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4. 무역
  • 5) 유구·남만과의 무역

5) 유구·남만과의 무역

조선 초기에는 앞에서 살펴본 바 명·여진·일본 이외에도 琉球·南蠻과도 무역거래가 있었다.

대체로 한국 역사상 조선정부가 교린외교로 대응한 유구와 교섭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엽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유구의 中山王 察度는 외국의 승인을 받는 동시에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명 및 고려와의 교섭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창왕 원년(1389) 고려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토산물을 공납하면서 ‘奉表稱臣’하였고, 이에 고려정부는 유구에 報聘使를 파견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원년(1392)에 유구의 中山王은 계속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칭신의 예를 다하였다. 즉 태조 6년(1397) 유구는 사신을 보내 왜구로부터 매입한 조선인을 송환하고, 정종 2년(1400)과 단종 원년(1453)에는 사신을 보내 예물을 헌납하였다. 또한 세조대에 세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요구한 일이 있고, 성종 2년(1471)에는 일본인을 대한 것처럼 公認 歲遣船으로 왕래하게 했으며, 그리고 조선의 관직을 받은 자도 있었다.0254)劉元東, 앞의 글.

한편 유구는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해외무역을 생게로 삼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토산물과 安南[베트남]·暹羅[샴] 등의 남장산물을 중계하여 한때 각국 상선의 기항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과 유구의 교통은 비교적 빈번하여 자주 漂民을 송환해 왔으며, 또한 조선 상인이나 표민이 유구에 기항하는 자가 많았다. 이들 조선 상인들은 유구인과 함께 말락카 등 남양무역에도 종사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유구에는 조선에 오는 해로를 잘 아는 사람이 적어서 그 곳에 거주하는 일본인 승려나 상인이 사신이 되어 조선에 온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구의 사신들이 조선에 바친 공납물은 蘇木·胡椒·香料·砂糖·錫·水牛角 등 남방 산물이었다.0255)李鉉淙,<南洋諸國人의 來往貿易에 對하여>(≪史學硏究≫18, 1964).
李相佰, 앞의 책, 142∼143쪽.

남만은 섬라와 爪哇[자바] 등을 말하는데, 섬라는 일찍이 공양왕 3년(1391)에 奈大 등 8명을 고려에 보내 토산물을 바친 일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2년(1393)에 張思道를 사절로 보내와서 그에게 禮賓卿의 직을 주었으며,0256)≪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6월 갑인. 그 6년(1397)에도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0257)≪太祖實錄≫권 6, 태조 6년 8월 정유. 그들이 조선에 바친 공납물은 대개 蘇木·束香·刀·甲·銅器 및 土人 등이었다. 또한 조선 초기 조와와의 관계를 보면 태종 6년(1406)에 陳彦祥을 사신으로 보내 왔으므로 조선정부는 그에게 書雲副正의 직을 주어 보냈다. 그 뒤에도 조와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火鷄·孔雀·鸚鵡·鸚哥·沈香·龍腦·胡椒·蘇木·香 등과 여러 종류의 蕃布를 공납하였다.0258)李鉉淙, 앞의 글. 그러나 조선정부가 교린외교로 대응한 유구와 남만이 진상한 공물에 대한 回賜物로 어떠한 것을 주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정부는 유구와 남만의 사절을 후대하여 관직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타고온 선박을 수선해주고 衣服·笠靴·正布·綿布·黑馬布·白苧布·虎皮 및 書籍 등을 회사했던 것으로 보인다.0259)李鉉淙, 위의 글. 유구와 조선 사이에서는 이상과 같은 진상과 회사 형태의 관무역뿐만 아니고, 비록 명·여진·일본의 경우보다는 소규모일지라도 사무역이나 잠무역 거래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 조선 초기의 유구 및 남만과의 무역은 명·여진·일본 등과의 그것과는 동기와 성격을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이상 3국과는 국제적 이해관계가 엉켜있는 인접국들이었기 때문에, 3국과의 무역은 사대교린외교의 수행과정에 따른 무역으로서 무역외적인, 다시 말하면 외교적 요인이 무역거래의 중요한 동기가 되고,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유구와 남만은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호 이해가 상충되는 점이 별로 없기 때문에 외교거래보다는 무역거래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외교는 무역거래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 면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유구·남만측의 진상품목과 조선의 회사품목을 비교할 때, 조선은 대체로 사치성 물품을 받고 생활 필수품을 주었기 때문에 조선측이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구·남만의 진상품 중에는 조선 초기 국내에서 수요가 큰 錫이나 水牛角 등 각종 금속 수공업이나 무기제조의 원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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