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2. 방직업
  • 3) 면의 전래와 면업의 발전
  • (1) 면의 전래

(1) 면의 전래

綿은 B. C. 3000년 경에 인도의 신석기유적인 모헨죠다로(Mohenjodaro) 유적과 페루의 허카푸리에타(Huacaprieta) 유적 등에서 면사 및 면직물이 출토됨으로써 그 재배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가를 알 수 있다. 그 후 B. C. 1,500년 경의 讚歌集인 리그베다(Rig Veda) 중에 면직물 제직에 관한 기록이 있고 B. C. 800년경에 편찬된 인도의 마뉴법전(Institutes of Manu)에도 면에 관한 기록이 산견되는 등 면직·면업은 인도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중앙아시아·페르시아·동남아시아 등으로 확산 전파되었다.

중국에서 면업이 성립된 시기는 원나라 元貞 연가(1295∼1296)으로 강남지방의 松江府를 중심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0518)高承濟, 앞의 책, 87쪽. 그러나 이것은 본격적인 면업의 발달을 말하는 것이며 부분적인 면화재배는 이보다 앞선 송대에 이루어졌다. 송대에는 方勻의≪白宅編≫을 비롯하여 면화재배와 면방직에 관한 서적이 편찬되었으며 원 초(1273)에 편찬된≪農桑輯要≫에도 목면조항이 있어 1273년 이전부터 면이 재배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0519)민길자,<면직물의 제직연대에 관한 고찰>(≪문익점과 무면문화≫, 국립민속박물과, 1991), 109쪽.
陳維稷,≪中國紡織科學技術史≫(北京, 科學出版社, 1984), 151쪽.

일본에서는 799년 桓武天皇 때에 인도인에 의해 면종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다고 하지만 면의 재배는 1년만에 실패로 끝나 滅種되었으며, 그 후에도 몇 차례의 면재배가 시도되었으나 계속되지 못하였고 1598년 조선으로부터 면종자가 전래되어 비로소 일본의 면작·면직이 보급되었다.0520)武部善人,≪日本木棉史の硏究≫(吉川弘文館, 1985), 125∼129쪽.

우리나라에 면이 도입된 시기는 14세기 말 고려 공민왕 12년(1363)으로, 원에 사절로 갔던 문익점이 전래하여 다음해 13년(1364) 봄에 晋州 江城에서 栽植에 성공함으로써 널리 전파되었다.0521)≪太祖實錄≫권 14, 태조 7년 6월 정사.
≪三憂堂實記≫에 의하면 공민왕 12년(1363) 元의 사절로 간 문익점에 의해 전해 진 점은≪太祖實錄≫과 같으나 3년간 강남지방에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공민왕 16년(1367) 귀국할 때에 목면씨를 전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중국에서와 같이 면이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면화 전래 이전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출직물 중의 하나인 白氎布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백첩포에 관한 최고의 기록은≪翰苑≫으로 고구려에서 紫色纈紋綿·五色綿·雲綿과 함께 백첩포도 제직하였다0522)≪翰苑≫東夷傳 蕃麗.고 기록되어 있다.≪三國史記≫에도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入唐使節에게 大花魚牙錦 14필·小花魚牙錦 14필·朝霞錦 20필과 함께 40升 백첩포 40필을 사은품으로 보냈으며0523)≪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 경문왕 9년. 원대의≪冊府元龜≫에도 고려 왕건이 사신을 보내어 綿·罽·白苧와 함께 백첩을 조공하였다0524)≪冊府元龜≫권 970, 外臣部 朝貢 5.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高麗史≫에도 혜종 2년(945) 후진에 보낸 사은품 중에 罽綿을 비롯한 각종의 직물류 이외에 백첩포가 있는데, 1차로 200필을 보내고 다음에 다시 100필을 보냈다고 한다.0525)≪高麗史≫권 2, 世家 2, 혜종 2년.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제직된 백첩포와 면포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예로부터 아시아 지역에서 재배되었던 면의 품종은 크게 분류하여 1년생의 草綿과 다년생의 木綿이 있다. 초면(Gossypium Plant, 學名 Gossypium Herbaceum)은 60∼90㎝정도의 작은 초목으로서, 씨에 붙은 種子毛로 면포를 짠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면화는 초면을 일컫는다. 목면(Bombox tree, Bombox Malabaricum)은 키가 2∼2.5m의 다년생 수목으로 열매는 타원형인데 柳絮와 같은 황갈색의 짧은 種子毛로 직물을 짠다.0526)≪동아원색대백과사전≫(동아출판사, 1983). 이러한 사실은 이미 광해군 6년(1614) 에 저술된 李睟光의≪芝峯類說≫에서도 지적되었다. 그는 면을 3종류로 분류하였는데, 첫째는 누에고치에서 나온 면이고, 둘째는 큰나무에서 나는 목면이며, 셋째는 원대 이후 중국에 널리 재배되었던 초면으로서, 문익점이 우리나라에 전래한 목면이라는 것은 이른바 초면을 말한다0527)李睟光,≪芝峯類說≫.고 설명하였다.

백첩은 초면의 옛 명칭으로「pambak dip pambak」의 한자음이며 따라서 백첩포는 초면의 면직물을 말한다.0528)陳維稷, 앞의 책, 146쪽.
민길자, 앞의 글, 109∼111쪽.
무함마드 깐수,≪新羅·西域交流史≫(단국대 출판부, 1992), 47쪽.
백첩포는 고대와 중세에 걸쳐 인도·페르시아·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중국 주변국 등지에서 생산되었다. 당대의 玄奘法師는≪大唐西域記≫에서 북인도에는 백첩을 의복재료로 사용한다0529)玄 奘,≪大唐西域記≫(水谷眞成 譯, 東京, 平凡社, 1979).
민길자, 앞의 글, 105쪽.
고 하였으며, 신라의 慧超도≪往五天竺國傳≫에 중국·축국에서는 왕과 벼슬을 가진 부유한 사람들은 첩포로 만든 옷을 입는다0530)慧 超,≪往五天竺國傳≫(李錫浩 譯, 을유문고, 1970), 46쪽.고 하여 인도의 백첩포 사용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또한≪梁書≫·≪新唐書≫西域傳에는 ‘高昌國에 草가 있는데 백첩이라고 부르며 백성들은 花를 뽑아 布를 제직하였다’고 하여, 지금의 위구르 자치지구인 투르판지역에서 초면으로부터 백첩포를 생산했던 사실을 기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서역지방의 면직물은 4세기 경에 중국으로 전래되어 중국에서도 백첩포가 사용되었으며 그 유물이 동한·위진남북조·당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었다.0531)陳維稷, 앞의 책, 146쪽.
무함마드 깐수, 앞의 책, 47쪽.

그러나 중국 남쪽지방에서 널리 재배되었던 의료로서 역사가 오래된 또 다른 면직물류가 있다. 斑布·吉貝布·桐華布·白緤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백첩포와는 달리 다년생의 木棉樹로부터 부드러운 種子毛를 채취하여 직물을 짠 것이다. 이것은 초면의 면화보다 섬유의 길이가 짧아 직물로서의 가치가 초면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원대 초면재배가 확산되면서부터 첨자 사라져갔다.0532)陳維稷, 앞의 책, 147∼150쪽.<표 3>은 면업 성립 이전 중국에서 생산되어 온 면의 종류이다.

이상의 설명에서 우리 옛 문헌에 기록된 백첩포는 초면을 원료로 한 것이며 문익점에 의해 전래되니 초면으로 직조한 무명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문익점에 의한 면종자 도입 이전부터 초면의 면포를 직조하였던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신라시대에 벌써 면종자가 들어왔다고 지적한 것0533)崔南善,≪國民朝鮮歷史≫(六堂 崔南善全集 권 1), 303쪽.은 아마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문헌에 백첩포를 직조하였다고는 하여도 초면의 종자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찾아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면화 혹은 면사와 같은 원료를 수입하여 직조하였을 가능성과 혹은 극히 일부에서 초면이 재배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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