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1) 과전법체제의 확립
  • (4) 과전법의 내용과 그 운용

가. 토지분급 규정

과전법에 나타난 토지지배관계의 기본방향은, 전국의 토지를 일단 국가수조지로 편성한 위에 그 수조권을 국가재정의 용도에 따라 각 기관에 분속시키고 다시 중앙·지방의 관인층과 직역인에게 그것을 절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개혁의 동기가 무엇보다도 조업전적 사전의 혁파와 관련하여 추진되었던 만큼, 결과적으로 국가 수조지가 크게 확대되고 개인 수조지는 크게 축소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0042)祖業田 즉 世業田의 혁파가 곧 科田의 설치로 이어졌다는 당시의 인식을 참작할 일이다(≪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4월 임신). 비록 민유지가 전체 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편이지만 그 전체를 국유라는 왕토사상으로 분식하여 국왕의 명의로 그 수조권을 분속하고 절급한다는 면에서 과전법은 고려의 전시과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관인층은 물론 모든 직역자에게 수조권을 절급하여 직역을 담당하게 하던 전시과의 경우0043)金泰永, 앞의 책, 19∼20쪽.보다는 과전법이 토지지배권의 질과 양 면에서 모두 현저히 쇠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과전법에 설정된 새로운 給田制의 내용과 그 초기의 운용 사실부터 검토해 나가기로 한다.004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科田法.

H-1. 문종 때 정한 바에 따라 경기 군현에 좌·우도를 설치하고, (관인층을) 1품으로부터 9품 산직에 이르기까지 18과로 구분한다.

사전 경기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이 지역에 중앙 거주 관인들의 과전을 10만 결 정도(H-2) 설정하려면 경기지역의 확장이 불가피하였다. 이미 고려 문종대에도 전시과의 재편과 관련하여 이 지역을 크게 확장한 적이 있었다.0045)≪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王京 開城府條에 의하면 문종 16년(1062)에 京畿의 통치기구를 개편하고 동 23년(1069)에 양광도의 漢陽 이하, 교주도의 永興 이하, 서해도의 延安이하 도합 41縣을 경기지역에 편입하였다(邊太燮,<高麗時代 京畿의 統治制>, 앞의 책, 251쪽). 그래서 과전법의 시행을 위한 관련조처로서 공양왕 2년(1390)에는 현재의 경기 13군현을 좌·우도로 분립시키는 한편, 문종대의 구제에 따라 양광·교주·서해도로부터 다수의 군현을 이속시킴으로써 경기지역을 크게 확대하고 좌·우도에 각기 都觀察黜陟使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0046)공양왕 2년의 원래 경기는 13현이었는데 이 해의 개편 결과 左道에 25군현이, 右道에 19군현이 배속되기에 이르렀다(≪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王京 開城府). 이후 조선시대에 가서도 漢城으로의 천도 등 여러 요인으로 경기의 지역 변동이 여러 차례 있었다(≪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6월 신묘).

사전을 외방에 절급하면 그것을 빌미로 호강자들이 鄕曲에서 무제한하게 사전을 확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감계하여 개혁파 사류는 처음부터 사전경기의 원칙을 끝까지 지켜온 것이었다. 그리고 과전법이 이 원칙을 지켜감에 따라 이제 토지지배형태로서 수조권에 입각한 지배관계는 크게 위축됨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비록 사전의 설정을 위한 경기지역의 확장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사전의 일부가 이후 한때 하3도에 이급되는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과전법체제에서의 사전의 설정지역은 원칙적으로 경기지역에 한정되고 말았으며, 그 원칙은 이 체제가 사실상 소멸할 때까지 계속 지켜지게 되었던 것이다.

H-2. 경기 및 6도의 전지를 일체로 踏驗 量田하여 경기에서는 實田 131,755 결과 荒遠田 8,387결을, 6도에서는 실전 491, 342결과 황원전 166,643결을 얻었는데, 결수를 헤아려 作丁하되 丁에는 각기 字號를 붙여서 田籍에 기재한다.

창왕 즉위년(1388)에 시작하여 그 다음 해에 완료한 기사양전의 결과 확보된 토지는 실전 623,097결과 황원전 175, 030결이었는데, 그것이 과전법을 운용할 기본 結總이었다. 실전은 현재 경작 중인 토지를 가리키며, 황원전이란 荒閑·遠陳의 토지로서 사회의 안정에 따라 곧 기경이 예상되는 토지를 가리킨다.0047)이 황원전은 科田 따위로 절급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H-6 참조).

그리고 기사양전의 결과 확보한 전국 토지의 결총을 한꺼번에 말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각기 경기와 6도의 것으로 구분하여 논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는가. 앞서 살핀 바 과전법 시행에 즈음하여 경기지역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그래서 경기지역의 결총이 여타 지역의 것에 비하여 약 4분의 1에 가까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경기의 토지를 여타 지역의 토지와 다소 다른 용도로 편성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음에 살피는 바 일단 사전으로 설정된 토지는 이후 공전으로 편입치 못한다는 규정(H-16)을 참작해 보면, 고려의 사전이 중앙의 통제가 어려운 외방에 설치되어 결국 국가사회의 파국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감계하여 이제 사전을 경기지역에 한정하여 절급하는 원칙을 실현한다는 조처에 따른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즉 경기지역을 크게 확장하고 관인층의 사전을 집중적으로 이 지역에 한하여 절급함으로써 사전의 불법적 확대를 방지함은 물론, 외방에서의 호강의 발호를 억제함으로써 사회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를 한층 더 실현한다는 목적에서 그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서 새로운 양전을 통하여 확보한 전결의 전적을 작성하는 일에도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토지의 결부수를 헤아려 일정 단위로 作丁하되 거기에다 천자문의 字號를 붙여 순차대로 전적을 작성한다는 것은 이미 조준의 1차 상소에서 세워 둔 원칙이었다. 다만 그 상소에서 제시한 바 전주의 성명을 전적에 기재하지 않는다는 원칙 역시 이 과전법에 와서 실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 1차 상소는 워낙 철저한 토지국유의 원칙을 실현하려는 방향에서 추진된 개혁안이었지만, 과전법에 와서는 정작 그 원칙이 실현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조권자를 표시하는 전주의 성명은 기재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현실상 所耕田의 소유자 성명을 기재하는 전대 이래의 관행은 그대로 계승되지 않았을까 한다.0048)조준의 1차 상소에서 田主란 곧 수조권자를 가리킴이 명백하다. 과전법에서도 그 같은 전주의 성명을 기재하지 않고서 사전의 운용은 가능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所耕田의 소유=경작자의 성명이 이 당시의 田籍에 기재되지 않았는지는 극히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 당시로서 토지지배관계는 이미 수조권이 아니라 소유권을 주축으로 하여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유권자의 성명을 전적 즉 양안에 기재한다는 법제는≪經國大典≫에는 보이지 않고≪續大典≫에 가서 나타난다(戶典 量田). 그러나 물론≪경국대전≫등의 법전이 모든 토지지배의 관행을 다 등재한 것은 아니었다. 가령 이 때 현실에서 실행되고 있던 5結 作丁의 사실이 그 같은 사례의 하나다.

그리고 조준의 1차 상소에서는 作丁의 단위를 20결·15결·10결 단위로 조정한다고 제시하였지만, 과전법체제에 와서는 그것이 10결 혹은 5결 단위로 규정되었으며,0049)과전법에서 절급한 科田의 최하액이 10결이며, 軍田은 10결 혹은 5결인데, 자손들이 그것을 분할하여 가질 때에도 破丁을 不許한다고 하였으니, 作丁의 단위는 10결 혹은 5결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태조 2년(1393) 新都와 京畿지역을 다시 量田할 때에도 10결 혹은 5결씩 差等 作丁하였다(≪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8월 기축;李景植, 앞의 책, 84·112쪽 참조). 뒤이어 5결 단위로 정착되고,0050)≪世宗實錄≫권 74, 세종 18년 9월 갑오. 과전법체제가 사실상 무너지고 난 후에도 작정방식은 그대로 준행되어 갔다.0051)“陳起를 막론하고 5結이 되면 字號를 가지고 標記한다”(≪續大典≫권 2, 戶典 量田)는 5결 1字丁의 作丁 방식은 日帝의 조선토지조사사업 때까지 존속하였다.

H-3. 왕년의 공사 전적을 낱낱이 거두어들여 그 진위를 철저히 가려내고 舊例에 따라 損益하여 陵寢·倉庫·宮司·軍資寺 및 사원·외관의 직전과 廩給田, 그리고 鄕·驛吏田과 軍匠·雜色田을 정한다.

이 조항은 국가의 제도적 운용을 위한 토지절급의 기본을 천명한 것이다. 즉 왕실의 능침전과 궁사전, 공상을 위한 우창전, 백관의 녹봉을 위한 좌창전, 군수의 마련을 위한 군자시전, 그리고 사원전과 외관의 직전 및 廩給田, 나아가서는 향리 이하 雜色 직역인에 이르기까지의 職役田을 설정한다는 원칙을 밝혀둔 것이다. 과전법 제정 당시 이들 각 항목의 토지가 어느 정도로 분속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자세하지 않지만, 과전법체제의 운용과 더불어 다소의 변용과 정리가 일어나게 된 바, 이에 관해서는 당해 항목에서 살피기로 한다.

H-4.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므로 모름지기 科田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하여야 한다. 무릇 경성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보위하는 자는 時·散을 가리지 않고 각기 科에 따라 절급한다.

중앙 거주의 관인층에게는 현직 즉 時任官이나 전직 즉 산관이거나를 막론하고 각기 科等에 따라 구분전을 절급한다는 원칙은 조준의 1차 상소에서도 제시된 바 있다(C-3). 다만 고려 후기의 구분전은 앞서 살핀 대로 이미 조업전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과전법에서는 그 세전적 성격을 부정한다는 원칙 아래 그냥 과전이라 하였다. 과전을 절급하는 과등이 앞서 H-1에서 규정한 18과였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과전법에서 규정한 각 과의 과전 절급규모는 다음과 같다.

과 등 관 직 절 급 액
제 1 과
제 2 과
제 3 과
제 4 과
제 5 과
제 6 과
제 7 과
제 8 과
제 9 과
제 10 과
제 11 과
제 12 과
제 13 과
제 14 과
제 15 과
제 16 과
제 17 과
제 18 과
在內 大君에서 門下侍中까지
在內 府院君에서 檢校侍中까지
贊成事
在內 諸君에서 知門下까지
判密直에서 同知密直까지
密直副使에서 提學까지
在內 元尹에서 左右常侍까지
判通禮門에서 諸寺判事까지
左右司議에서 典醫正까지
六曹總郞에서 諸府少尹까지
門下舍人에서 諸寺副正까지
六曹正郞에서 和寧判官까지
典醫寺丞에서 中郞將까지
六曹佐郞에서 郞將까지
동·서반 7품
동·서반 8품
동·서반 9품
權務·散職
150결
130결
125결
115결
105결
97결
89결
81결
73결
65결
57결
50결
43결
35결
25결
20결
15결
10결

<표 1>과전법에서의 과전 절급액

과전법에서 설정한 여러 토지 종목 가운데서도 관인층에게 절급하는 과전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분급수조지였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공신전의 경우와 같이 특수한 공훈과 연관하여 절급되는 것이 아니라, 현직자는 물론 전직자까지를 포괄하는 관인층 일반을 대상으로 절급되는 것이며, 직무에 대한 경제적 반대급부로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그들 지배층의 사회적 처지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하여 절급되는 신분제적 토지종목이었다. 그리고 또한 국가수조지 이외의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의 유형 가운데 단일 종목으로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개인에게 절급되는 가장 보편적인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형태였다.0052)科田法 자체가 과전을 기본으로 하는 토지법제라는 뜻이다.

과전을 절급하는 18등의 과는 관인의 관품 고하를 기본적으로 고려하면서도 대체로 그 職事를 기준으로 하여 분등한 것이었다.0053)가령≪高麗史≫百官志 職制에 나타난 품계를 보면, 과전법에서의 제6·7·8과는 모두 정3품인데도 밀직부사니 제시판사니 하는 직사의 차이에 따라 각기 상이한 과등에 배치되었음이 그것을 말한다. 과전법은 그런 면에서 고려 문종대 갱정전시과에서의 과등 편성의 원칙0054)姜晋哲, 앞의 책, 49쪽.을 어느 정도 따르고 있는 편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직사라는 것도 기본적으로 관인의 관품을 기준으로 하고서 배치되는 것이므로, 그 차등이란 미미한 것이었다. 또한 과전법 제정 당시에는 직사 우선의 분등방식이 상당하게 채택되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관품의 제도적 운영이 자리잡게 되자 세종 13년(1431)에는 드디어 관인의 기본서열을 나타내는 관품 즉 품계 기준의 분지제로 전환하고,0055)≪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정월 을미. 이후 제도화하여 그대로 준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기서 또한 살펴야 할 것은 時·散을 가리지 않고 각기 科에 따라 수조지를 절급할 때의 ‘散’의 내용이다. 위의 18과에 나타난 바로는 제2과의 검교시중과 제18과의 산직 이외에는 그것이 배치된 기록이 없다. 檢校職은 워낙 오랜 연원을 가진 것이며0056)韓㳓劤,<勳官 檢校考>(≪震檀學報≫29·30, 1966). 조선 개국 초에도 특히 검교시중은 國老로서 대우받는 처지에 있었다.0057)≪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정월 무오. 그것이 높은 과등에 배치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여타의 산관들은 각기 자신의 전일의 실적에 따른 과의 과전을 절급받았을 것인가, 혹은 제18과의 산직에 일괄 배치되었을 것인가. 본래 과전이란 것이 워낙 사대부를 우대한다는 뜻에서 설치되었고, 또한 “무릇 경성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보위하는 자는 시·산을 가리지 않고 각기 과에 따라 절급한다”는 과전법 조문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0058)閔賢九,<高麗의 祿科田>(≪歷史學報≫53·54, 1972)에서는 散官은 일괄 제 18과에 편입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이성무, 앞의 책에서는 流內散職에 대하여 검교시중 이외에는 과전을 절급치 않았다고 하였다. 한편 李喜寬,<高麗末·朝鮮初 前銜官·添設官에 대한 土地分給과 軍役賦課(≪高麗末·朝鮮初 土地制度史의 諸問題≫, 서강대 출판부, 1987)에서는 전함관의 2품 이상은 科田을, 그 이하는 軍田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근거의 제시가 약한 듯하다. 그런데 糧餉을 비축하기 위해 各品 官人에게 米穀을 내도록 한 조선 개국 초의 사료를 보면, “時行 1品은 米 10石, 2품은 9석…9品·權務는 5斗, 前啣은 1品이 5石, 2품은 4석…9품·권무는 3두, 受田寡婦는 매 10結에 1石, 無受田 前啣은 1品이 3石, 2품은 2석…9품·권무는 2두, 庶人·公私賤口는 大戶가 3斗”(≪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12월 계묘)라 하여, 現職 官員인 時行 다음에 散官인 前啣官을 거론하고, 無受田 前啣은 오히려 受田寡婦 다음에 붙여 거론하였다. 受田한 散官에 대해서는 보통으로 취급하고, 無受田 散官은 특수하게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무수전 산관의 실체는 잘 알 수 없으나, 가령 ‘私田을 혁파할 당시에 文字를 未納하여 未受田한 자’(≪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8월 신유)의 경우에 해당하는 특수한 부류였을 것이요, 內心의 긍정·부정과는 별도로 일단 田制改革에 응한 일반 前啣官 즉 散官은 자신의 實職에 준한 과전을 절급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제18과의 산직은 流品 이외의 산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0059)일찍이 이같은 견해를 제시한 선행 연구로는 千寬宇,≪近世朝鮮史硏究≫(一潮閣, 1979), 184쪽.

그리고 여기 규정한 각 품 과전의 액수는 조선 태조 3년(1394)에 가서 다소 축소 절급되면서 첨설직은 모두 실직에 따라 수전토록 하는 것으로 변용을 보이면서 운용되어 갔다.0060)≪龍飛御天歌≫73章 註.

H-5. 외방은 왕실의 藩屛이니 마땅히 군전을 설치하여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 동서 양계는 예전의 예에 따라 군수에 충당할 것이며, 6도의 한량관리는 資品의 고하를 논하지 아니하고 그 本田의 다소에 따라 각기 군전 10결 혹은 5결씩을 절급한다.…군전을 절수한 자가 경성에 나아가 종사하게 되면 경기의 전지를 과에 따라 절수하는 것을 허용한다.

조준의 1차 상소에서는 才藝에 따라 선발된 군사에게 20세에 군전을 절급하고 60세에 그것을 환수한다는 이상적인 원칙을 세운 바 있지만, 과전법에 구체화한 군전은 외방 거주의 한량관리에게 절급하는 것으로 되었다.0061)軍田도 조선 태조 3년(1394)의 개정시에 資品을 논하지 아니하고 才藝의 高下에 따라 각기 10결 혹은 5결씩 절급하였다(≪龍飛御天歌≫73장 註)고 하였으나, 이는 전제 개혁과정에서 제시된 이상적인 이념을 끌어다 분식해둔 것에 불과하다고 이해된다.≪龍飛御天歌≫자체가 조선의 개창을 이상적인 사건으로 분식하기 위한 의도적 편찬물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의「한량관리」는 실상 한량관이며,0062)같은 科田法 조문에 곧바로 閑良官이라고 표기한 것도 두 곳이나 있다(H-6및 17). 고려 말기의 내우외환 속에서 군공 기타 여러 경로를 통하여 관품을 취득하게는 되었으나 현재로는 職事가 없는 전직·첨설직 등의 관인 신분층을 지칭하는 바, 각 지방에 거주하는 유력자들이었다.0063)千寬宇, 앞의 책, 52∼53쪽.

과전법에서의 군전은 보편적인 군인에게 그 군역의 반대급부로 절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지방에 거주하는 유력한 관인층에게 절급하는 것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물론 군전을 절수한 한량관도 이른바 赴京宿衛라고 하는 특수한 군역의 의무를 담당하게는 되었지만,0064)다음의 사료 H-17 참조. 그것은 군역이라기 보다는 일정 기간 서울에 나아가 왕권을 호위한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명분에 관련된 의무일 뿐이었다. “외방의 侍衛軍·騎船軍은 1畝의 전지도 받은 적 없이 오히려 長年 종군하고 있다”0065)≪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5월 임진.는 사실 그대로, 기본적인 군역은 군전의 절급과는 무관한 양인신분 위에 부과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과전법은 비록 후기에 가서 제도의 원형은 거의 무너져 시행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토지의 지배관계를 매개로 하여 군역을 부과한다는 고려시기 군인전제도의 오랜 관행을 법제적으로 부정해버리는 방향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현실에서의 토지지배의 관행을 반영한 결과 그렇게 귀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 가장 기본적 국가 직역인 군역을 국가가 절급하는 토지의 지배와는 무관한 차원에서 부과하고 수취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鄕·津·驛吏田과 軍匠·雜色田 등 구체적인 국가 기능의 수행을 위한 직역인의 토지는 과전법에서도 우선적으로 설정하고 있었지만(H-3), 그보다 더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군역을 토지 지배관계의 매개 없이 수취하도록 규정하였다는 것은 한국 중세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역사에서 중대한 변천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사실로 해석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양인층의 사회적 성장이 그만큼 보편적으로 현저하게 되었다는 사실의 반영으로서이며, 또 한편으로는 마찬가지로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아래로부터의 소유권적 토지지배관계가 보편적으로 성장하여 그 위에 법제적으로 가설된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관행을 그만큼 퇴조시키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 같은 변천 아래에서 이 때 절급된 군전도 그 명맥이 오래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과전법 성립 당시 1차로 절급하는 데 그쳤던 것이며,0066)같은 과전법 조문에 과전이 규정된 액수에 부족하거나 앞으로의 신래 종사자에 대한 과전의 절급을 규정하면서도, “無所任閑良官 不在此限”이라 하여 한량관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제한다고 규정하였다(H-6)(千寬宇, 앞의 책, 191∼192쪽 참조). 비록 赴京宿衛의 의무와 함께 그것은 한동안 한량관의 子弟로 相傳되어 갔을 터이지만, 그나마 직전제의 성립과 함께 소멸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또한 살펴야 할 것은 “그 本田의 다소에 따라 각기 군전 10결 혹은 5결씩을 절급한다”고 규정한 본전의 내용 그것이다. 규정의 문맥으로 보아서는 본전이 많은 자에게는 10결씩을, 적은 자에게는 5결씩을 절급한다는 뜻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본전이란 고려 후기의 조업전적 사전으로서 그 소유권까지를 지니고 있는 토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006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11년 3월조에 보이는 本主있는 토지란 곧 所有主 있는 토지의 이름인데, 권세가는 그 같은 토지를 자기 소유지로 점거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이미 本田이라 자칭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충목왕 원년 8월). 이같은 토지야말로 항용 祖業田으로 주장되는 것이니, 그것은 소유권과 수조권을 겸유한 것으로 행세하는 토지였다. 본전이 소유지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견해는 姜晋哲, 앞의 책, 185쪽 참조. 그 사전을 전면적으로 혁파하는 과정에서 과전법이 성립되었지만, 현 정권에 협력하는 중앙 거주의 관인층에 대해서는 그 정당한 소유지를 인정함은 물론 다시 전·현직을 막론하고 과전이라는 수조지를 절급하였다.0068)科田法 시행 이후로도 조상 전래의 정당한 소유지는 그대로 보존되어 갔으며, 과전은 그 같은 소유지 즉 ‘累代農舍’ 위에 절수될 수가 있었다(≪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8월 무오). 마찬가지로 하여 외방 거주 관인층에게는 그들이 지배해 온 조업전적 사전에서 개인 수조지로서의 측면을 혁파하는 대신 그들 조상 전래의 소유지로서의 정당한 소유관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현실적 지배 관행을 참작하여 사전을 원래 많이 지배해 온 자에게는 10결씩, 적었던 자에게는 5결씩의 면조권을 절급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경시위하는 관인층에게는 관직의 고하를 기준삼아 절급하였지만, 각 지방 거주의 관인층에게는 그것이 문제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토지 지배의 다과가 기준으로 참작되었던 것이다.

실로 과전법이 규정한 군전은 고려 후기에 범람하던 개인 수조지로서의 외방 사전을 전면적으로 혁파하는 대신, 당해 지역의 유력자층에게 최소한의 명목만을 붙여서 유보시켜 준 면조지였다.0069)그러므로 閑良官들의 불만이 익명서로 조정을 비방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太宗은 “만약 5결, 10결로써는 京城에 머물기(年 100일간 宿衛하는 일)가 어렵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子孫胥姪 등에게 遞給하여 각기 마음을 바로잡을 일이요, 서로 나를 원망하지는 말라”고 하였다(≪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윤 7월 계해). 그래서 그들이 외방 거주를 그만두고 서울로 가서 관직에 종사할 경우에는 각기 응분의 과등에 따라 경기의 토지를 과전으로 절수할 수 있도록 규정해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과전법의 제정 과정에서는 불법적인 탈점이거나 혹은 법제적 근거를 가진 것으로 전수되었거나 간에 수조권에 입각한 개인 수조지로서의 사전은 전면 혁파되어 재편성되었지만, 정당한 소유권을 가진 토지는 그대로 온존되었다는 사실의 일단을 여기서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H-6. 이 신미년에 수전한 것이 科에 부족하거나 신미년 이후 새로 벼슬하여 수전치 못하게 된 자는, 조·부의 文契 유무를 논하지 아니하고, 혹 범죄자의 전지나 혹 후손이 없는 자의 전지, 또는 과외의 餘田을 가지고 科에 따라 체수하되, 소임이 없는 한량관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경기의 荒遠田과 개간전은, 職事에 종사하는 자가 있으면 관에 보고하고 作丁하여 科에 따라 절수한다.

여기에서 신미년은 과전법이 공포된 공양왕 3년(1391)을 말한다. 과전법이발효되는 당시에 자기의 과등보다 부족하게 수전하였거나 혹은 그 후에 새로 관직에 종사하게 된 관인의 경우에도 수조지를 절급한다는 것은 당연한 규정이었다. 다만 그러한 경우에도 자신의 조상 전래의 田券의 유무에 관계없이, 범죄로 인하여 환수된 수조지, 후사가 없는 관인의 수조지, 과외로 지나치게 많이 받은 여분의 수조지 등으로써 충당하되, 赴京宿衛 따위의 소임이 없는 한량관은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도 과전법이 職事官 우대의 원칙을 관철해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역점을 두었던 것은 ‘祖父의 文契 유무를 논하지 아니하고’ 기왕의 다른 관인이 절수한 수조지를 가지고서 새로운 유자격자가 체수하도록 규정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체수되는 수조지의 종목으로는 과전과 군전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을 체수할 자들 또한 모두가 중앙·지방의 유력한 관인층이었다. 또 여기 보이는「祖父의 文契」라는 것은 기사양전을 통하여 정당한 자격을 인정받은 조상 전래 소유지의 文券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0070)기왕의 祖業田的 私田의 文契는 모두 불태웠으며, 그것의 私藏조차 엄금되었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유력한 관인들이 자기 조상 전래의 소유지임을 빙자하여 그 곳에다 수조지로서의 사전을 임의로 절수하는 현상을 금단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설정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즉 사전 확대의 폐단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규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전 확대의 방지책은 사전경기의 원칙과 서로 위배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相資관계로 운용되어야만 바람직한 편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정권에 복무하는 職事官은 荒遠田·開墾田을 막론하고 경기의 토지에 한하여 국가의 행정적 통제 아래 자기 科대로 과전을 절수할 수 있다는 규정을 덧붙여 두게 되었다. 그것은 사전의 자의적인 확대를 방지하면서 직사관 우선의 원칙을 지켜가는 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H-7. 무릇 수전자는 그가 죽은 후 처가 자식이 있어 守信하는 경우 全科를 전수하며 자식이 없이 수신하는 경우에는 반감하여 전수하고, 원래 수신하지 않는 경우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부모가 모두 죽고 자손이 유약한 경우는 恤養함이 마땅하니 그 父의 과전을 전부 傳受하되, 나이 20세가 되면 각기 자기의 科에 따라 절수하고, 딸은 남편이 정해진 뒤 그 科에 따라 절수하며, 나머지 토지는 타인이 체수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른바 수신전·휼양전에 관한 규정이다. 그것은 멀리 고려 전시과에서의 구분전·한인전 계열을 이어 받았으며, 가까이는 조준의 1차 상소에서의 구분전과도 연관되는 것으로서 이른바 ‘仕者世祿’의 뜻을 구현한 규정이었다.0071)≪成宗實錄≫권 32, 성종 4년 7월 기미. 전직·현직을 막론하고 관인의 생시에는 과전을 절급하여 사회경제적으로 優容하고 사후에는 그 守節妻에게는 물론 그 유약한 자녀들에게도 성인이 될 때까지 응분의 수조지를 절급해 준다는 이 내용은, 과전법이 관인층의 관직 자체는 세습적으로 지켜가게 할 수가 없어도 관인으로서의 신분 자체는 보전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설정해 둔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제도가 지배계급의 보전과 밀접한 관련 아래 운용되어 온 것이며,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신분제적 토지지배의 유제였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가령 父의 과전을 全科 전수한 관인의 子가 20세가 되었는데도 관직을 얻지 못한 채로 있어서 자기 과에 따른 과전을 절수할 수 없는 경우는 어떻게 처리되었을 것인가. 위의 규정대로라면 이 경우는 아마도 餘田으로 판명되어 타인이 체수하도록 처리되었을 것이며,0072)다음의 H-11에서도 父沒 후 자식의 科外 餘田 반납 규정이 보인다. 조선 태조 3년(1394)의 田制 損益時의 규정에 따라 그 子는 학생으로 분류되어 5결의 과전을 유보받고0073)≪龍飛御天歌≫73장 註. 나머지는 모두 반납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무자격자의 과전 보유는 이른바「진고체수법」에 따라 유자격자가 그것을 관에 보고하고 체수할 수 있게 규정해 두기도 하였다(I-17). 그러나 실제로는 과전의 환수 혹은 체수는 규정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고려 후기 사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망한 자의 과전은 繼嗣者가 있으면 응당 체수하는 것”0074)≪太宗實錄≫권 19, 태종 10년 2월 을유.이라든가 “과전은 이미 영영 사여된 토지”0075)당시 戶曹判書 자신의 말로 “且科田 旣是永永賜與”라 하였다(≪世宗實錄≫권 5, 세종 원년 9월 신유).라고 하는 인식이 일찍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도 “혹은 妻가 父의의 전을 체수하고 혹은 자손이 父祖의 전을 체수하여 서로 절급하고 改讐하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田案이 不明”0076)≪世宗實錄≫권 11, 세종 3년 정월 을해.하게 되었다. 또한 뒷날에 가서도 “과전은 父가 죽고 子가 전수한 경우 휼양전이라 칭하고, 夫의 妻가 전수한 경우 수신전이라 칭하여 대대로 그 租를 받아 먹었다”0077)≪成宗實錄≫권 4, 성종 원년 4월 기사.는 관행이 지적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수신전·휼양전의 규정으로 인하여 한 번 절급된 과전은 회수하기가 어려운 세전적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그 같은 세전성은 결국 경기사전의 만성적 부족 현상을 초래하였다. 무자격자의 과전전수는 결국 어떻게든지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과제였던 것이다.

H-8. 군인·향리 및 모든 有役人이 늙고 병들거나 죽고 후손이 없는 경우, 본역을 도피한 경우, 경성에 나아가 종사하는 경우에는 그 역을 대신하는 자가 그 토지를 체수한다.

군인·향리 그리고 모든 유역인은 지배체제를 직접 물리적으로 호위하거나 그 체제의 말단 직역을 맡아 수행하는 자들이었던 만큰 각 현장에서 그들의 존재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그들 실무직역자에게는 대체로 田丁을 연립하게 함으로써 그 역을 항구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전정연립제는 고려 말기에 와서는 거의 전면적으로 무너지고 말았으며, 그래서 직역의 부과와 토지의 절수는 전혀 무관한 차원에서 각기 별개로 운용되었던 것이다.

과전법은 그처럼 완전히 붕괴된 전정연립제도를 원래의 것으로 복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가 지배질서의 회복을 위한 전제개혁을 단행하면서 그 질서의 최일선 실무자들에게 최소한의 수조지나마 절급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0078)≪三峰集≫권 7, 朝鮮經國典, 賦典 經理. 그 토지를 매개로 그들의 역을 항구적으로 확보하고자 한 규정이었다.

그러나 위 조문에서 규정한 토지 종목 가운데에서 군전은 과전법 성립 당시 1차 절급으로 끝났으며 그것도 군역을 수취하기 위한 매개로서가 아니라 각 지방의 유력자인 한량관을 우대하는 조처로 설정된 것이었다. 정작 군인의 역은 토지 따위 반대급부가 없는 양인신분의 의무 국역으로 전가되었는데, 이는 국역체계상의 큰 변화로서 앞으로 더욱 큰 변화를 초래할 인자를 내포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향리의 외역전과 기타 유역인의 토지도 특수한 것을 제외하고는 세종 27년(1445) 국용전제도의 시행과 함께 정리되어 소멸되었다. 과전법이 규정한 바 토지를 매개로 직역을 확보하는 방식은 실로 낡은 제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과전법 자체도 하나의 잠정적이고 과도적인 토지제도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H-9. 경오년에 사여받은 공신전은 科外로 자손에게 상전함을 허용한다.

여기에서의 경오년은 공양왕 2년(1390)을 가리킨다. 이성계를 비롯한 일부 중신은 이른바 廢假立眞의 공이 있다 하여 공양왕 즉위년(1389) 12월에 중흥공신으로 책봉되고 공신전을 받게 되었는데,0079)≪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원년 12월 임자·계해. 이것이 과전법에서 자손상전의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례로 규정되었다.

이 경오년 공신전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전혀 의미가 없어지고 곧이어 혁파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과전법에서 공신전에 대한 자손 상전의 특별한 우대 규정을 둔 것은 이후 공신전의 세습을 공인하는 길을 열어놓게 되었다. 그것은 왕권의 귀추라든가 왕실의 안위와 생사를 함께 하였다는 자들에게 절급하는 科外의 특별한 토지로서, 다소의 변천을 겪으면서도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형태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유형으로 존속하였다.

H-10. 公·私賤口, 工·商人, 巫覡, 倡妓, 僧尼 등은 그 자신 및 그 자손에게 수전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수조지의 분급제도가 기본적으로 지배층의 계급적 지배체제를 운용한다는 원칙에서 설정된 사실은 앞서 살핀 바 있는데, 이 조문 또한 그러한 실정을 반영한다. 그것은 신분과 직역을 일치시키는 사회체제를 운용해 가고자 하는 의도의 실현이기도 한 것이었다. 승니는 사원전을 절수한 寺社에 기식하기 마련이며, 여타의 천인신분과 천업자들은 각기 그 천역·천업에 종사함으로써 지배체제의 유기적 일부분을 맡아 수행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실상 고려 후기의 혼란 속에서는 천인으로서도 왕실에 기생하면서 다수의 토지를 절수 받아 횡행한 사례가 더러 있는데,0080)≪高麗史節要≫권 20, 충렬왕 8년 8월 정축. 위의 규정은 아마도 그 같은 사실을 감계하는 뜻에서도 설정되었음직한 것이다. 물론 과전법 아래에서도 왕실에 기생하면서 복무한 대가로 수조지를 절수하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0081)≪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기해.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에서 벗어난 예외적 사례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수전을 불허한다’는 규정이 그들의 토지 소유까지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수조지의 절수를 두고 말한 것에 불과하며, 그들의 토지 소유의 여부는 그들의 사적인 일에 속하는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