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2. 농업과 농업기술
  • 3) 농업생산력 발달의 여러 요인
  • (2) 간접적인 요인

가. 인구의 증가

조선 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인구의 급속한 증가’라는 간접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더욱 촉진되었다. 개국과 더불어 조선 정부는 매 3년마다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조선 초기의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호는 바로 편호였는데, 이 시대에서는 같은 편호라 해도 농업지대에 따라 그 규모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또한 조선 전기에는 적어도 전체 인구의 40% 이상이 노비였으므로, 결국 당시의 농업노동은 노비제와 편호제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던 것이었다.

조선 전기의 인구자료는 기본적으로 편호 및 남정수로 구성된 호구통계와, 자연호와 자연구를 나타내는 통계 모두 두 종류로 구성되었다. 이른바 전자의 경우는 대략 20만 호와 70만 구였고, 아울러 후자의 경우는 7∼80만 호와 3∼400만 구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전자의 인구는 조선 후기에서처럼 호적 신고에 근거한 기록이 아니라 부역과 군역 등의 목적으로 각 도로 할당된 호구수였으며, 후자의 그것은 호적신고나 구황미의 배급을 위해 나름대로 조사한 결과였다. 그러나 보다 실제에 더 가까웠을 후자의 경우도 오늘날의 인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노인·여성 및 아동 인구 등이 누락된 불완전한 통계여서 완전한 인구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 건국의 해인 1392년의 인구는 대략 555만 명으로 추정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그보다 많은 약 750만 명을, 그리고 당시의 연평균 인구 증가율을 약 0.15%로 추정하고 있다. 이른바≪세종실록지리지≫경기도 관찰편에서 밝혔듯이 이 통계에 실린 호구가 실제의 10내지 20%에 불과하다면, 1432년의 인구는 약 800만 명이나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서의 연구는 이 시대의 인구 증가율을 조선 후기의 그것보다 2.7배나 높은 0.47%로 추정하였는데, 이들은 조선 전기의 인구증가 속도를 과장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는 전근대 사회로서는 지나치게 높은 수치일 뿐더러 보다 높은 농업생산력 상승을 일으킬 정도로 더 급속하였던 조선 후기의 인구증가가 조선 전기의 그것을 능가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전기는 ‘多産多死’를 인구 모형으로 하는 중세의 전형적인 인구성장기였다고 하겠다. 이른바 전통적인 높은 출산율과 높은 사망률로 인해 비교적 낮고 안정적인 인구 성장률을 보인 시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지에 대한 인구압력’이 느슨하였던 이 시기에 있어 인구 증가는 대체로 수전 농업보다는 한전 농업과 보다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벼농사와 비중이 매우 낮았던 이 시기에는 그러한 경향이 분명하였을 뿐 아니라, 더구나 수리 문제에 크게 매이지 않고 조방적인 건조지 농법의 성격을 보인 당시 농업의 모습은 결국 이렇게 낮은 인구 압력의 단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인구는 이 시기의 말기인 임란 직전(1592)에 이르러 1,012만 명 내지는 1,41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제 토지에 대한 인구의 압력은 처음보다 배나 가깝게 높아졌으며, 인구 분포가 불균등했기 때문에 심지어 어떠한 지역은 매우 높은 인구 압력이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 한 예로써 전체 인구의 22%정도가 집중되었던 경상도 지방의 경우는 이미 조선 후기의 그것처럼 생산의 집약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정은 ‘토지에 대한 인구압력’이 매우 낮아 농업의 성격도 토지생산성보다는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조방적인 모습에서, 18세기 이후에야 본격화될 새로운 집약 농법의 단초가 일부 지역에서 조숙하게 나타났던 16세기 말기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