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1. 야철수공업과 철광업
  • 2) 철물수취제와 철광업 실태
  • (1) 염철법과 철장제

(1) 염철법과 철장제

한양의 신도 건설공사와 군기감의 무기제조공역에 소요된 철물은 각 도의 농민들로부터 수렴되는 貢鐵이었으며 계수관·영·진의 무기제조용 철물은 각 도의 鐵場에서 조달하였다. 이처럼 이원화된 철물수취제도 가운데 전자는 斂鐵法, 후자는 鐵場制라 불리웠다. 이 두 제도는 이성계가 집권한 공양왕 3년(1391)에 성립하여 조선 초기의 철물수취제도로 실시되었다.

고려 말의 정부는 염철법에 의해서만 철물을 수취해 왔다. 고려왕조는 민간인에 의한 철광의 民採를 금하지 않았고 사적인 철물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정부는 농민들로부터 일정액의 공철을 부과 수취하는 염철법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의 철물수취체제는 이성계의 집권과 더불어 착수하게 되는 신도건설과 무기생산에 필요한 많은 철물을 조달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제도였다. 그 이유는 정부가 염철법에 의해 수취하는 공철량이 전국의 야철수공업자들이 생산한 철물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공양왕 3년(1391) 7월에 정부는 당시 소금산지에 적용하고 있던 榷鹽法을 鐵産地에도 원용하려 하였다.0302)≪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鹽法 공양왕 3년 7월.
高承濟,<李朝鹽業史硏究>(≪近世韓國産業史硏究≫, 1959).
申芝鉉,<鹽業>(≪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곧 정부가 민간의 철 생산지를 모두 흡수하고 그곳에 冶官과 鐵戶를 두어 철을 채취하는 동시에 생산한 대부분의 철을 국용에 충당하고 그 여분만을 민간에 판매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안은 일단 실행하기로 결정되었으나 곧이어 중지되고 말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같은 해에 정부가 염철법과 철장제를 함께 실시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전국의 철산지를 모두 官營하에 둘 경우 소요되는 자금과 인력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정국에 개발된 鐵鑛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世宗實錄地理志≫에 67개 읍으로 나타난 사실만을 미루어 보아도 그 많은 철산지를 정부가 모두 야관과 철호를 두어 운영하기란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 때 철의 생산량이 풍부한 곳만 골라 철장제를 적용하고 나머지 철광들은 민간의 私採를 허용하여 염철법을 준용하였던 것이다.

민간의 사적 철물생산을 기반으로 적용되었던 염철법은 정부가 전국 각 읍의 邑勢에 따라 貢鐵量을 分定하면 수령이 관내 농민들의 경작면적에 따라 공철을 부과 징수하여 선공감과 군기감에 납부하는 형태였다.0303)≪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6월 계미. 따라서 철의 사적 생산이 가능한 농민들은 자체 생산물을 공납할 수 있겠지만 그 것이 불가능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철물을 구입하여 상납해야 하였다.

한편 鐵場은 각 계수관이나 영·진에 무기제조용 철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개설되었지만 공양왕 3년(1391)에 설치된 철장이 몇 개소나 되었는지는 살필 수 없다. 다만≪高麗史≫地理志의 同年條에 정부가 砥平縣에 鐵場을 설치하고 監務를 두어 겸관토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0304)≪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감무는 철장을 관리하기 위하여 별도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그 읍의 수령으로서 철장을 겸관토록 한 것이다. 이 지평현의 철장은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철 생산량이 격감되자 혁파하고 감무도 현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0305)≪世宗實錄地理志≫, 廣州牧 砥平縣.≪고려사≫에 나타난 기록만으로는 동년에 지평현에만 철장이 설치된 듯하다. 그러나 태조 3년(1394)에 편찬된≪朝鮮經國典≫에 의하면 당시 정부가 ‘철산지마다 鐵場官을 두고 丁夫를 모집하여 채취하였다’0306)鄭道傳,≪朝鮮經國典≫, 金銀珠玉銅鐵.라 하고 또 태종 원년(1401) 7월에 정부가 동·서 양게에도 다른 도와 같이 철장을 설치하여 채취토록 결정한0307)≪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7월 경술.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공양왕 3년부터 동서 양계를 제외한 지역에만 철장을 개설했다가 태종 원년부터는 동·서북면의 철산지에도 철장을 설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전국의 주요 철산지에 철장제가 적용되었지만 황해도의 해주·文化·松禾 등 3개 읍의 경우는 예외였다. 3읍에는 고려 때 鐵所에서 복무하던 鐵干(鐵所干)들이 남아 있어, 口分田을 耕食하고 일체의 잡역이 면제된 채 뒤에 서술할 철장의 吹鍊軍들과 마찬가지로 鐵鑛役에 상시로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철장을 개설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0308)≪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2월 정묘.

당시 각 도 철장의 채굴·제련작업과 각 계수관 및 영·진의 무기제조 작업을 총관한 것은 당해 도의 都節制使나 都巡問使였다. 공양왕 원년(1389) 정부에서 각 도에 도절제사를, 동·서북면에는 도순문사를 각각 전임관으로 파견하여 군무를 총괄케 함으로써0309)閔賢九,<近世朝鮮前期 軍事制度의 成立>(≪韓國軍制史-朝鮮前期篇-≫, 陸軍本部, 1968).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韓國硏究院, 1983), 178∼181쪽.
결국 무기제조와 거기에 소요되는 철물 생산도 이들이 관장하게 된 것이다. 태조 원년(1392) 9월에 정부가 철물생산이나 무기제조작업에 모두 월과제를 적용하였기 때문에 각 도의 도절제사나 동·서북면의 도순문사들은 춘하추동의 매 季月마다 월별실적을 도평의사사에 보고하게 되었다.0310)≪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기해.

도절제사 또는 도순문사의 총관 하에 월과제를 바탕으로 철물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각 철장의 실질적인 관리자는「鐵場官」들 이었다. 전술한 지평현 철장처럼 감무가 겸관한 경우도 있었으나 국초부터 철장관리만을 점담토록 하기 위하여 정부는 별도로 철장관을 임명 파견하였다. 철장관은 정부가 파견한 정식 관원이자 엄연한 하나의 지방관이었다. 따라서 각 읍의 수령이나 水陸軍官·萬戶·千戶·儒臣敎授·驛丞·鹽場官과 더불어 각 도의 도관찰사가 考課表를 작성하여 정부에 보고하였고0311)≪太祖實錄≫권 8, 태조 4년 11월 신사. 관직의 이동이나 출척도 지방의 교수관이나 역승·염장관들과 같이 守令例에 의거 도관찰사가 부임일수와 勤慢 여부를 尙瑞司에 보고, 처리하였다.0312)≪定宗實錄≫권 5, 정종 2년 7월 을축.

철장관이 상주하여 관리하던 철장에서 월과제 하의 채굴제련작업에 동원된 농민을「吹鍊軍」이라 불렀다. 철장의 취련군은 각 계수관·영·진의 무기제조용 철물을 조달하는 임무를 지고 있었는데 이는 군역과 유사한 국역이었다. 따라서 태종 4년(1404)에 정부가 군역이나 국역을 지고 있던 자들에 대한 봉족지급수를 배정할 때에도 취련군에게는 鎭屬軍·鐵所干과 함께 田 1∼2결 이하의 貧戶일 경우에 전 2∼3결 이하의 봉족 1호를 정급하였던 것이다.0313)≪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5월 계축. 여기에서 취련군이나 철소간은 모두가 국용의 철물생산에 복무하던 本邑의 농민들이었고 구분전을 耕食하던 철소간과 마찬가지로 취련군도 상당수는 전 1∼2결 이하의 빈호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취련군도 철소간과 같이 일체의 잡역이 면제된 채, 오직 철장역에만 상시 복무함으로써 여타의 잡물세공은 면제되었다.0314)≪成宗實錄≫권 195, 성종 17년 9월 신미.

그런데 공양왕 3년(1391) 이래 철장제가 폐지되는 태종 7년(1407)까지의 시기에 전국의 철장 수가 얼마이며 또 각 철장에 종사한 취련군 수가 어느 정도 였던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무렵의 철장 수는 후술할 鐵場都會數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므로 20여 개소 가량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취련군 수에 관해서도 확실한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내용상 태종 7년 이전의 철장취련군제에 대한 것임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세조 7년(1462)에 軍籍從事官 尹孝孫이 “전라도 平昌縣의 軍案을 점검했을 때 다른 읍의 군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철장 취련군 200여 명이 모두 다른 역을 지지않고 오직 吹鍊役만 지고 있어 이를 모두 혁파하고 군액에 충당하였다”는 기사이다.0315)위와 같음. 이는 곧 조선 초기에 役制가 완비되지 못하여 황해도의 철소간제가 세종 12년(1430)까지 남아 있었듯이0316)≪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2월 정묘. 창평현의 철장 취련군제도 세조 7년(1462)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어떻든 창평현의 철장 취련군제를 미루어 볼 때 전국의 각 철장에도 대체로 200여 명 가량의 현지 농민들이 취련역에 투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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