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1. 도시상업
  • 2) 육의전의 발생과 발전

2) 육의전의 발생과 발전

시전 가운데에서 특히 특정상품 전매, 즉 禁亂廛의 특권과 국역부담의 의무를 갖는 일부 상전을 六矣廛이라 하면 그것은 언제 또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먼저 부담의 면에서 보면 조선 초에 이미 일반 商賈, 특히 관부 건조의 公廊을 사용하는 시전에 대하여 납세의 의무를 규정하였음은≪경국대전≫을 통해 알 수 있다.≪경국대전≫에 법규로서 확정되기 전에도 태종 7년 평양부 尹睦은 상소를 통해 행상의 통제와 납세 의무를 규정하려 하였고,0179)≪太宗實錄≫권 14, 태종 7년 10월 기축. 또 태종 15년 4월에는 상고에 대하여 과세의 비율을 정하였으며, 상고를 공랑상인·坐賈상인·행상인 등 셋으로 구분하였다.「공랑상인」은 관부에서 제공한 공랑에서 상업을 하는 관부제공의 定住상인(후의 육의전)이며,「좌고」는 공랑 이외의 임시점포, 즉 假家상인(우리말로「가게상인」으로 노변에 천막을 친 임시점포를 말함)으로서, 뒤에 육의전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군소상점인 假家商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행상」은 관부에 등록하여 행상의 허가를 받은 상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정한 상행위에 대한 과세를 넘어서서 국역을 부담하게 됨으로써 육의전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대체로 관부의 수요에 따라 부과되는 임시 부담금, 궁중·부중의 수리 도배를 위한 물품 및 경비 배당, 왕실의 冠婚喪祭는 물론 중국에 해마다 수 차례 파견되는 각종 사절의 세폐 및 수요품 조달 등이 그 중요한 것으로서, 이와 같은 국역부담의 상전을「有分各廛」이라 하였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규모를 가진 여섯 개 상전을「육의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발생시기를 고찰함에 앞서 육의전과 그 전제가 되는 유분각전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유분각전」이라 불리는 국역부담의 어용상단은 그렇지 않은「무분각전」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各廛中稍實者’0180)≪萬機要覽≫財用編 5, 各廛.에 대하여 그 이익 정도를 계량하여 각기 국역을 책정하였던 것이다.

이 유분각전의 명칭과 역분을 순조시대에 저작된≪만기요람≫에 의거해 정리하면 다음의<표 3>과 같다.

명   칭 역   분 명   칭 역   분
線廛(縇廛·立廛)
綿布廛
棉紬廛
紙廛
靑布廛
煙草廛
望門床廛
新床廛
東床廛
壽進床廛
上米廛
下米廛
門外米廛
雜穀廛
髢䯻廛
鐵物廛
內外匙箸廛
馬廛
10분
9분
8분
7분
5분
3분
3분
2분
1분
1분
3분
3분
2분
3분
1분
1분
1분
1분
苧布廛
布廛
內魚物廛
外魚物廛
生鮮廛
鍮器廛
衣廛
綿子廛
履廛
樺皮廛
茵席廛
眞絲廛
淸蜜廛
京鹽廛
內長木廛
煙竹廛
牛廛
 
6분
5분
5분
4분
3분
2분
2분
2분
2분
1분
1분
1분
1분
1분
1분
1분
1분
 

<표 3>유분각전

이 밖에 국역의 부담이 없는 무분각전은 外長木廛 등 55전이 있어 모두 91전이며, 기타 각전은 명색이 대단히 번잡하므로 일일이 기록하지 않는다. 설사 무분전이라 할지라도 그 취급상품이 자주 쓰지 않는 물건으로 유분각전에 없는 물품에 관하여는 平市署에서 육의전으로 하여금 貿納케 하고 그 가격의 差損額을 무분각전에 분배 添價하게 하였다.0181)≪六典條例≫漢城府 市廛.

육의전이라 함은 이 유분각전 중 가장 큰 여섯 개의 전을 지칭하는 것으로서≪만기요람≫에 기재된 당시의 육의전은 다음과 같다.

① 선전(縇廛 또는 立廛:10분역(상품-필단)

② 면포전(銀木廛 또는 백목전):9분역(상품-면포·은자 등)

③ 면주전(羽細廛):8분역(상품-각종 명주)

④ 지전:7분역(상품-종이와 그 가공품)

⑤ 저포전·포전:계11분역(상품-모시·베)

⑥ 내외어물전:계9분역(상품-각종 어물 등)

그러나 육의전은 시전 중 최대 應分廛인 시전 여섯 개를 말하는 것으로, 시간적·공간적으로 그 구성전은 변화되어, 때로는 그 수효를 늘려「八矣廛」이라고도 칭하였다.0182)≪增補文獻備考≫권 166, 市糴考, 糶糴. 육의전은 절대적으로 어떤 특정 전의 특정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시전 중 최대의 국역을 부담할 수 있다든지 또는 정부 필수품의 조달상 필요에 의해서 그들에게 그 대가로 상업상의 특전을 부여한 것으로서 다른 시전과 근본적으로 성질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상기한 순조시대의≪만기요람≫이외에도 고종 때 나온≪靑丘示掌≫에는 ①선전 ②면포전 ③면주전 ④내어물전 ⑤지전 ⑥저포전으로 되어 있고, 고종 때에 간행된≪증보문헌비고≫市糴考에는 ①선전(속칭 입전) ②면포전(혹칭 은목전) ③면주전 ④내어물전·청포전(모자 판매) ⑤지전 ⑥저포전으로 되어 있으며, 고종시대의≪六典條例≫시전조에는 ①입전 ②면주전 ③백목전 ④저포전 ⑤지전 ⑥포전 ⑦내어물전 ⑧외어물전 등으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정조 15년 蔡濟恭의 상소에 의하면 한성 시내에 할 일 없이 노는 무리들이 廛號를 자의로 만들어 일용의 물화를 매점하기 때문에 물품이 귀하여 물가가 5배나 앙등하였음을 두려워하여, 신설 전호를 모두 혁파할 것을 요청한 바 있다.0183)≪萬機要覽≫財用編 5, 各廛. 정조 18년에는 좌의정 金履素가 내어물전·청포전을 육의전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 포전을 포함시킨 바 있고,0184)위와 같음. 순조 원년에는 내어물전을 육의전에 다시 포함시켜 외어물전과 합하여 하나로 삼고 포전은 저포전과 합하여 육의전의 1전으로 등장케 한 일도 있었다.0185)위와 같음.

이와 같은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변동하는 육의전 중에서도 그 자격을 계속 유지했던 상전은 선전·면주전·지전 등에 불과하였다. 이 외에 국역의 9분역을 부담하던 면포전은 은자(銀子)를 함께 판매함으로써 그 부담을 감당 할 수 있었으며, 저포전 역시 6분역을 부담하는 것만으로는 육의전의 1전을 차지할 수 없었기에 5분역 부담인 포전과 합함으로써 1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내어물전도 외어물전과 더불어 모자를 판매하는 청포전과 합함으로써 육의전의 특권을 유지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면 이러한 국역의 발생 시기는 언제인가.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대동법 실시논의가 일어난 선조 말에서 인조에 걸친 시기가 아닌가 추측된다. 대동법이란 종전의 토공, 즉 각 지역 생산품의 공납과 民有의 직접 징발이라는 형식을 폐지하고, 지세로 집약하여 일정한 미곡만(대개는 전 1결에 쌀 12되) 징수하게 한 것으로, 재정에서 화폐가 중심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각종 잡다한 사용가치와 구체적 노동을 필요에 따라 직접 징수하던 것을, 다양해진 정부 용도에 따른 제반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 일종의 국가재정 시행법으로 만든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대동법시행 이후부터는 관부의 수요품 중 그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경향 각지에서「貢主人」을 지정하여 물품 구입의 청부를 맡게 하고, 그 대금을 大同收米로 지불하였던 것이다.

이 때 상업의 실정을 보면 임진란 당시 서울에서 피난한 상인들이 그 동안 각기 피난처에서 상업적 근거를 잡아 난이 끝난 후에도 상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이 ‘市肆空虛’하게 되어 정부의 수요 물품공급에 지장이 많았다. 이에 선조 33년에는 각 지의 수령으로 하여 지방에 흩어져 있는 京商들을 찾아내어 舊業에 돌아가라는 강제책을 쓰는 한편, 서울에서 平市署로 하여금 시전에 대해 ‘束定市役’하게 되었다.0186)≪增補文獻備考≫권 166, 市糴考, 糶糴.

市役이 각전의 경제적 실력에 따라 定律을 갖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동법의 정률과세원칙과 또 그 당시 관부의 수요를 위한 공인의 발생을 상기할 때 막연하나마 상전에 대한 정률의 국역 부과도 같은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특히 육의전의 발생 시기는 중국에 보내는 방물과 세폐를 분담케 한 인조 15년(1637)부터라고 할 것이다. 방물·세폐로 상공된 물품은 각종 직물과 어물로 대별할 수 있으며, 육의전의 상품도 역시 직물과 어물이 그 주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육의전 상품의 대부문이 방물·세폐로서 징발되게 되었으며, 육의전에 금난전권까지 부여하게 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국역부담면만이 아니라 육의전 금난전권은 이미 인조·효종 양대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유분각전」과 그 중 가장 실력있는「육의전」의 형성은 인조 15년 무렵으로 짐작된다.

육의전과 명칭에서 ‘六’의 뜻은 상술한 바와 같고 ‘矣’의 뜻은 국가에 납부하는 국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矣’자를 ‘주비’라고 訓讀하고, 다시 ‘官物斂散時統首謂之矣’라고 하였다.0187)≪吏讀便覽≫. 즉 관물을 斂散하는 首吏가 장부상에「△」표를 가하므로 矣라 칭하던 것을 다시 矣자로 轉한 것이라고 하며,0188)≪萬機要覽≫財用編 5, 各廛. 또 矣를 속칭 주비라 훈하여 육의전을 六注比廛이라고도 쓰는데, 그 원뜻은 곧 部의 훈 주비라고도 한다.0189)梁柱東,≪古歌硏究≫(一潮閣, 1965), 740쪽. 따라서 육의전을 육주비전·육부전·육분전·六調備廛 등으로 속칭하는 까닭도 여기에서 기인된 것이다.

육의전을 또는 六主夫廛이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상으로 보아 주부는 길다를 뜻한다고 하는 일설이 있으니,0190)李丙燾는≪三國史記≫권 35, 地理 2에서 고구려 長堤郡을 主夫吐郡이라고 한 것을 근거로 주부를 장의 뜻으로 보았다. 육의전은 육=주부=장으로 六長廛이 되며, 서울 시전을 건조할 당시에 종로 기타 간선도로에 長屋類의 건물을 조성하여 제공하였던 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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