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2. 지방상업
  • 2) 상무사 좌사
  • (1) 부상의 연혁과 의의

(1) 부상의 연혁과 의의

부상의 연혁에 관하여는 이설이 있어 일정치 않으나<惠商公局序>와<完文>에 의하여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혜상공국서>에는 부상의 창설 연대가 상세하지 않으나 다만 고사에 기자조선 시대의 부상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으니, 부상을 시켜 버드나무를 심게 하였다는 것이다.

다음 신라시대에는 부상을 때때로 동원하여 돌을 운반하고 다듬어 무너진 성곽을 보수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공양왕 때에 寧丁浦에 소금을 운반하였다는 사실이≪骨亭澹翁日記≫에 보이므로 부상배가 전국 방방곡곡을 순력하면서 행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상단의 단체활동을 좀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상단의 합법적 단체권을 가진 소위「負商廳」의 창설에 대해서는 역시 이설이 적지 않다. 대체로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대가로 소위「부상청」이 창설된 것이라 하겠다.

부상청의 창설은 부상배들의 충성의 대가였고, 이후 국가의 보호 아래 육성 신장되었던 것이다. 부상청의 최초의 五道都班首는 兎山 白達元이니, 그는 고려 말기 전국의 부상 중의 한 사람으로 이성계의 건국창업에 직·간접으로 충성을 다한 자이다.

이들 부상조합원은 정부의 보호를 받는 동시에 국가대사시나 국난위기 때에 수시로 사역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왕이 선조의 능을 참배할 때 수행 행렬에 봉사하였고 심지어 정부관청의 고관들까지 그들을 자유롭게 호출하여 특별 봉사(주로 탐정 봉사)를 시켰던 것이다. Daniel L. Gifford의 저서≪Every day Life in Korea≫에 보이듯이, 그들 부상들은 빈객인 장관의 특별 호송을 위하여 징발되어 봉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상조합의 특징은 그들의 행상과 함께 진실로 봉건적 관념에서 정부에 대한 봉사로부터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완문에 의하면 임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산성의 대첩도 부상의 멸사봉공의 충성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에도 인조가 남한산성에 거둥할 때 쌀을 짊어지고 성곽을 지키는 등 오랑캐의 방어에 헌신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상들이 결사적으로 군량을 보급하여 충성을 다한 공훈을 가상히 여겨 전란 후에 부상들을 불러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단지 다섯가지 물건, 즉 어·염·목기·토기·무쇠그릇 등의 전매권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정부는 그들의 소원대로 다섯가지 물건의 전매권을 부여하였다.

부상청의 소속관계를 보면 고종 20년에 중앙에 혜상공국을 설치하고 부상과 보상단을 합쳐 군국아문에 부속시켰다. 다시 고종 22년에는 혜상공국을 상리국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부상을 좌단, 보상을 우단으로 개칭하였고, 고종 31년에 부상과 보상을 농상아문의 관할 아래 소속시켰다. 광무 초년에는 황국중앙총상회에 소속시키고 황국협회에 이속시켰다. 광무 3년에 상무사로 개편하고 李圭恒이 통솔하는 진흥회사에 속하게 하였는데 이 때 부상을 좌사로 보상을 우사로 개칭하였다. 지금도 저산 8읍의 부상을 상무사 좌사라 하고, 저산 8읍의 보상을 상무사 우사라고 하여 그 당시의 명칭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상과 보상은 광무 7년에 공제소로 이관되었으며 그 사무소는 寺洞(지금의 인사동)에 있었다. 그 후 다시 상민회로 옮기고 광무 8년에 진명회에 이속시켰으나 부진하므로, 같은 해 12월에 발족된 공진회에 이속시켰다.

그 후 1910년에 일제는 애국적인 상인단체인 부상 및 보상조합의 말살을 꾀하였으므로, 부상단과 보상단이 거의 소멸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 전통적인 조직과 친목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충청남도의 부여·한산을 일원으로 하는 소위 저산 8읍의 부상·보상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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