되 모두 終身에 한한다.

10. 外祿田은 留守·牧使·都護府使로부터 知官·監務에 이르기까지 관품에 따라 정하고, 인구수에 따라 計口하여 녹과전을 절급한다.

11. 공해전은 각 관아의 품질 고하와 吏員의 다소에 따라 지급한다.

12. 무릇 作丁에 있어서는 공전·사전의 구분을 일체 없애고 혹 20결, 혹 15결, 혹 10결씩으로 묶어서 하되 각 군현마다 丁號를 천자문으로 표기하며 전주의 성명을 달아두지 아니함으로써 뒷날 조업전이라고 모칭하는 폐단이 일어날 길을 끊는다.

13. 양전이 끝나 안정된 연후에 법에 따라 分授할 것이며, 공사전조는 매 1결당 미 20두로 하여 민생을 후하게 한다.

14. 전지의 분급과 환수시 1결을 가급하거나 1결을 加受한 자, 수전시 1결을 누락시키거나 환납시 1결을 은닉시킨 자, 부자간에 관에 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수수한 자, 父가 죽은 후에도 그 부의 所食田을 반환치 않는 자, 타인의 전지를 1결 이상 탈취하거나 공전 1결을 은닉시킨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 양전시에 10負 이상의 전지를 은닉시킨 자는 사형에 처하며, 전지를 누락시킨 경우도 같다. 무릇 田禁을 범한 자는 赦宥의 경우에도 혜택이 미치지 않으며, 版圖司와 司憲府에 그 이름을 올려 그 자손의 臺諫 政曹 仕宦을 불허한다.

이상 趙浚의 1차상소로 흔히 불리우는 창왕 즉위년(1388) 7월의 사전개혁안에는 토지지배관계에 관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드러나 있다.

첫째, 여기에는 직역을 가진 개인과는 별도로 국가 기관의 당직자 자체에 대한 급전이 설정되었다. ‘당해 아문에 배속시켜 당직자가 체식토록 한다’는 녹과전시(C-2)를 비롯하여 외록전(C-10), 공해전(C-11) 등이 그것이다. 이들 토지는 당직자가 당직 기간에 한해서만 취식할 수 있도록 설정한 일종의 직전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황·향교·지장·목척·수급·도척 등의 위전(C-6)과 역의 馬位田(C-9)도 같은 성격을 띤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국가 기능의 수행을 위한 기초 재원으로 설정한 것이므로 국유지와 같이 국가의 관리권이 큰 토지로써 충당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토지를 직역자 개인에 분속시키지 않고 국가기관에 배속시킨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 같은 토지종목은 고려 전시과에서도 각종의 位田 등 하급 직역에 대해서는 설정된 바 있었으나, 이 녹과전시 및 외록전과 같이 중앙, 지방을 막론하고 고위의 관직에까지 적용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처음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이 개혁안은 토지지배관계에서 국가의 공적 관리권을 매우 강화시키려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여기에는 현 직역자는 물론 그가 퇴직하고 나서도 종신토록 취식할 수 있도록 설정한 구분전 계열의 토지를 들 수 있다. 제군 및 1품으로부터 9품에 이르는 時·散의 관인이 취식하도록 설정한 구분전(C-3)과 각 지방 행정·교통기관의 외역전 및 驛子 구분전(C-5, 9) 등이 그것이다. 관인 구분전은 고려 후기에 크게 팽만한 사전과는 다르게 관인 신분의 유지를 위해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운용한 토지였다. “전조의 사전은 모두 下道에 있었으며 경기는 비록 達官이라도 다만 구분전 십수 결 뿐이었는데 역시 족히 거기에 의지하여 생활할 수 있었다.”0011)≪太宗實錄≫권 55, 태종 3년 6월 계해.고 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관직의 수행을 위한 관인의 생활 재원으로 절급된 것이었는데, 이 개혁안에서도 마찬가지 성격의 것으로 설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외역전 등으로 설정된 구분전은 물론 국가 말단 행정·교통기관 종사자의 직역수행을 위한 생활자원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후자인 직역자 구분전은 그 직역이 사실상 세습적으로 수행되어 가는 것이 관행이었으므로 직역과 함께 그 구분전 또한 세습되어 가도록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의 ‘종신에 한한다’는 제한 규정은 이들 직역적 구분전에서의 토지지배 관행에 별다른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질적으로 큰 비중을 가진 관인 구분전의 경우는 종래까지의 토지지배 관행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즉 무엇보다도 종래의 구분전은 이미 사실상 조업전화하여 있었음에0012)≪高麗史節要≫권 25, 충혜왕 후 5년 5월 金海君李齊賢 上書. 반하여 여기서의 그것은 일반적으로 관인 자신의 종신에 한하며 기껏해야 그 守節妻의 종신까지 한하도록 규정되었던 것이다. 관인 구분전을 종신에 한정하며 그 후의 국가반환을 규정한 내용은 C-12의 조업전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규정에 비추어서도 명백한 것이며, 다시 C-14의 가혹한 토지관리 규정으로 보아서도 관인 종신 후의 그 구분전 반환은 필연적으로 실현되도록 원칙화하여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도 이 개혁안은 토지에 대한 국가의 공적 관리권을 대폭 강화시킨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셋째, 20세에 군역과 함께 절급받고 60세에 퇴역과 동시에 환납하는 軍田이 설정되었다. 종신에 한하지 않고 국역의 담당기간 동안에 한하여 취식하게 하였다는 의미에서 군전이야말로 직역전의 전형적 유형으로 설정된 것이다. 국가 직역의 전형적 형태인 군역에 대해 지급된 군전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국가의 공적 운용이 요구되는 지목이었다. 그리고 자세한 규정은 보이지 않지만 C-7의 ‘白丁代田’이란 것도 국역담당자에게 절급한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직역전의 일종으로 설정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군인전은 물론 전시과에서도 설정되어 있었으며 전형적으로 전정연립의 적용을 받는 토지였지만, 군인전제도의 붕괴는 고려 후기 사전팽창의 큰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選軍給田의 법이 폐하여지면서 겸병이 드디어 일어났다”거나 혹은 “府田이 망하자 府兵 또한 망하였다”는 등의 사실이 당시에 이미 누누히 지적되고 있었다.0013)金泰永, 앞의 책, 23∼24쪽. 그 제도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지고 난 후 새로운 개혁안에서 설정된 전형적 직역전으로서의 군전은 이미 전정연립 원칙과는 전혀 관계없는 별개의 것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즉 여기 군전은 군인으로서의 재예를 감당할 수 있는 자를 선발하여 그가 군역을 담당하는 기간 동안에만 취식하도록 하는, 철저한 국가 관리하에 운용되는 토지로 설정되어 나타났다. 이 개혁안은 군역 이외의 국역을 담당시킬 자에게도 ‘백정대전’ 따위를 설정하는 정도로 무릇 모든 국역자에게는 토지를 절급한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지만, 또한 그 수수에 관한 한 국가의 공적 관리권을 한층 더 강화시켜 둔다는 원칙도 표방하였던 것이다.

넷째, 전정연립의 원칙을 폐기할 뿐 아니라 이 개혁안에서는 토지를 파악하는 단위로서 이른바 作定방식 자체에 중대한 변화를 기도하였다. 즉 종래까지의 足丁·半丁 따위의 작정방식을 폐기하고 각 군현별로 20결, 15결, 혹은 10결씩의 토지를 단위로 묶어 그것을 천자문의 글자 순차에 따라 작정하는 字丁制를 도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족정·반정제의 실체는 아직도 명백하지 못한 편이지만, 1족정은 17결로 구성되며 그것이 직역전의 절급 단위임과 동시에 전조 수취단위였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0014)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尹漢宅,<고려 전시과 체제하에서의 농민신분>(≪泰東古典硏究≫5, 1989).
그리고 새로운 작정의 단위가 왜 하필 20결, 15결 혹은 10결로 설정되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나중에 그것이 결국 5결 작정으로 귀착되기에 이른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에 아마도 이 시기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직역전 절급의 기본 단위를 축소하여 5결을 최소단위로 하는 작정방식을 도입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과전법에서 軍田의 최소한이 5결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C-12의 내용으로 보아 사전의 전정에는 그 田主의 성명이 기재되어 소속관계를 증명해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0015)이경식, 앞의 책, 84쪽. 그런데 고려 후기에 와서는 직역과 직역전의 연계가 붕괴되어 직역전 모두가 조업전이라는 사전으로 전국에 팽만하기에 이르렀으니, 족·반정제의 운용이라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게 되고 말았다. 작정방식의 새로운 고안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필요한 일이었다.

앞서 살핀 바 이 시기의 사전은 그것이 곧 조업전이라는 사실을 文券에 의하여 증빙함으로써 사전으로서의 배타적 권한을 보장받고 있었다. 현안의 사전을 개혁하려는 이 마당에서 이제 작정의 단위를 새로이 조정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개혁 이후에도 그것이 다시 조업전으로 변질될 수 있는 소지를 철저히 끊어버리는 조처는 필수적인 수순이었다 할 것이다.

그래서 개혁파 사류는 각 군현별 字丁制라고 하는 새로운 작정의 방법으로 양전을 추진하면서 거기에는 이제 공전·사전의 구분을 일체 없앤다는 것, 따라서 사전의 전적에 전주의 성명을 기재하는 관행을 아예 제거함으로써 그것이 후일에라도 조업전으로 주장될 수 있는 근거조차 없애버린다는 것, 그리고 새 양전에 따라 새로운 자정제 작정이 안정된 후에 법에 따라 토지를 새로이 절급한다는 원칙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하여서는 국가의 공적인 토지 관리권을 더욱 강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C-14에 나타난 바 새로운 토지 운용에 관한 법제를 범한 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규정이 곧 그것을 뒷받침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실로 가공하리 만큼 가혹한 처벌규정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개혁파 사류가 고안해 낸 이 새로운 사전개혁안의 기본원칙은 한마디로 무엇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개혁안은 토지 운용의 전체적 내용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그 궁극적 의미를 간단히 단언하기는 어려운 바 있다. 그런데 그것은 전국의 토지를 보편적인 국가수조지로 편성해 놓고 다만 그 수조권의 일부를 국가기관 혹은 공직자에게 절급하여 취식하도록 하되 그 모든 것을 철저한 국가의 공적 관리하에 두어 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국가체제 유지의 기본적 사회계층인 군인층에게 직역전으로서의 군전을 절급한다고 설정한 것, 국고가 어느 정도 충실해질 때까지 사전에 대해서도 국가에서 전조를 公收할 뿐 아니라 이후로는 공전·사전의 구분을 일체 혁파하고 전적에는 전주의 이름을 아예 삭제해 버린다는 것, 토지법제를 범하는 경우에 대해 추호의 용서도 없는 가혹한 처벌규정을 설정한 것 등으로 미루어, 이 개혁안은 전국의 토지를 국유로 편성해 두고 다만 직역자에게 응분의 수조지 혹은 면조지를 절급한다는 원칙하에서 추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같은 원칙론은 역시 개혁파 사류의 주동인물의 하나였던 정도전의 다음의 글에서도 나타나 있다.

D. 옛날에는 전지가 모두 관에 속해 있어 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민이 경작하는 것은 모두 그가 받은 전지였다.…전제가 무너진 뒤로 호강이 겸병을 하게 되어…전하가 잠저에 있을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연히 사전의 혁파를 자신의 임무로 맡았으니, 대개 경내의 모든 전지를 취하여 국가에 소속시키고, 民數를 헤아려 授田함으로써 옛날 전제의 올바름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구가 세족들이 그것이 자신들에게 불편하다고 번갈아 비방 원망하고 여러 방면으로 저해하여 民으로 하여금 至治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鄭道傳,≪三峰集≫권 7, 朝鮮經國典, 賦典 經理).

즉 개혁파 사류가 추진한 바 사전개혁의 원래 이념은 토지국유와 計民授田의 원칙을 실현하는 이상적인 제도를 창출하려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정도전은 나중에 술회하였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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